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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Aug 02. 2020

함무라비 법전

루브르 메소포타미아 전시관

친구의 죽음은 그에게 충격이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며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먼 이야기처럼 들렸다. 젊은 시절에는 언제든지 명예롭게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친구의 죽음을 직접 본 그는 두려웠다.


아무리 명예가 높고 재산이 많다고 한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허무했다. 그는 죽으면 끝인데 악착같이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연일 파티를 열어 폭음과 과식을 즐겼다. 하지만 죽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지구 끝까지 가서라도 그 방법을 찾겠다고 다짐하였다.


다음 날 그는 길을 나섰다. 가능한 한 그는 세상 구석구석까지 돌아다녔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그리고 몇 년을 돌아다녀도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오히려 세상천지에 그런 것이 어디 있냐며 사람들에게 비웃음만 샀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이상했다. 그들도 역시 죽을 것인데 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코 죽지 않을 사람처럼 하루하루 먹고 자고 즐겁게 지내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는 화가 났다. 길가메시의 발걸음이 천천히 왕국으로 향하고 있을 무렵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모든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대 홍수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에게 가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마침내 지구 끝에 다다른 그는 죽음의 바다를 건너 그가 찾던 사람을 만났다. 바로 우트나피시팀이다. 그는 처음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부인하다가 그가 끈질기게 달라붙자 깊은 바닷속에 불로초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길가메시는 발에 돌을 묶은 후 바닷속으로 뛰어들어가 불로초를 구했다.


불로초를 가지고 돌아가는 길은 너무나 행복했다. 가족과 친구들 함께 먹고 영원히 살 생각에 신이 났다. 그런데 돌아가는 중 맑은 샘물을 샘물을 보자 그동안의 피로가 쏟아졌다. 그래서 목욕을 하면서 잠시 쉬기로 했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몸을 씻었다. 그때 샘물 아래에 숨어 있던 뱀이 나타나 불로초를 먹어 버렸다. 뱀은 불로초를 먹자마자 허물을 벗고 사라졌다.


목욕을 마친 길가메시는 불로초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는 몇 날 며칠을 절망감에 빠져 있다가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여인이 다가와 그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길가메시야 매일 잔치를 열어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어라. 그리고 춤추며 기뻐하라. 또한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몸을 정결히 씻으며 너의 손을 잡고 있는 자식을 귀히 여기고 아내를 따스하게 안아주어라. 이것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행복하느니라.


잠이 깬 그는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범하지만 매일매일 하루를 집중하며 보내고 있었다. 꿈속에 나타난 여인의 말처럼 죽음은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루하루의 일상에 집중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행복임을 깨달았다.




기원전 3천 년에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불규칙한 강의 범람으로 항상 불안한 삶을 살았다. 또한 지리적으로 산이나 바다가 없고 사방이 트여 있어 주변 도시국가들과 전쟁이 잦았다. 이러한 환경에서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정기적으로 강이 범람하고 주변이 사막과 바다로 가로막혀 있어 이웃 나라의 침입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생활과는 근본부터 달랐다. 안정과 풍요 속의 이집트인들이 죽은 뒤에 자신들의 풍요가 계속되기를 염원하며 내세에 관심이 많았다면, 불규칙한 강의 범람과 개방적인 자연환경으로 전쟁이 잦았던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현실에 관심이 많았다.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길가메시 서사시>이다. 현재에 집중해서 살았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유물을 보기 위해서는 루브르 박물관의 3개의 입구 중 리슐리외 관으로 입장하여 2번 방으로 가야 한다.




2번 방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나람신의 전승비>이다. 사르곤 1세에 이룩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최초의 통일국가인 아카드 제국은 그가 죽은 후에는 여러 개의 국가로 다시 나누어진다. 그의 두 아들은 수메르 안팎에서 일어난 반란에 직면하여 사르곤으로부터 이어받은 영토의 일부만이라도 지키려고 애를 썼다.


