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랑도 흐른다.
파리여행 마지막 날의 첫 번째 방문지는 노트르담 대성당이다. 1163년에 시작하여 1330년에 완성된 노트르담 대성당은 고딕 건축양식의 결정판으로 돌에 새긴 위대한 성경책이다.
노트르담 성당의 3개의 정문 위에 조각된 조각들은 성경책에서 금방 나온 듯 생동감이 넘친다.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있으며 최후의 심판을 하는 예수님과 이를 슬픈 눈으로 지켜보는 성모 마리아와 12제자들도 보인다. 또한 중앙의 문에 새겨진 포도나무의 가지는 예수를 향하여 뻗어 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
유럽으로 건너온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국교로 지정되면서 초기 성당은 로마 바실리카 건물로 대체되었다. 이후 성당은 순례자를 위해 로마식 아치와 두터운 벽 그리고 작은 창문으로 이루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13세기에 접어들자 막강한 권력을 획득한 교황과 국왕은 더욱 높고 화려한 고딕 성당을 지었다. 그들은 뾰족한 아치로 천장을 높이고 대형 스테인드 글라스를 만들어 성당 안으로 하나님의 빛이 쏟아지도록 하였다. 물론 커다란 스테인드 글라스로 약해진 벽을 보호하기 위해 부벽과 기둥을 설치하였다. 세느강변에서 노트르담 성당을 보면 많은 스테인드 글라스가 설치된 벽을 지지하는 부벽과 이를 연결하는 기둥들을 볼 수 있다.
높고 화려해진 고딕 성당으로 들어가면 향 냄새와 더불어 묵직한 돌기둥과 성경 속 인물들로 가득 찬 스테인드글라스가 하나남의 무한한 은총을 보여준다. 또한 십자가 모양의 뼈대가 그대로 드러난 천장이 성당 안으로 들어오는 빛과 만나 여행자로 하여금 지상에 구현된 천상의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뼈대들이 영적이며 신적인 빛과 만나 신과 인간이 하나 된 세상을 보여준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르네상스 예술이 지상 최고의 세계를 보여준다면 보이지 않는 신의 세계를 추구한 중세 예술은 천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나와 센 강으로 가면 지하철 역이 나온다. 1호선을 타고 2 정거장을 가면 루브르 박물관이다.
16세기까지 프랑스 왕실의 궁전이었던 루브르는 1793년 프랑스 시민혁명으로 시민들을 위한 박물관이 되었다. 박물관 입구에 보이는 유리 피라미드는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기념하여 지어진 것으로 방문자들의 원활한 동선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박물관은 더 이상 과거의 무덤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창이라는 의미로 만들어졌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모나리자와 비너스이다. 1503년 여름 리자를 아내로 맞이한 피렌체 상인 조콘다의 부탁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완성한 모나리자는 윤곽선을 없애는 스푸마토 기법으로 신비스러우면서 행복한 인간의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으로 신보다인간을 중시하는 본격적인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했다.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시대가 본보기로 삼았던 고대 그리스 시대에 탄생한 비너스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이성적인 상체와 치마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현실적이며 육감적인 하체가 조화를 이루며 지상 최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는 얼굴에서 어깨까지의 길이와 어깨에서 배꼽까지 길이가 1:1.6인 황금 비율로 조각되어 영원한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인간의 육체적 아름다움과 내면의 정신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보여주는 비너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클래식 즉 고전주의의 원형으로 자리 잡았다.
루브르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또 다른 작품은 함무라비 법전이다.
함무라비 법전의 상단에는 태양신으로부터 왕의 권한을 받는 함무라비의 모습이 보인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뿔 모양의 모자를 쓴 태양신 사마 슈가 왕좌에 앉아 왕의 힘과 권위를 상징하는 지휘봉과 반지를 함무라비에게 전달하고 있다. 당시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도 이 그림을 보면서 신이 내려준 법이니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글자를 아는 사람들은 그림 아래의 법전의 내용을 보면서 자신이 어떤 죄를 지으면 어떤 벌을 받게 되는지 알았다.
기원전 1570년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만들어진 함무라비 법전은 <눈에는 눈, 뼈에는 뼈, 이에는 이>라는 문구로 가혹한 법전으로 유명하다. 이는 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같은 정도의 손해를 가해자에게 가하는 탈리오 법칙에 근거한 것이지만 이는 무한 보복의 원리가 적용되던 고대 사회에서 보복의 대상과 범위를 제한하는 합리적인 법으이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자율을 33.3%로 제한하고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하면 3년으로 노예생활을 제한한다. 그리고 과부의 재혼권을 인정하며 빈곤자에게는 치료비와 수술비를 절반으로 줄인다. 또한 계절별 최저 임금제를 적용해 해가 긴 여름에는 임금을 많이 지급하고 해가 짧은 겨울에는 임금을 작게 지급한다.
정의 실현과 사회적 약자 보호 그리고 삶의 질을 높이려는 함무라비 법전은 오늘날 현대에 적용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인류의 지혜이다.
루브르 박물관을 나오면 점심시간이다. 파리에 오면 누구나 맛보아야 할 크레페가 먹고 싶다면 마레지구에 있는 브레즈 카페를 추천한다.
