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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Feb 13. 2021

런던 첼시 산책

보수와 진보의 공존

첼시 지역은 강변의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하지만 헨리 8세가 통치하던 16세기가 되자 수 많은 귀족들이 이곳으로 몰려들면서 궁전 마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왕과 귀족의 몰락으로 잊혀졌다가 19세기 말이되자 새롭고 급진적인 예술가들이 몰려들면서 첼시는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예술가의 거리가 되었다. 당시 이 거리에 살았던 예술가들 중 다수는 로열 아카데미의 엄격한 보수주의에 반발하며 <뉴 잉글리시 아트 클럽>의 일원이 되었다.


런던을 파리와 뉴욕의 중간쯤으로 생각했던 미국인 출신 화가인 제임스 휘슬러가 살았던 화이트 하우스부터 첼시 산책을 시작한다.



1890년 휘슬러는 예술 비평가 존 러스킨을 상대로 한 법정 공방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화이트 하우스를 팔아 넘겨야 했다.



휘슬러는 런던의 유명 유원지였던 크리몬 정원의 불꽃놀이 장면을 묘사한 풍경화<검은색과 금빛의 야상곡: 떨어지는 불꽃>을 그렸다. 작품의 전경에는 구경꾼들이 유령처럼 그려져 있고 안개 낀 밤하늘 위로 쏘아진 폭죽은 노란 불꽃이 되어 강물로 떨어지는 작품이었다. 이 풍경화를 본 러스킨은 대중의 면전에 물감 통을 집어던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난하였으며 휘슬러는 런던 촌놈의 뻔뻔한 바가지라며 맞섰다. 휘슬러는 러스킨을 상대로 한 재판에서 승소하였지만 1파운드의 보상금을 챙기며 파산하였다.


화이트 하우스가 있는 타이트 거리의 34번지가에 오스카 와일드가 살았던 집이 있다.



명문가의 엄친아로 태어난 오스카 와일드는 옥스퍼드대학의 재학 시절에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지은 시가 영국과 프랑스의 문단을 떠들썩하게하며 단번에 유명해졌다. 대학 졸업 후 뉴욕과 파리에서 그의 한 미학 강의는 그를 국제적인 스타로 만들었으며그의 대표작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불멸의 명작이 되었다. 1884년 결혼하여 1895년 동성연애로 체포·감금될 때까지 오스카 와일드는 이 집에서 살았다.


오스카 와일드의 바로 옆집인 31번지에는 가장 유명한 미국인 초상화가인 사전트가 살았다.



사전트는 초상화를 그릴 때 모델의 매력을 정확히 포착해 활달한 필치로 간략하면서도 핵심을 살려 표현해 냈다. 그가 그린 <마담 X>는 여인의 화사함 대신 창백함을 강조하였으며 보석 끈이 달린 검은 벨벳으로 만들어진 드레스는 심플하면서 고급스럽다. 도발적인 표현으로 우아함과 관능미가 넘치는 그의 작품은 현대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크리스찬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는 그의 작품에 영감을 받아 2008년 봄 파리 컬렉션을 발표했다.


타이트 거리에서 템즈 강쪽으로 내려오면 강변으로 전통 고급 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런던 최고의 건축가인 리처드 노먼이 1870년에 건축한 이집들은 타이트 거리의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분위기를 무시한 채 틀에 박힌 빅토리아 양식으로 지어졌다. 하지만 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늘 인기가 많았던 이곳에 20세기 유명 인사였던 록밴드 롤링스톤스의 믹 재거와 재벌자선가였던 폴게티 2세가 살았다.


강변에서 다시 주택가로 올라가면 오랜 역사를 지닌 식물원인 첼시 피직 가든이 나온다.



과수원과 농장으로 둘러싸였던 옛 첼시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식물원은 1673년 약용 식물을 연구하기 위한 약초 재배원으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 5천 종이 넘는 약용 식물을 보유하고 있다. 안내판을 따라가다 보면 피임약의 재료인 멕시코산 얌과 아스피린을 제조하는 데 쓰이는 터리풀 그리고 류마티즘 치료를 위한 조름나물 등 세상에서 가장 진귀하고 흥미로운 식물들을 만나볼 수 있다. 식물원 내에는 카페가 있어 영국식 정원에서 차를 마시며 근사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식물원을 나와 다시 반대편 강변으로 내려가면 체인 워크 거리가 나온다.



