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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Aug 04. 2020

루벤스와 렘브란트

가장 화려한 빛과 색채 바로크 미술

최초의 바로크 양식이 탄생한 곳은 종교개혁을 반대하는 이탈리아 바티칸이었다. 그들은 종교개혁으로 개신교에 비해 가톨릭의 우월함을 보여주기 위해 풍부한 색채와 뚜렷한 명암대비 그리고 역동적인 표현을 통해 신의 세상에서 보면 인간이 얼마나 작고 미미한지를 보여주는 감성적이며 화려한 바로크 작품을 만들었다. 이후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의 미술은 17세기 스페인과 프랑스의 절대 군주 아래에서 화려한 궁전 미술로 꽃을 피웠다.


그러나 동시대에 상업과 무역으로 성공한 부르주아 시민들이 중심이 된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의 북부지역에서는 바로크를 그들의 일상과 풍경을 담는 데 사용하였다. 이제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 바로크 화가들의 작품을 차례로 감상하자.


제일 먼저 카라바조의 <성모의 죽음>을 감상하자.


작품에서 마리아가 죽은  침대에 누워 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금방 물에서 건져낸 모습처럼 몸이  쳐져 있으며 발은 퉁퉁 불어 있다.  주위로 베드로와 바울  예수님의 제자들이 슬퍼하고 있다. 특히 화면 바로 앞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오열하고 있다. 그녀의 앞에는 죽은 마리아를 관에 넣기 전에 시체를 씻기 위한 세숫대야와 물수건이 보인다.


작품 위로 보이는 붉은 커튼이 극명한 창에서 들어오는 빛과 함께 전체 분위기를 더욱 극적으로 보이게 한다. 오른쪽 커튼 밑에 보이는 사람은 이 작품을 카라바조에게 주문한 사람으로 검은 상복을 입고 고심에 빠져 있는 모습으로 특별히 그려 넣었다.




이 작품이 공개되자 사람들은 놀랐다. 경건하면서 이상적인 마리아의 승천만을 보아 온 그들에게 성모 마리아의 죽음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들에게 처녀 신분으로 예수를 낳은 마리아는 죽은 것이 아니라 승천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마리아는 죽어 있다. 더욱이 어떠한 미화도 보이지 않는 그냥 평범한 인간의 죽음으로 표현하고 있다.


당시 카라바조는 마리아의 인간적인 죽음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물에 빠져 죽은 매춘부의 시체를 보고 그렸다. 사람들은 경악했지만 카라바조는 신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한 마리아의 죽음이 더 큰 슬픔과 더 큰 공감을 가져다준다고 이야기하였다.     


1571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출생한 카라바조는 어려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전염병으로 잃고 고아가 되었다. 생계를 위해 13세부터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여러 화실을 거쳐 가며 근근이 생활하였다.


25살 되던 해 그는 삶의 전환점이 되는 델 몬테 추기경을 만나 본격적인 종교화가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종교화가로서 그는 신성하고 경건한 성인들의 모습 대신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고귀하고 신성한 신의 모습을 구현하였다. 당시 그의 작품은 당시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며 그를 이탈리아 내 가장 유명한 종교화가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과거 어린 시절의 불행으로 생긴 난폭한 성격을 버리지 못하고 폭력 등 많은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켰지만 그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교회의 고위 성직자와 부유한 상류층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하지만 그의 미친 행보는 그치지 않고 1606년 사소한 말다툼 끝에 마침내 살인을 하고 나폴리로 도주한다.


4년여에 걸친 도피생활 와중에도 장엄하고 화려하면서 신앙에 기반한 그의 작품은 종교개혁으로 인해 실추된 가톨릭의 전통과 권위를 보여주려는 고위 사제들에게 지속적인 사랑을 받았다.




당시 그는 그의 살인죄를 사면받기 위해 <다윗과 골리앗>을 그렸다. 골리앗을 무찌르고 그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의 얼굴에는 젊은 시절의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으며 목이 잘린 골리앗의 얼굴에는 지금의 늙고 병들은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젊은 시절의 자신이 죄 많은 늙은 자신을  베어내며 참회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40세가 되던 1610년, 그의 피나는 노력 끝에 마침내 교황의 사면을 받았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로마로 돌아오는 길에 배안에서 열병을 앓는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영욕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그의 삶을 마감하였다. 이후 세속적인 것을 성스러운 것으로 승화시킨 그의 작품은 극단적인 명암법과 더불어 당시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미술에 생기를 불러일으키며 후대 미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제 루브르 박물관의 나머지 바로크 작품들을 감상하기 위해서 리슐리외 관 3층으로 이동하여 루벤스의 작품부터 감상하자.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거장인 루벤스는 지금의 북부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해당하는 플랑드르 지방의 출신이다. 그는 바로크 회화에 걸맞은 역동적이고 힘찬 그림의 분위기와 타오르는 듯한 색채를 사용하였다. 그의 웅장한 그림은 종교계를 비롯한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는 당시 프랑스의 황녀인 마리의 요청을 받아 그리스 신화와 연결해 그녀의 생애를 화려하고 우화적으로 완성하였다.


