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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Aug 04. 2020

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빈치

루브르 박물관에 이탈리아 전시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벽에 보티첼리의 <소녀에게 선물을 주는 비너스와 삼미신> 이 전시되어 있다. 프레스코화인 이 작품에서 비너스는 소녀에게 손수건을 선물하고 있다. 오른쪽의 소녀는 지상의 존재를 상징하고 비너스 주위의 삼미신은 제우스와 바다의 요정 사이에 태어난 신으로 기쁨가 삶의 윤택 그리고 쾌락과 우아함을 상징한다.


중세가 끝날 무렵 피렌체에서 활동한 보티첼리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신을 그리지 않았으며 인간의 눈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다. 작품 전체에서 보티첼리 특유의 선적인 아름다움과 부드러운 색채로 비너스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서양 미술사에서 중세는 암흑의 시대였다. 5세기 말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서유럽은 봉건영주시대로 돌입하여 잦은 전쟁과 폭동 그리고 수많은 질병과 고문 등으로 숱한 죽음의 행렬이 이어졌다. 당시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인간을 나약하게 만들었으며  봉건제도의 굴레는 고통받는 현실을 타파하는 것이 아니라 사후세계의 구원을 갈구하며 절대자 신에게 의지하도록 만들었다.


15세기 전후 십자군 원정의 실패와 종교 개혁으로 왕과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고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페스트가 성행하자 사람들은 더 이상 신에게 의지하지 않으며  신중심의 세계에서 인간 종교 중심의 세계로 나아갔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시작된 이 움직임은 중세 이전의 고대 그리스를 본보기로 삼으며 인간 중심의 고대 그리스의 건축과 예술을 다시 재생시키는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루브르 박물관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시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안드레아 만테냐의 <성 세비티아누스의  순교>이다.


 


세바스티아누스 성인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근위대장으로 기독교의 박해로 자신의 친구가 처형당할 위기에 빠지자 성인은 스스로 황제에게 나아가 자신도 기독교임을 고백하며 친구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것을 간청한다. 하지만 분노한 황제는 그를 사수대에 묶어 화살을 맞는 처한다. 화살을 맞은 성인은 다행히 모두 급소를 피해 가는 바람에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이후 황제에게 기독교 박해의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살해당했다.


이 주제는 인체해부학에 정통한 당시 화가들에게 남성 누드를 그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 작품에서 성인이 묶여 있는 코린트 양식의 기둥을 실제보다 더 세밀하게 묘사하고 성인을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에 가깝게 표현하고 있는 점을 미루어 보아 화가가 순교의 성스러움보다는 고대 로마의 건축과 해부학 그리고 원근법을 표현하는데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르네상스 최고의 화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들을 감상하자.  먼저 이탈리아 전시실 5번 방으로 이동하여 <성 요한>을 감상하자.


성경 속 성 요한은 예수에게 세례를 준 인물로 예수가 승천하자 광야를 돌아다니며 선교와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그래서 보통 낙타의 가죽 옷에 십자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다빈치의 작품에서 성 요한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고난에 찬 성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얼굴을 하고 미묘하면서 에로틱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르치며 자신과 인간이 구원받았는지에 대한 대답은 오직 신만이 아신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더욱이 최근에 발견된 다빈치의 <성 요한>의 초기 데생 작품을 들여다보면 성 요한은 자신의 왼손으로 여자의 가슴처럼 부풀어 오른 자신의 젖가슴을 만지고 있으며 그의 다리 사이에는 남자의 성기가 보인다. 다빈치 특유의 여성성과 남성성이 공존하는 작품이다. 다빈치는 성 요한의 얼굴을 자신과 평생 동성애 연인이자 제자였던 살라이의 얼굴로 그렸다고 한다.


다빈치는 사생아로 태어나 평생을 동성애자로 살았다. 그래서 그는 평생 동안 세상과 자신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다. 성 요한은 다빈치의 이러한 살아온 삶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다빈치는 동성애자만이 그릴 수 있는 남성과 여성이 혼합된 요한의 얼굴을 그리면서 천사와 악마의 모습을 함께 담았다. 그는 세상과 자신 속에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늘 번민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치열한 고민은 그를 세기를 뛰어넘는 천재로 만들었다.  