이후 사르곤의 손자인 나람신은 사라곤 대왕의 계승자로서 그의 위상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그의 정복지가 고대의 근동 전역에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2270년경 이란 국경 지대에  있는 자그로스 산지에 사는 루르비인과의 싸움에 이겼음을 기념한 이 석비는 그의 무훈을 간결하면서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전승비 상단에 우뚝 서 있는 나람신은 신이 쓴다는 뿔이 달린 투구를 쓰고 활을 들고 있다. 그는 병사의 선두에 서서 쓰러진 적병의 시체를 용서 없이 짓밟고 있다. 하늘에는 그의 수호신인 태양이 높이 떠올라 있으며 그의 아래에는 산악 민족과의 싸움을 위해 아카드 군대가 경사가 심한 산을 오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완전한 무장을 갖춘 채 절도 있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는 왕의 발에 밟혀서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거나 목에 창이 박힌 채 쓰러져 있는 상대편 군사와 대조를 이룬다.  


이제 4번 방으로 이동하여 <함무라비 법전>을  감상하자.


인류 최초의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수레와 맥주를 발명한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기원전 3,500년경부터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이 합류하는 지역에 농사를 짓고 도시를 건설하였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최초 도시국가인 우르크와 우르는 등 도시국가로 시작하지만 기원전 2300년이 되어서는 북쪽의 아카드인들이 남쪽의 도시국가를 제압하고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였다.


이후 다시 남쪽의 바빌로니아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일했으며 당시 왕이 우리가 잘 아는 함무라비 법전을 만든 함무라비이다. 통일 왕국의 왕인 함무라비는 끊임없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자신의 왕국에 정의를 세우고 싶었다.


그는 상업과 농업을 발달시키고, 언어를 통일하고, 조세제도와 군사 제도를 변화시켰으며 무엇보다도 넓은 제국 안의 다양한 문제를 공평하게 처리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영토는 넓고 왕의 몸은 하나로 그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각지에 관리를 파견하고 언제 어디서나 왕이 재판하는 것처럼 똑같은 기준인 법을 만들어 사람들이 많이 방문하는 각 도시의 신전 앞에 세워 두었다.  




함무라비 법전의 상단에는 태양신으로부터 왕의 권한을 받는 함무라비 왕의 모습이 보인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뿔 모양 모자를 쓰고 왕좌에 앉아 왕의 힘과 권위를 상징하는 지휘봉과 반지를 주려고 하는 이가 태양신 사마 슈이고 함무라비는 그 앞에서 공손하게 예를 갖추고 서 있다.


당시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도 이 그림을 보면서 신이 내려준 법이니 꼭 지켜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또한 글자를 아는 사람들은 그림 아래의 법전의 내용을 보면서 자신이 어떤 죄를 지으면 어떤 벌을 받게 되는지 알았다.


그림 아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태양신 사마 슈가 이 세상에 빛을 준 것처럼
백성의 행복을 위해 이 세상에 정의를 주노라.
그리하여 강자가 약자를 못살게 굴지 않도록,
과부와 고아가 굶주리지 않도록,
평민이 관리에게 시달리지 않도록 이 법전을 제정한다.


기원전 1570년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만들어진 함무라비 법전은 인류 최초의 법전이 아니다. 바빌로니아 이전의 도시국가에도 <우르 나무 법전>이나 <리피트 이슈타르 법전> 등이 있었다. 하지만 함무라비 법전은 이전의 법전과는 달리 그 내용이 광범위하고 체계적이어서 최초의 법전으로 인식된다.


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같은 정도의 손해를 가해자에게 가하는 탈리오 법칙에 근거해 만든 함무라비 법전은 <눈에는 눈, 뼈에는 뼈, 이에는 이>로 알려지며 가혹한 법전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무한 보복의 원리가 적용되던 고대 사회에서 보복의 대상과 범위를 제한하는 합리적인 법이었다.


법전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자율을 33.3%로 제한하고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하면 3년으로 노예생활을 제한하였으며, 물건 매매시 증인과 계약서를 의무화하였다.