16세기에 목초지와 채소밭이었던 이곳에 헨리8세의 조언자이자 친구였던 토마스 모어가 전원 저택을 짓고 살았다. 토마스 모어가 런던 타워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아름다운 별장과 정원 그리고 과수원에 관한 수 많은 편지를 모어에게 보냈다. 모어의 저택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헨리 8세는 인근에 자신의 별장을 지었다. 체인 워크 거리의 19번지에서 26번지까지 차지했던 헨리 8세의 별장의 마지막 주인은 한스 슬론이었다. 의사였던 그는 자신의 수집품을 국가에 기증하여 대영박물관의 창시자가 되었다.


체인 워크 거리의 끝으로 가면 분홍색과 흰색으로 칠해진 앨버트 다리가 나온다.



첼시와 배터시를 이어주는 앨버트 다리는 1873년에 만들어졌으며 1887년에 현재의 현수교로 완성되었다. 앨버트 다리에서 강 위쪽으로 가면 오클리 거리가 있다.



오클리 거리 56번지에 남극탐험가인 로버트 스콧이 살았다. 최초의 남극점 정복은 노르웨이의 아문센이 이루었지만 로버트 스콧은 이 기록을 깨지 못하고 남극에서 비극적으로 운명하였다. 이후 로버트 스콧의 원정 대원이었던 새클턴은 남극점 정복 대신 남극 대륙 횡단을 시도한다. 1914년 8월, 28명의 선원을 태운 인듀어런스 호는 남극을 향해가지만 목적지 150Km를 앞두고 얼음속에 갖혀 배는 파손된다. 생명을 담보할 수없는 곳에서 고립된 이들은 새클턴의 목숨을 건 리더십으로 634일만에 귀환할 수 있었다. 당시 빙벽에 갇힌 대원이 일기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새클턴은 은밀히 자신의 아침 식사용 비스킷을 내게 먹으라고 건네주었다. 내가 비스킷을 받으면 그는 저녁에도 내게 비스킷을 줄 것이다. 나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이같은 관용과 동정을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한가. 나는 죽어도 새클턴을 잊지 못할 것이다. 또한 수천 파운드의 돈으로 결코 그 한개의 비스킷을 살 수 없을 것이다.


오클리 거리 87번지에는 오스카 와일드의 어머니가 살았다. 오스카 와일드는 동성애로 세간의 질타와 박해를 받자 이곳에서 두문불출하며 분노를 삭였다고 한다. 하지만 1895년에 체포되어 2년간의 감옥살이를 하였다.


오클리 거리에서 오른쪽에 보이는 어퍼 체인 거리 22번지에 첼시를 진보의 상징으로 만들었던 수필가 리 헌터의 집이 있다.



조지 4세가 되는 리젠트 황태자를 뚱뚱한 50대 미소년이라 놀린 대가로 2년간 투옥된 그는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이었던 키츠를 비롯하여 많은 대중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블랙우즈 매거진은 비천한 출신의 리 헌트의 시에 <영국 촌놈파>라는 꼬리표를 달며 그를 조롱했다.


다시 템즈강으로 내려가면 첼시 교회가 나온다.



헨리 8세가 세 번째 아내인 제인 시모어와 공식적인 궁정 결혼식을 거행하기 전 결혼 서약을 한 이곳에 토마스 모어는 개인 예배당을 짓기도 했다. 당시 대법관이었던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의 충직한 조언자이자 친구였지만 헨리 8세의 이혼과 영국 국교회를 거부한 댓가로 런던 타워에 수감되어 1535년에 처형당했다. 교회 뒤편의 정원으로 가면 양심과 신념을 지킨 그의 동상이 있다.


첼시 교회가 있는 올드처치 거리의 다음 블럭에 18세기 중반에 설립된 도자기 회사 첼시 차이나가 있다.



18세기 첼시는 런던에 도자기 제품을 공급하던 주요 생산지로 강가에 면해 있어 운송이 편리했고 강변의 넓은 늪지로 도자기 제조 후 폐기물을 처리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첼시 차이나의 사장 니콜라 스프리몽트는 프랑스 신교도인 위그노 출신으로 프랑스 세브르 도자기의 맑은 색감과 정교한 장식에 영감을 받아 이곳에 도자기 회사를 차렸다. 오직 품질로 승부한 그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완제품의 90퍼센트까지 폐기하였다. 첼시 차이나의 장인 정신이 깃든 도자기 작품 일부는 현재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이제 첼시를 대표하며 가장 유명한 아이비 첼시 가든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오늘 산책을 마무리 한다.



2019년 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식당으로 선정된 이곳에서 가장 인기있는 아보카도가 들어간 에그 베네딕트의 부드러우면서 관능적인 맛을 경험한다면 사람들이 왜 첼시에 와야 비로소 런던의 매력을 알 수 있는지 그 이유를 단박에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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