마리 드 메디치는 피렌체의 명가인 메디치가의 토스카나 대공의 딸로, 1600년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와 결혼해 이듬해 루이 13세를 낳았다. 신교와 구교를 모두 인정한 앙리 4세가 구교도에게 암살당하자 어린 루이 13세를 대신해 프랑스를 다스렸다.  


그녀는 앙리 4세의 신하들을 멀리하고 이탈리아 출신의 관료들을 중용하며 앙리 4세의 체제를 모두 부정하였다. 그녀는 구교를 강력히 지원하였으며 프랑스와 적대적 관계였던 합스부르크가와 혼인 정책을 취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루이 13세가 성장하자 그를 제거하고 왕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였으나 루이 13세의 반격에 맥없이 무너지고 블루아 성으로 유폐된다. 1619년에 블루아 성에서 탈출한 마리는 루이 13세의 남동생인 오를레앙 공 가스통과 손잡아 반란군을 이끌었지만 실패로 끝난다. 이후 리슐리외 추기경의 중재 덕분에 마리는 루이 13세와 화해한다.


리슐리외가 루이 13세의 재상이 되어 정치적 실권을 잡게 되자, 마리는 그의 실각을 도모하였다. 이 때문에 1631년 마리는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브뤼셀로 망명하였으며 1642년에 쾰른에서 사망하였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작품들은 루이 13세와 화해한 마리가 파리로 돌아와 그녀의 거처였던 뤽상부르그 궁전을 장식하기 위해 당시 유럽 최고의 화가였던 루벤스에게 의뢰하여 완성한 작품이다.


그녀의 화려하면서 다사다난했던 삶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마리가 탄생부터 그녀가 교육을 받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녀가 앙리 4세와 결혼을 하여 루이 13세를 가지는 모습과 앙리 4세가 죽자 섭정을 하는 모습 등을 순서대로 보여주고 있다.


마리의 일생을 보여주는 연작시리즈의 세 번째 그림은 <마리의 초상을 받는 앙리 4세>이다.




작품에서 앙리 4세가 큐피드와 사랑의 신 히멘이 들고 있는 마리의 초상화를 처음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져 있다. 프랑스를 상징하는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은 앙리 4세에게 그녀가 프랑스에 가장 적합한 여인이라고 설득하고 있다. 하늘에서는 올림포스 최고의 신 제우스와 헤라가 이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다.


그들 아래 그들을 상징하는 독수리와 공작새가 보인다. 그들의 결혼은 신들이 정해 놓은 운명이다. 갑옷을 입은 채 전쟁에 열중하던 앙리 4세는 초상화를 보는 순간 투구와 방패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다음은 마리의 연자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마르세유의 상륙>이다. 마리가 결혼 후 파리로 오기 전 마르세유에 잠시 머무른 것을 루벤스가 그 특유의 역동적이면서 장엄한 화풍으로 그린 작품이다.


마리가 갑판에서 내려오는 순간 하늘에서는 소문의 여신이 쌍 나팔을 불며 마리의 도착을 알리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그동안 마리의 여정을 함께 지켜온 바다의 인어들인 트리톤과 함께 수면 위로 솟구쳐 마리의 도착을 환영한다. 마리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며 환영하는 푸른 갑옷과 투구를 쓴 남자는 프랑스를 상징한다. 하지만 마리는 가슴을 펴고 그의 환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열 번째 작품은 1610년 5월 14일 생드니 수도원에서 거행된 마리의 섭정 선포식이다. 그림 왼쪽에는 하늘로 올라가는 앙리 4세가 보이고 오른쪽에 마리가 섭정을 사람들에 둘러싸여 권력을 의미하는 지구의를 받고 있다. 아래에 충성을 상징하는 개의 모습도 보인다.


작품들 대부분은 루벤스 특유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장대한 오페라 무대를 연상시키는 웅장한 구도와 현란하고 화려한 색채로 그려져 있어 권력의 힘을 느끼게 한다.


