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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Aug 04. 2020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

루브르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인 <모나리자>가 전시되어 있는 방 뒤로 가면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을 비롯하여 프랑스가 자랑하는 대작들이 전시되어 있는 프랑스 대작 전시실이 나온다.


루브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작품 전시관 옆에 프랑스 대작 전시실을 배치하며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극복하기 위한 프랑스 예술의 도전과 성공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15세기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이탈리아 르네상스 작품을 접한 루이 12세는 이 작품들을 동경하며 되는대로 사들였다.  당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무역과 금융을 통해 엄청난 부를 형성했으며 이를 문화에 투자해 르네상스라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문화적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왕들은 이탈리아 원정 때마다 이를 부러워하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작품을 보이는 대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 프랑수아 2세 때는 아예 르네상스의 최고 화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프랑스로 데려왔다.

 

1663년 루이 14세는 국가차원에서 장학생들을 뽑아 이탈리아로 유학을 보내며 끈질기게 르네상스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이후 18세기가 되자 프랑스는 프랑스혁명과 더불어 마침내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극복하는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회화를 만들어냈다. 그 후 파리는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모나리자 전시실을 통과하면 75번 방이 나온다. 이 곳에 프랑스를 대표하는 신고전주의 작가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감상하자.  




1783년 영국의 명예혁명에 이어 미국의 독립전쟁이 성공하자 프랑스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면서 왕의 권위가 무너지고 백성들의 충성심이 사라졌다. 이에 놀란 루이 16세는 로마 장학생으로 공부하고 돌아온 다비드에게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는 로마사의 한 장면을 그려 달라고 주문한다 다비드는 고심 끝에 <로마사>와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나오는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선택해 작품을 완성한다.


화가 다비드는 오랜 고민 끝에 복잡한 이야기와 비극적인 종말보다는 전쟁에 출전하기 전 결의에 찬 영웅적인 로마 남성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충성심을 요구하는 루이 16세의 의도에 걸맞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작품에서 칼을 건네주고 있는 남자는 호라티우스 가문의 어른인 아버지이다. 그 칼을 향해 삼 형제는 무쇠처럼 강인한 팔을 뻗고 있다. 결의에 찬 눈과 꽉 다문 입술, 근육질의 팔과 다리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다.  다비드는 그림 속에 나오는 늙은 아버지의 발을 무려 25번이나 고쳐 그리면서 그림 속 영웅들처럼 집념과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종교권력과 절대왕정의 권위와 영광을 보여주는 바로크 시대의 과장과 허영에 지친 프랑스 사람들은 이전의 이상적이고 검소한 그리스 로마양식의 작품들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그를 반영한 양식이 신고전주의 양식이다. 더욱이 인간의 이상적 아름다움을 꿈꾼 신고전주의는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외치며 신분제 사회를 타파하려는 프랑스혁명과 절묘하게 맞았다.


<호라티우스의 맹세>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특징인 아들과 아버지 그리고 여인들로 구분된 엄격한 구도와 분명한 윤곽선으로 인물들을 분명하고 이상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장식이 없는 단순한 배경으로 당시 유행하던 허영과 가식으로 가득 찬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을 벗어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또한 고전주의 양식의 한 부분인 분명한 주제의식으로 애국과 희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의 칼에 의해 처형된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절대왕정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공화정의 시대로 접어든다. 하지만 외부적으로 왕정을 유지하고 있던 유럽의 국가들이 프랑스를 침략하고 내부적으로 혁명정부의 과격파와 온건파가 끊임없이 싸우는 대 혼란의 시대를 맞이한다.


이때 등장한 나폴레옹은 다비드에게 혼란의 프랑스를 수습하고 화해와 질서를 가져오기 위한 작품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작품인 <사비니 여인>의 중재이다.  




기원전 7세기 로마 건국의 초대 왕이었던 로물루스는 왕국을 만드는데 필요한 인구를 늘이려는 계획으로 이웃 사비니 남자들을 축제에 초대한다. 축제가 절정에 이르자 로물루스는 사비니 여인들을 납치하고 사비니 남자들을 쫓아낸다. 3년 후 사비니 남자들은 힘을 길러 자신들의 여동생과 딸을 찾기 위해 로마에 쳐들어오나 그들을 막고 선 사람들은 바로 사비니의 여인들이었다.


이 작품에서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그림의 배경에 있는 성이다. 성은 당시 로마 시대의 성의 모습이 아니라 프랑스혁명 당시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바스티유 감옥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다음 작품은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이다.