다음으로 다빈치의 <성 안나와 성모자>를 감상하자.



 

이 작품은 루이 12세가 그의 딸이 임신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다빈치가 그린 것으로 <모나리자>와 함께 그가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었던 작품이다.

  

작품에서 성모 마리아가 그녀의 어머니인 안나의 무릎에 앉아 새끼양과 놀고 있는 아기 예수를 끌어안고 있다. 아기 예수가 어린양을 안으려는 것은 다가오는 고난과 수난을 암시하며 그런 성모를 바라보는 성모의 눈에는 애처로움과 슬픔이 담겨 있다. 마리아 위로 그녀의 어머니인 안나가 자애로운 미소로 모자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 미소는 모나리자의 미소와 같이 신비로움이 담겨 있다.


인물들 뒤로 보이는 배경은 대기 원근법과 신비로운 색상을 사용하여 원시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시간을 벗어난 인물들의 신성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세 인물이 자아내는 피라미드 구도는 성모와 그의 어머니가 뒤엉켜 있는 구성에도 불구하고 안정감을 주고 있다.


작품 전체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타일로 가득 차 있는 이 작품은 주위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왜 대작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림 전체에 흐르는 신비스러운 색깔 톤은 다른 작가들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태고적 자연의 모습과 인물들의 알 수 없는 동작은 관람자로 하여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그림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계속해서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를 감상하자.


우리가 지금 눈 앞에서 보고 있는 이 작품은 밀라노의 한 수녀회가 주문한 작품이다. 작품에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이집트에 피신 중 어린 세례 요한을 만나는 모습이 보인다.





바위 동굴의 중앙에 성모 마리아가 앉아 있고 그 아래에 요한과 예수가 앉아 있다. 안정적인 피라미드형 구도를 가지고 있는 이 작품에서 십자가를 가지고 있는 요한은 아기 예수를 향해 경배하고 있다. 그리고 아기 예수는 손가락 세 개로 삼위일체를 표현하면서 요한을 축복하고 있다. 요한 옆으로 그림 밖을 쳐다보고 있는 대 천사 가브리엘의 모습도 보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답게 이 작품이 종교화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정도로 작품 전체에 신비스러움이 넘친다.


신비스러움의 정체는 명암이다. 다빈치는 작품에서 마리아의 상징인 빨간색과 파란색의 옷의 이미지까지 포기해가며 동굴 안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직 네 명의 얼굴에만 밝은 조명을 두었다. 이는 하나님의 빛이다. 이 빛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너희들이 곤란을 당하여
높은 산 동굴에서 피신을 하고 있지만
너희의 아버지인 하나님은 늘 너희와 함께하신다.



다빈치는 인물의 명암과 더불어 윤곽선을 흐리게 하면서 선이 아닌 오직 빛과 명암으로 대상의 형태를 잡아 내고 있다. 다빈치가 발명한 이 기법은 스푸마토 기법이라 한다. 그는 <모나리자>에도 이 기법을 사용하여 불멸의 미소를 창조했다.


이 작품이 완성되어 수녀원에 배달됐을 때 수녀들은 깜짝 놀랐다. 성모가 아기 예수보다 세례 요한과 더 가까운 모습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의 모습이 성스럽지 않고 어린 아기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가브리엘의 커다란 오른손 동작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수녀원의 요구에 따라 다빈치는 그림을 다시 그려야 했다.


그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 그리고 아기 예수의 배치는 그대로 둔 채 가브리엘의 오른손 제스처만을 삭제했다. 또한 첫 번째 작품에는 없었던 세례 요한 앞에 십자가 지팡이를 그려 넣었으며 가브리엘을 제외한 세 명의 성자 머리에도 후광을 그려 넣었다. 현재 우리가 보는 작품은 수정 전 작품이며 수정 후 작품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전시하고 있다.