루벤스는 화가라기보다는 사업가였다. 그는 자신의 집에 있는 대 연회실 지하에 큰 작업실을 두고, 캔버스에 직접 구도를 잡은 뒤 색깔을 지정해 많은 제자들에게 그대로 칠하게 하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불러 연회실에서 큰 파티를 열었다. 파티가 끝날 무렵 손님들을 데리고 지하 작업실로 내려가 캔버스에 마지막 색을 입힌 뒤 자신의 작품이라며 판매했다. 물론 제자들이 작업실을 나간 이후였다. 그런 그에게 국내외에서 엄청난 양의 주문이 쏟아졌고 그는 이것을 모두 다 소화했다. 루벤스는 타고난 솜씨에 호감 가는 외모, 뛰어난 사교술로 평생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산 화가였으며 그 덕에 많은 대작을 남길 수 있었다.


이제 바로 옆에 방인 20번 방으로 이동하여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바로크 화가인 베르메르의 <레이스를 짜는 여인>을 감상하자.


네덜란드는 신교가 지배적인 독립적인 국가였다. 따라서 대성당의 대주교나 왕실과 귀족 같은 후원자들이 없었다. 그래서 미술을 주문하는 사람들은 부유한 중산층이었으며 주제 역시 중산층이 좋아하는 일상적인 정물화와 풍경화가 유행했다. 하지만 그림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강렬한 명암의 대비와 풍부한 감정표현을 보여주는 바로크 전통방식을 고수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처럼 거창한 주제를 보여주는 바로크 양식의 작품과는 달리 이 작품은 전형적인 네덜란드 집안에서 레이스를 짜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인의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묶은 두 갈래 머리에서 한쪽은 둥그렇게 말려 있다. 그리고 오른쪽 위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비스듬히 비춘다. 여인은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의 델프트 마을 처녀이다. 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는 지그시 눈을 내리고 입술을 꼭 다물고 있어 레이스를 짜는 일이 얼마나 정신 집중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따뜻한 질감이 느껴지는  작품은 색채나 형태를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는 당시에 발견된 유화덕분이었다. 단순하고 가식 없는 일상의  단편을 보여주는  그림을 보고 르누아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이제 31 전시실로 이동하여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바로크 화가인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감상하자.


렘브란트는 솔직하면서 자기 내면을 보여주는 자화상 60여 점을 남겼다. <63세 자화상>은 궁핍하고 비참했던 말년 즈음인 1660년에 그린 것으로, 소박한 위엄과 번민에 가득 찬 한 인간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에 반해<27세 자화상〉에서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은 젊은 시절의 당당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강렬한 명암 대비 효과에 무겁고 짙은 농도의 색채가 덧입혀지면서 복잡한 표정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알 수 없는 내면을 진실하게 담았다.




렘브란트는 루벤스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화가이지만 이 둘의 삶은 정반대이다.


렘브란트 역시 젊었을 때는 최고의 초상화가로  엄청난 재산을 가진 아내 사스키아와 결혼해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 세계를 고집하자 이를 이해하지 못한 당시 최고의 고객인 신흥 중산층들에게 버림받았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기념촬영 형태의 단체 초상화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특유의 명암 효과와 대담한 극적 구성을 시도해 예술적인 초상화를 완성했다. 그러나 당시 주문을 의뢰한 사람들은 누구는 앞에서 선명하고 누구는 뒤로 빠져 희미하다는 이유로 주문을 취소했으며, 이후 주문이 현저히 줄기 시작했다. 게다가 돈을 아낄 줄 모르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계속한 렘브란트는 결국 파산하고 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가 죽었다.


그러나 그의 옆에는 그를 끝까지 지켜주는 핸드리케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집안 살림을 돕는 도우미로 렘브란트 집에 들어왔지만, 이후 렘브란트의 연인이 됐다.


그러나  사람은 결혼하지 못했다. 사스키아가 막대한 유산을 남기면서 다른 여인과 결혼하면  재산을 아들에게 상속한다는 유언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핸드리케마저 렘브란트보다 일찍 죽고 곧이어 하나뿐인 아들 티투스마저 죽자 그로부터 4개월  그는 쓸쓸하게 혼자 임종을 맞이했다.


렘브란트의 초상화를 보면 그의 노곤한 말년이 그대로 느껴진다. 다른 화가들이 그린 초상화를 보면 모두 근엄한 표정에 다소 과장된 느낌이지만, 렘브란트는 소박한 위엄과 번민에 가득 찬 인간의 모습을 솔직하고 감동적으로 그렸다. 유화물감을 겹겹이 찍어 바른 두꺼운 질감이 그의 삶의 무게만큼 무거워 보인다.


지금까지 루브르 박물관의 바로크 시대의 회화작품들은 둘러보았다. 감성적이며 극단적인 명암을 사용하는  바로크 시대의 작품들은 물질이 넘쳐나며 자신을 잃어버린 시대를 사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어쩌면 바로크는 어둠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빛의 예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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