유럽의 주위 국가들을 차례로 점령하며 프랑스 공화국의  최고 직위에 오른 나폴레옹은 헌법을 고치고 국민투표를 통해 황제의 직위에 오른다. 그의 권력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으며 누구도 막아설 수 없었다. 1804년 12월 2일이 되자 노트르담 성당에서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이 열렸다.  


작품에서 교황 비오 7세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나폴레옹이 아내 조세핀에게 왕관을 수여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나폴레옹은 자신의 왕관을 스스로 자신의 머리에 얹었다.


다비드는 이러한 나폴레옹의 오만이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될 것을 염려해 조세핀에게 수여하는 것으로 처리했다. 작품 속에서 나폴레옹 뒤쪽에 앉아 있는 교황 비오 7세는 지팡이를 짚고 앉아 삼위일체의 세 손가락으로 축복을 내리고 있다. 교황 주위에는 이탈리아에서 초대받은 성직자들이 보인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오른쪽으로는 파리 성직자들과 관료들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정면 위에 보이는 별실 같은 곳에 세 여인이 나란히 앉아 있다. 중앙의 여인이 나폴레옹의 어머니이다. 나폴레옹의 어머니는 40이 된 미망인 조세핀을 인정하지 않아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주문에 의해 그려 넣었다. 나폴레옹 어머니 위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이 다비드가 보인다.


작품 왼쪽을 살펴보면 나폴레옹의 형제들과 누이들이 보인다. 그림 맨 왼쪽에 보이는 두 명의 남자는 나폴레옹에 의해 나폴리의 왕이 되는 형 조제프와 네덜란드의 왕이 되는 동생 루 이이다. 그 옆으로 세 명의 여인들은 왼쪽부터 나폴레옹의 누이인 캐롤린과 풀린 그리고 엘리자이다. 나머지 인물은 나폴레옹의 동생과 형의 아내들이다. 형 조제프의 아내 줄리가 조세핀의 아들 샤를의 손을 잡고 있다.


이 작품은 대관식에 참석한 모든 인물이 거짓 없이 재현되어 있는 집단 초상화인 동시에 역사화이다. 철저한 계획과 정밀한 인물 표현, 호화로운 질감은 장엄한 실내 분위기와 일체감을 이루며 거대한 작품이 탄생하는데 기여했다. 작품이 완성되자 나폴레옹은 이 작품을 보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며 다비드에게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하사했다.



이것은  이상 그림이 아니다.
 안으로 들어가 거닐자.


이제 75번 방으로 이동하여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의 작품을 감상하자.


종교개혁과 시민혁명은 예술가들로부터 스스로 살길을 개척해야 하는 시대를 만들었다. 이제 예술가들에게 자신들을 후원해주는 종교권력이나 왕과 귀족은 사라졌다. 이로 인해 예술가들의 삶이 더없이 고달파졌지만 예술적 자유는 훨씬 높아졌다. 기존의 왕과 특권층 중심의 신고전주의 화풍에서 벗어난 낭만주의 화가들은 작품의 주제와 형식을 자신의 마음대로 선택했다. 프랑스 낭만주의 대표작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이다.


나폴레옹의 혁명이 휩쓸고 간 1814년, 프랑스에 부르봉 왕조의 왕정이 복귀했다. 왕좌에 앉은 루이 18세는 혁명파의 사람들을 공직에서 밀어내고 왕정을 지지했던 사람들로 채웠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충성했던 유 듀로와 드 쇼마 레이를 메두사라는 배의 선장으로 임명하였다.


메두사는 1816년 여름 프랑스가 영국으로부터 세네갈의 식민지를 인수인계받게 되자 프랑스 식민지 총독을 포함한 400여 명의 승객들을 싣고 대서양을 거쳐 세네갈로 향하였다. 항해 도중 항해 경험이 없는 선장이 선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운행한 결과 배가 암초에 부딪혀 침몰한다.


400명의 승선 인원 가운데 250명 만이 구명보트를 타고 나머지 150명은 폭 7미터 길이 20미터의 돛으로 만든 뗏목을 만들어 탔다. 처음에는 선장이 탄 구명정에 로프를 연결해 뗏목을 육지로 인도할 계획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힘들어지자 선장은 로프를 끊은 채 도주해버렸다.