프랑스 북서부에 있는 브르타뉴 출신의 셰프 베르트랑 라르셰는 1995년 일본 도쿄에 첫 크레페 집을 열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여세로 2003년에는 자신의 고향에, 2005년에는 파리에 크레페 집을 오픈하였다. 현재 파리와 일본에만 12개 지점을 두고 있는 베르트랑의 명성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브레즈 카페에 들러 버섯과 치즈 그리고 달걀과 햄이 들어간 원조 브르타뉴 크레페를 입에 넣으면 고소하면서 달콤한 크레페의 맛에 여행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진다. 혼자가 아니라면 캐비어 향에 청어알이 톡톡 터지는 스페셜 크레페 범선이나 버터와 설탕으로 만든 캐러멜과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조화로운 반테즈도 주문해서 함께 맛보기를 추천한다.
점심식사를 마쳤다면 평화로우면서 아기자기한 마레의 골목길을 산책하면서 보주 광장으로 이동하자.
1612년 앙리 4세에 의해 만들어진 보주 광장은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광장으로 왕가의 광장이라 불렸으나 1799년 이곳을 양도받은 보주의 이름을 따서 현재 보주 광장으로 부른다. 루이 13세의 기마상이 있는 보주 광장의 남쪽 건물에 왕의 저택이 있었으며 맞은편 북쪽 건물에 왕비의 저택이 있었다.
당시 푸른 풀밭과 나무로 둘러싼 보주 광장과 붉은 벽돌로 장식한 저택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리슐리외 추기경을 비롯한 몰리에르와 빅토르 위고 등 많은 귀족과 문호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레미제라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빅토르 위고의 집으로 입장하면 7개의 방에 그가 쓰던 가구들과 중국 자기 그리고 그의 데생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조명이 어둡게 내려앉은 침실로 입장하면 빅토르 위고가 사망할 당시 그가 누워 있었던 침대를 마주한다. 여행자는 그의 소설 <레미제라블>에 있는 문구를 그의 죽음에 바친다.
당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신을 만나게 된다.
빅토르 위고의 집에서 내려다보는 보주 광장은 매우 아름답다. 천천히 집과 광장을 감상한 후 집을 나서서 마레 지구의 끝에 있는 바스티유 광장으로 향한다.
마레지구가 대저택과 번화가가 있는 상류층 세계였다면 바스티유 지구는 전통적으로 노동자 계층의 안식처였다. 최근 바스티유 오페라를 필두로 현대적인 갤러리와 최신 트렌드의 상점들 그리고 세련된 레스토랑이 들어서면서 바스티유 지구가 고급화되었지만 아직도 거리 곳곳에는 서민적인 요소가 눈에 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포보르 생 탕 투안 거리이다.
루이 14세가 면세 특권을 주어 육성한 가구와 카펫 숙련공들의 작업실이 늘어서 있었던 포보르 생 탕 투안 거리에는 오늘날 오래된 집들과 술집 그리고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이 골목에 살았던 사람들의 상당수는 프랑스혁명 때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던 혁명군이 되어 자유를 위해 싸웠다.
골목을 지나 광장으로 나오면 52m 높이의 탑이 보인다. 1830년 7월 혁명의 희생자들이 묻혀있는 탑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잊을 수 없는 1830년 7월 27일, 28일, 29일에 공공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를 무장하고 싸운 프랑스 시민들의 영광을 위해
바스티유의 카페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면 이제 낭만적인 파리의 마지막 밤을 만끽하기 위하여 세느 강으로 이동하여 유람선을 타자.
파리 대부분의 관광지들이 세느강가에 있어 유람선을 타면 아름다운 파리 야경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파리 유람선의 압권은 해질 무렵이다. 해질 무렵 유람선을 타고 세느강을 따라 파리를 가로지르면 빨갛게 달아오른 노을을 배경으로 루브르와 오르세 그리고 노트르담 등의 고전 건축물들이 그림책 펼치듯이 차례로 다가왔다가 사라진다. 그리고 세느강 유람선의 회항지인 미라보 다리를 지나면 프랑스의 낭만파 시인인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른다라는 시가 저절로 떠 오른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흐르네
내 기억해야만 하리
고통뒤에는 언제나 기쁨이 온다는 것을
밤이 오고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일주일이 지나지만
사랑은 돌아오지 않는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흐고
우리들의 사랑도 흐른다.
유람선이 어둠을 헤치고 에펠탑으로 다가가면 에펠탑은 낮의 늘씬하면서 늠름한 철의 조형미는 사라지고 시꺼먼 어둠을 향해 불타오르는 어마어마한 불기둥으로 변해 있다. 비현실적 풍경을 마주한 여행자는 세상에 태어나 내가 지금 이 곳에 있다는 사실에 황홀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으로 낭만적인 밤이 끝나지 않는다. 잠시 후 사람들이 외치는 카운트 다운이 끝나고 정각이 되면 수 많은 사이키 조명이 에펠탑 위에서 보석처럼 반짝인다. 순간 유람선 안은 수많은 여행자들의 감탄과 환호성 그리고 플래시로 아수라장이 된다. 아름다운 별들이 에펠탑 주위를 마구 휘돌아다니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 여행자를 싣고 유람선은 세느강을 따라 유유히 흐른다.
우리의 사랑도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