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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Feb 10. 2021

로마 산책

로마는 살아 있다.

로마 지하철 콜로세오역을 나서면 바로 눈 앞에 콜로세움이 우뚝 서 있다. 서기 72년 베아파시아누스 황제가 짓기 시작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가 완성한 콜로세움은 높이 84m의 4층 규모로 각 층에는 72개의 아치가 있어 경기가 있는 날이면 1층 72개의 문으로 5만 명이 15분 만에 입장할 수 있었다.


서기 68년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네로 황제가 자살하자 군인 황제들이 득세하여 로마는 혼란에 휩싸인다.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로마 원로원은 그의 아들과 함께 유대 지역을 진압하고 있는 베아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지명한다. 로마 최초의 평민 출신인 베아파스아누스 황제는 아들을 전장에 두고 로마로 돌아와서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베아파시아누스는 네로와 군인 황제들이 펼친 폭정에 지친 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폐허가 된 네로 황제의 황금궁전터에 크고 웅장한 경기장을 지을 것을 천명한 다. 황제의 명을 받은 공사 책임자들은 양 옆으로 벽돌을 쌓고 벽돌 사이에 모래와 흙 그리고 사암을 썩은 콘크리트를 집어넣어 가늘면서 튼튼한 벽기둥을 만들었다. 그리고 하중을 잘 버티는 아치로 벽기둥을 연결하여 2천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장엄한 경기장을 만들었다.


경기장이 완성된 후 황금궁전에 있었던 35m의 거대한 네로 동상인 콜로수스를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는데 이를 인용해 경기장을 콜로세움이라 불렀다.



콜로세움을 지나면 정면에 로마에서 가장 크고 잘 보존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나타난다. 312년 밀비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 황제에게 승리하면서 로마 제국의 패권을 쥔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상징하는 개선문의 중앙에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신의 뜻대로  
instinctu divinitatis



막센티우스와의 마지막 전투 전날 꿈속에서 십자가를 보며 승리를 확신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처음 공인하였으며 로마의 수도를 당시 동서무역으로 부가 넘쳤던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로 옮기며 로마의 번영을 다졌다.


콜로세움과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사이로 들어서면 옛 로마의 영광을 보여주는 포로로마노가 나온다. 포로로마노의 입구에 티투스 개선문이 있다.



서기 81년 티투스가 사망한 직후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동생 도미티아누스의 명에 따라 건설된 티투스 개선문은 티투스가 예루살렘에서 유태인 반란을 진압한 업적을 찬양하는 조각으로 꾸며져 있다. 개선문의 아치 하단 오른편에 로마 병정들이 예루살렘 신전에서 약탈한 보물들을 나르는 모습이 보이는데 당시 가져온 보물과 유대인 포로 4만 명으로 그는 콜로세움을 완성하였다. 당시 전쟁의 패배로 유대인은 자신의 국가를 잃어버리고 로마 제국의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티투스 개선문을 통과하여 왼쪽 언덕으로 오르면 황제들의 거주지였던 팔라티노 언덕이 나온다. 당시 건축물들이 워낙 붙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언덕 유적지는 마치 벌집 모양을 하고 있다.



기원전 1,000년부터 팔라티노 언덕에 사람들이 살았는데

로마 전설에 따르면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 형제의 형인 로물루스는 자신의 땅을 욕심내는 동생인 레무스를 죽이고 이 언덕에 로마를 세웠다고 한다. 로마라는 이름은 로물루스에서 기원한다.



엄청난 규모로 늘 한적하고 평화로운 팔라티노 언덕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스타디움이라 불리는 도미티아누스 원형 경기장이다. 이곳은 보존이 워낙 잘되어 힘들게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당시 검투사들로 가득한 운동장을 눈으로 그려 볼 수 있다.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전망대로 이동하면 포로로마노가 발아래 펼쳐진다.



포로 로마노는 로마 제국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의 중심지로 1천 년에 걸쳐 중축되고 확장된 이곳에 법원과 은행 그리고 신전과 시장으로 꽉 차 있었다. 수십 세기 전 이곳에 몰려들었던 로마 군중들은 소란스러운 법정에서 재판에 야유를 퍼붓는가 하면 원로원에 들러 키케로 같은 위대한 정치인들의 연설을 들었다. 또한 시장에서 값비싼 비단과 향유를 비교하면서 쇼핑을 즐겼으며 때로는 신전에서 자신의 미래를 위해 기도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포로 로마노 옆에 자신의 이름으로 거대한 포룸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이 정치권력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원로원 건물을 자신의 포룸 앞에 옮겨와 지었다. 원로원은 오늘날 국회로 건물 중앙에 로마 최고의 관직인 집정관이 앉는 의장석이 있었으며 좌우에 원로원들이 앉았다. 앞쪽에는 연장자가 뒤쪽에는 신참이 앉았던 원로원은 처음에는 150명이었으나 점차 그 수가 늘어 최대 규모일 때는 6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원로원을 나오면 큰 대로인 신성한 길이 펼쳐지는데 이곳에서 구름처럼 몰려든 로마 시민들은 전쟁을 승리하고 개선한 군인들과 장교들에게 환호성을 보냈다. 신성한 길 끝에 보이는 뱃머리 모양의 연설단에서는 안토니우스가 로마 시민에게 재산을 상속한다는 카이사르의 유서를 공개하며 감동젓인 추모연설을 하였다.


포로로마노를 나서면 임페리얼 거리가 나오고 거리를 건너면 오늘의 점심식사 장소인 레스토랑 멜로가 나온다.