또한 과부의 재혼 권을 인정하였으며 빈곤자에게는 치료비와 수술비를 절반으로 줄였으며 계절별로 최저임금제를 적용해 해가 긴 여름에는 노동시간이 길어 임금을 많이 지급하고 해가 짧은 겨울에는 노동시간이 적어 임금을 작게 지급하는 법을 적용하였다.


정의 실현과 사회적 약자 보호 그리고 삶의 질을 높이려는 함무라비 법전은 오늘날 현대에 적용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인류의 지혜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다.   


이제 3번 방으로 이동하여 3번 방으로 이동하여 아시리아 문명의 유물들을 계속해서 감상하자.

 

바빌로니아가 무너지고 히타이트의 침입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다시 혼란에 빠진다. 기원전 1,000년경에 아시리아 제국이 히타이트를 무찌르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새로운 강자가 된다. 이후 페르시아로 이어지고 이는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한다.




아시리아 유물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라마수>이다. 인간의 머리를 한 거대한 동상은 니네베 궁전을 지키던 라마수이다. 무게 10톤 이상의 거대한 돌을 통째로 깎아 만든 라마수는 지혜의 상징인 인간의 머리와 용맹의 상징인 독수리의 날개 그리고 성실함의 상징인 소의 몸을 지닌 상상 속의 동물이다.


거대한 라마수 동상의 바로 옆에는 목재를 운반하는 모습을 담은 벽화가 보인다.




이 부조는 지배자의 이미지를 과장되게 표현하여 강력한 왕권을 보여주는 당시의 부조와는 달리 아시리아 왕들의 능력을 통해 왕권의 권위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아시리아는 목재가 부족했다. 그래서 왕궁을 짓기 위해 레바논에서 목재를 수입해야 하는데 지금의 이라크 모술에 해당하는 니네베에서 레바논까지 직선거리만 720킬로미터였다. 부조는 레바논에서 삼나무를 자르고 바닷가로 옮긴 후 바다를 거쳐 강 하류에서 상류로 물길을 거슬러 나무를 나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엄청난 사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아시리아 제국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물결 속에 숨어 있는 동물들이다.

거북이와 도마뱀 등 각종 물고기를 화면 곳곳에 새겨 놓아 지루함을 피했다. 이는 정해진 법칙에 따라 근엄한 모습을 보여주던 고대 메소포타미아 예술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길가메시 조각상을 감상하자.




우루크 제1 왕조 5대 왕이었으나 후에 전설적인 영웅이 된 그는 사자를 안고 있다. 당시 사자 사냥은 국민들의 안전과 왕의 용맹을 보여주는 연례행사였다.


BC 7세기 니네베의 아슈르나팔 왕궁 서고에서 발견된 <길가메시 서사시>에 따르면 반신반인의 영웅인 길가메시는 폭군이었지만 하늘로부터 벌을 받아 죽게 된 친구 엔키두의 죽음을 보며 결코 죽지 않는 불로초를 찾아 여행을 떠나 불로초를 구하지만 잠시 쉬는 사이 뱀이 먹어버리자 그는 영원한 삶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왕궁으로 돌아온다.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행복을 위해 미래의 불안이나 과거의 추억에 사로잡히지 않고 현재를 즐기는 수메르인의 지혜가 잘 나타나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존과 즐거움을 위해 많은 것들을 발명했다. 국가의 질서를 위해 법전을 만들었으며 생활에 필요한 달력과 바퀴를 만들었다. 또한 즐거운 생활을 위해 맥주와 악기도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발명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도시이다.


그들이 비옥한 영토에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농사에 필요한 대형 수로를 만들며 곡식과 토양을 보호할 지배층과 군인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잉여 농산물을 거래할 수 있는 상인들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장들이 생기면서 도시가 탄생하고 문명이 시작되었다. 이후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전쟁 등 치열한 현실을 살면서 그 속에서 피어난 지혜와 정신을 가지고 화려한 문명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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