 

굶주림과 절망에 사로잡힌 150명을 태운 뗏목은 15일 동안이나 표류하다가 15명만이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또한 구조된 15명 중 5명은 구조 즉시 사망하였으며 나머지 생존자 10명도 표류 과정과 광기 어린 기억에 모두 미쳐버렸다. 구조된 사람 중 정신과 의사가 있었는데 작품 속 왼손을 들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사람이다. 프랑스를 충격에 빠트린 그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구명보트로 줄이 끊어진 뗏목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뜨거운 바다 한가운데 남겨진 150명은 이동할 방법도 없이 차례차례 죽어 가기 시작했다.
뗏목 위에 조금 있던 물과 비스킷은 금방 바닥이 났고, 탈진한 사람들은 뗏목 위에서 숨을 거두기도 했고, 고통스러워 물에 뛰어들어 죽기도 했다. 그렇게 뗏목에 탔던 150명은 4일 만에 67명으로 줄어들었고, 그다음부터 배 위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게 되자 부상당한 사람이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뗏목 밖으로 밀어 내버리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 이야기를 들은 제리코는 이 사건을 작품으로 만들었다. 작품에서 왼쪽의 거대한 파도는 오른쪽의 평온한 수평선과 대비되며 고난과 희망을 상징하고 있다. 작품 위쪽으로는 돛과 함께 수평선 너머로 보이는 아르고스 호를 가리키며 희망을 외치는 사람들이 보인다. 또한 작품 가운데 사람은 두 손을 들어 하느님에게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다.




왼쪽 아래에는 몸이 나무 사이에 끼여 떠내려가지도 못하고 죽은 사람과 아들의 시체를 안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망연자실한 그는 삶의 희망을 버리고 미쳐 가고 있다. 뗏목 오른쪽 끝에 보이는 피 묻은 도끼는 굶주림 속에서 동료를 살해해서 먹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제리코는 죽음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려는 인간의 모습을 광기 어린 인간의 모습과 함께 갈색의 색감으로 격하게 표현하였다.


이어서 제리코와 더불어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들라쿠르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감상하자.


나폴레옹의 실각 후 프랑스 왕이 된 이는 샤를 10세로 루이 16 세의 동생인 샤를 10세였다. 그는 루이 16 세처럼 다시 전제정치를 펼치며 의회를 해산하고 언론을 탄압하며 선거제도를 없앴다. 이에 분노한 프랑스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켜 3 일 만에 샤를 10 세를 몰아내고 루이 필립을 새로운 왕으로 하는 입헌군주제를 실현한다. 이를 프랑스 혁명사에서 이를 7월 혁명이라 하며 이 작품은 7월 혁명을 그린 작품이다.




작품에서 중앙의 여자는 당시 금지되었던 자유 평등 박애를 나타내는 삼색기를 흔들며 나아가고 있다. 그녀의 드러난 가슴과 맨발은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 여신임을 나타낸다.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여신은 옷을 입지 않고 맨발로 표현되었다. 여신은 프리기아 모자를 쓰고 승리의 여신인 나이키의 드레스를 걸치고 있다. 프리기아는 고대 로마 시대에 노예들이 자유의 몸이 되면 쓰는 모자로 자유를 상징한다. 들라크루아는 여신을 인간의 피부색을 한 시민으로 그려 넣어 생동감을 주고 있다. 후에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려고 이 여인 형상을 모델로 〈자유의 여신〉 상을 만들어 보냈다고 한다.


자유의 여신 옆으로 보이는 중절모의 남자는 들라크루아 자신의 모습으로 혁명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보여주는 동시에 여러 계층의 시민들이 함께 싸웠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총을 든 소년은 레미제라블에서 구두닦이 소년으로 등장한 <가부로 슈>의 모델이 되었다. 빅토르 위고는 이 소년을 보고 감명받아 그의 작품에 등장시켰다.


작품 아래에 발가벗겨진 채로 죽어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당시 혁명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양한 시민들이 벌인 전쟁으로 약탈과 혼란이 가득하였다. 시민군들은 정부군의 무기와 옷을 약탈하며 혁명을 완수하였는데 들라크루아 옆의 남자는 왕실 수비대에서 뺏은 칼을 들고 있다. 또한 그의 아래에 보이는 남자는 왕실 수비대의 모자를 쓰고 있다. 또한 소년이 매고 있는 가방은 샤를 10세의 문양이 있는 왕실 수비대의 가방으로 총알을 넣어두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시민들의 처절한 자유와 생존의 투쟁 뒤로 연기에 휩싸인 노트르담 성당은 구원을 상징하고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 쥘페리 프라아스 교육부 장관은 프랑스 공화국 정신과 시민윤리를 국민들에게 교육시키고자 이 작품을 교과서로 사용함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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