숨은 맛집이자 로마 전통식당인 멜로로 들어가면 로마 전통 양식의 인테리어와 더불어 친절한 주인의 환대를 받는다. 멜로에서 점심식사로 저렴하면서 맛있는 봉골레 파스타와 라자냐를 추천한다.


바다향이 들어간 조개의 감칠맛과 마늘과 올리브 오일의 고소한 맛이 어우러진 봉골레 파스타는 전통 이탈리아의 맛을 음미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한 이 집이 자랑하는 라자냐는 넓적한 라자냐 면 사이에 치즈와 소고기가 꽉 차 있어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맛있는 점심과 함께 여유로운 휴식을 취하였다면 식당을 나서 바로 앞에 보이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건설한 포로 트리아노로 이동한다.



로마 제국이 마지막으로 건설한 가장 큰 공공 광장인 포로 트리아노는 서기 110년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키아와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여 만들었다. 당시 로마 시민 사회의 중심은 포로 로마노였는데 빠르게 늘어나는 로마의 인구를 감당하지 못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그 해결책으로 포로 로마노보다 더 큰 포룸인 포로 트라아노를 건설하였으며 값비싼 청동과 금 그리고 반들거리는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현재 포로 트리아노의  중심에 40m의 트라야누스 기념탑이 그때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다.



101년 트라야누스 황제가 지금의 루마니아 지역인 다키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모습을 새긴 기념탑에는 2차례 다키아 원정을 일기를 쓰듯이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마치 전쟁터에서 종군기자가 사진을 찍은 듯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기둥의 내부에 있는 185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정상에 트라야누스 황제의 동상이 있었으나 지금은 성 베드로 동상이 있다. 기둥 아래에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유해가 있다.



트라야누스 기둥 옆의 거대한 붉은 벽돌 단지는 트라야누스 시장으로 트라야누스 황제를 위한 행정 사무소와 시민들에게 필요한 일상용품과 사치품을 파는 가게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 규모가 지금의 백화점보다 더 크고 화려했다고 한다.


트라얀 시장을 나오면 처음 출발지인 콜로세움이 보인다.콜로세움으로 와서 내부로 입장하자.



콜로세움 내부는 관중석과 중앙 경기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관중석 1층 중앙에는 황제와 가족들이 앉았으며 그 주위로 베스타 신전의 사제들과 원로원 의원들이 앉았다. 2층은 귀족들과 부유한 평민들의 앉았으며 3층에는 무료로 입장한 노예와 여성들이 앉았다.



수많은 나무 받침대 위에 나무판을 깔고 모래와 자갈로 덮은 원형의 경기장은 모의 해전을 하는 날이면 무대와 그 아래 있는 나무 받침대를 치우고 지하부터 깊이 6m까지 물을 채웠다.


80년 콜로세움을 완성한 티투스 황제는 100일간 개막행사를 성대하게 치렀다. 개막행사 중 하나인 맹수 사냥에서는 로마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코끼리와 중동의 사자 그리고 게르만족의 곰과 호랑이 등 5천마리가 넘는 진귀한 맹수들이 희생되었다. 황제는 개막행사를 통해 로마제국의 번영과 저력을 보여주며 로마 시민에게 자부심을 심어 주었다.



역대 황제들이 콜로세움에 정성을 들인 이유는 콜로세움이 황제와 로마 시민들이 직접 소통하는 정치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경기 후 진 검투사를 죽이고 살리는 것은 시민들의 검지에 따른 황제의 결정으로 이로써 황제와 시민들은 하나가 되었다.


405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검투사 시합을 폐지하면서 콜로세움은 문을 닫았다. 이후 지진의 피해와 르네상스 시대에 궁전과 교회를 세우기 위해 콜로세움에서 재료를 가져 다 쓰는 바람에 콜로세움은 외벽의 절반이 없어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콜로세움을 세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마지막 한마디처럼 모진 풍파의 역사속에서도 콜로세움은 뼈대만 남은 채 2천 년 세월을 견뎠다.



 황제는 누워서 죽을 수 없다.




평등과 공동체를 중시하던 그리스와는 달리 자유와 개인의 능력을 중요시한 로마제국이 역사상 전무후무한 로마성공을 이룬 비결은 시민을 위한 정치와 개방성 그리고 상호 견제의 정치문화에 있다.  


로마의 황제들은 수많은 식민지 전쟁을 수행하며 로마 시민들에게 경제적 풍요를 안겨 주었으며 콜로세움과 포럼 등 공공시설을 지어 시민들의 편리와 즐거움을 제공했다.또한 식민지에 대한 착취를 최소화하고 그들을 존중하며 그들 스스로 로마제국 안으로 스며들게 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제도가 시민권이다. 누구든 일정 기간 로마 군대에 복무하면 로마의 시민으로 인정해주었으며 로마의 시민들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 트라야누스처럼 로마시대 최고의 집정관이나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영광을 가져온 마지막 비결은 상호 견제의 정치 문화에 있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서 <로마사 논고>에서 로마 제국이 부패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 이유로 평민의 요구를 반영하는 호민관 제도를 만들어 황제와 원로원에 합리적으로 견제하였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이는 오늘날 야당이 여당과 정부를 견제하는 삼권분립의 정치제도가 되었다.    


서기 400년이 넘자 로마제국에 시민들을 위한 정치와 견제에 의한 정치문화가 실종되고 황제와 귀족들이 관직과 재산을 독점하면서 로마제국은 점차 몰락해갔다.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천년을 지배할 기독교 중심의 중세시대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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