이제 루브르 박물관에서 최고의 보물로 모시는 <모나리자>를 감상할 시간이다. 모나리자 전시실에 들어서면 많은 사람들로 모나리자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줄을 서서 모나리자 앞으로 전진하면 20명 정도의 인원만 모나리자 앞에 설 수 있다. 이때 주어진 시간은 1분밖에 안되다. 1분이 지나면 무조건 모나리자를 볼 수 있는 자리를 떠나야 한다. 그래서 미리 모나리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듣고 짧은 시간에 모나리자의 어떤 부분을 볼 것인가를 결정하고 모나리자를 감상하는 것이 좋다.




모나리자의 혁신은 회화사상 처음으로 평범한 인간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점이다. 그 이전의 초상화는 주로 성모와 성자 그리고 왕과 귀족의 모습을 그렸다. 그런데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형성된 피렌체에는 이제 부유한 상인이 미술의 구매자가 되었다.


모나리자의 <모나>는 귀부인에게 붙이는 존칭이며 <리자>는 그녀의 원래 이름의 리자 게라르디니에의 줄임 말이다. 몰락한 귀족 집안의 가난한 딸로 태어난 리자는 20년 연상의 조콘다라는 피렌체 상인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부부 사이에 많은 자식들이 있었으며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1503년 여름 조콘다는 리자를 아내로 맞이하면서부터 행복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여 당시 최고의 화가인 다빈치에게 부인의 초상화를 그려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리면서 발견한 것은 행복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다빈치는 기존의 관습처럼 있는 모습을 그대로 그리는 사실적인 초상화에서 벗어나 그녀의 잔잔한 미소 속에서 피어나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래서 다빈치는 윤곽선을 손이나 붓으로 없애고 오직 색과 명암으로만 형태를 만들어냈다. 흐릿한 색과 명암으로 만들어진 모나리자의 입술은 오른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은은한 미소 속에 그녀의 행복감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다빈치는 여인의 행복한 감정을 방해하는 불필요한 장신구는 모두 제거하였다.


모나리자는 구도와 원근법에서 동시대의 초상화를 뛰어넘는다. 당시의 대부분의 초상화는 앞모습보다는 옆모습을 그렸다. 옆모습이 그리기가 쉬웠으며 인물의 특징을 훨씬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후 회화 기술이 발전하면서 앞모습을 그리는 초상화가 나왔으나 초상화 속의 인물은 대부분 증명사진처럼 굳어 있었다.


하지만 다빈치는 모나리자의 몸을 비스듬히 틀어서 정면을 바라보게 하여 생동감을 주고 있다. 이러한 모나리자의 자세를 콘트라 포스트라고 부르는데 이후 라파엘로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은 다빈치 스타일로 인물을 그렸다.


모나리자의 또 다른 혁신적인 기법은 배경에 있다.

모나리자 뒤의 배경에는 고대 피렌체의 산맥과 골짜기의 모습이 보인다. 멀리 있는 것은 희미하게 그리는 대기 원근법을 사용하여 신비스럽게 묘사된 자연의 배경은 작품 속 인물인 모나리자와 함께 한 몸처럼 조화를 이루며 모나리자의 존재를 귀하게 하고 있다.


모나리자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도난 사건 때문이었다. 1911년 8월 22일 루브르 휴관일이었다. 루브르 박물관 방호업무를 하고 있던 빈센초 페루자라는 이탈리아의 청년이 모나리자를 훔쳐갔다.  2년간 모나리자의 행방을 찾을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모나리자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갔다. 예술에 관심이 많지 않던 사람들까지 루브르를 방문하여 사라진 모나리자의 엽서를 사 갔다.


이후 피렌체 집에 보관해 놓았다가 모나리자를 시장에 팔려던 페루자는 신고에 의해 잡혔으며 모나리자는 루브르로 돌아왔다. 모나리자가 돌아오자 루브르에는 엄청난 관객이 몰렸다. 이후 유명세를 탄 모나리자는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 등 세계적인 순회 전시를 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당시 미국과 일본에서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관객들이 너무 많아 1 사람당 모나리자를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은 채 1분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모나리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자 그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가장 비싼 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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