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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Aug 05. 2020

오르세 미술관

시민이 주인이 된 세상

19세기가 되자 프랑스는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의 결과로 근대 시민사회가 되었다. 이제는 왕과 귀족이 아니라 시민이 국가의 주인이 되었다. 시민들은 이제 그들에게 맞는 새로운 문화 예술을 창조해야 했다. 이전의 종교권력과 왕 그리고 귀족 중심의 화려한 문화들은 자신들에게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민이 주인 되는 세상
시민을 위한 예술



그러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일을 쉽지 않았다. 이전 역사에서 그들에게 맞는 문화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의 정신인 자유와 평등 그리고 합리성과 효율성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문화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건축가는 과거의 화려한 바로크식 외부 장식들을 모두 제거하고 매우 실용적이고 간결한 시민들의 집을 지었다. 또한 그들은 경제성과 효율이 좋은 철과 유리 그리고 대량 생산된 벽돌을 재료로 사용했다.


건축가들과 마찬가지로 당시 미술가들은 더 이상 왕이나 귀족들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낭만주의 화가들은 그들의 감성을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하고 자유로운 주제를 찾아 그림을 그렸으며 사실주의 화가들은 시민의 일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또한 인상주의 화가들은 더 이상 명암법과 원근법 같은 입체적인 기술을 부리지 않고 평면적이면서 심플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회화라는 것은 원래 평면인데 르네상스 이후 왕과 귀족들을 위해 화가들이 원근법과 명암법을 이용하여 화려하면서 입체적인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시민이 주인이 되는 회화는
단순한 평면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발명된 기차와 물감 그리고 카메라의 발명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그들은 이제 화실이 아니라 기차를 타고 야외로 나가 휴대가 가능한 물감을 가지고 그들의 눈에 비치는 풍경의 빛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제 오르세 미술관에서 프랑스혁명 이후 세상의 주인이 된 시민을 위한 미술을 감상하자. 1층 4 전시실로 이동하여 밀레의 <만종>을 감상하자.


프랑스혁명 전에 절대왕정에 충성하던 신고전주의 작품에 반기를 들고 나온 작품이 사실주의 작품이다. 그들은 더 이상 신화 속에 나오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그리지 않았다. 종교개혁과 시민혁명으로 그들의 작품을 구입하던 종교권력과 왕과 귀족이 사라졌지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 사회의 중심 세력이자 자신의 작품을 구입할 수 있는 부르주아 계층을 위해 도시와 농촌의 풍경과 자연을 그렸다.


이는 회화사상 처음으로 자연과 평범한 농부가 작품의 배경이 아닌 작품의 주제가 되는 혁신적인 사건으로 이를 대표하는 작품이 밀레의 <만종>이다.




들판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던 부부가 들판 끝에 보이는 성당의 저녁 종소리가 울리자 하던 일을 멈추고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있다. 부부는 감자를 수확하는 중으로 발 근처에는 쇠스랑과 바구니 그리고 손수레가 보인다. 늦여름 노을 진 저녁 들녘에 드리워진 빛은 두 사람을 비춘다. 두 사람의 얼굴은 그림자로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매우 경건한고 진실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화면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넓은 대지가 안정적이고 고요한 느낌을 자아낸다.


밀레가 활동할 당시 파리는 산업혁명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도시로 몰려나와 살았다. 그들은 복잡한 도시에서 기계문명의 영향으로 소외된 삶을 살았다. 그들에게 고향이었던 농촌과 자연은 위로이자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밀레는 이를 의식한 듯 고단하고 소박한 농촌의 풍경을 경건하고 표현하고 있다.


다음 7번 방에서 <오를레앙의 매장>을 감상하자.


농촌형 사실주의 대표화가가 화가가 밀레라면 도시형 사실주의 대표화가는 쿠르베이다. 그는 역사 속의 영웅들과 신화 속의 인물을 그리는 당시의 신고전주의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내게 천사를 보여다오.
그러면 천사를 그리겠다.

 


쿠르베는 과거의 영웅들과 고대의 풍경 대신 새로운 시대의 주인인 시민의 일상을 그리며 사실주의의 화파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고향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장례식 장면이다. 장례식의 당사자는 평범한 인물이다. 그런데 평범한 사람의 장례식을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처럼 대작으로 그렸다. 그래서 당시 미술평론가들은 평범한 장례식을 크게 그린 그의 작품을 비난했다. 하지만 당시 이러한 시도 자체가 파격적이며 도발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작품의 왼편을 보면 검은색 옷을 입고 관을 맨 사람들이 교구장과 함께 걸어오고 있다. 그 옆으로 그 모습을 지켜본 무덤 파는 인부가 무릎을 꿇고 고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인부들 뒤로 빨간 예복을 입은 집사장이 보인다. 그들은 낮술을 먹고 참석하여 코와 양쪽 볼이 빨갛는데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 무덤 주위에는 고인의 가족들과 지인들이 보이며 그 앞에 파란 양말에 긴 모자를 쓰고 있는 시장도 보인다.


작품 속 몇몇 인물들은 고인을 애도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인물들은 장례식에 무관심하다. 그들은 모두 자기 생각에 몰두하며 제각기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작품에 특별한 비극이나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쿠르베는 일상적인 장례식을 사실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특별한 사람이나 평범한 사람들이나 모두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인간은 언젠가 죽지만 자신의 차례가 아니면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제 본격적으로 3층으로 올라가 인상파 화가의 작품을 감상할 차례이다. 3층 29 전시실로 이동하여 인상주의의 창시자인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감상하자.

 

1863년의 살롱전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출발점이었다.

당시 유난히 보수적이고 엄격한 심사기준을 적용하여 출품작 5천 점 중에서 3천 점이나 낙선되었다. 이것은 당시 엄청난 동요를 가져왔다. 나폴레옹 3세는 이를 잠재우기 위해 낙선전을 열었다. 낙선전의 최고 관심사는 단연 <풀밭 위의 점심식사>였다.  


작품 안에서 파리 대학생 같은 옷차림의 두 젊은 남자가 앉아 있다. 그 앞에 수치스러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 알몸의 여자가 물끄러미 관람자를 응시하고 있다. 멀리 뒤편으로 목욕을 하고 있는 여인이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그들이 타고 온 배가 보인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파리 시민들은 흥분했다. 그들이 상상만 할 수 있는 장면을 작품에서 실제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음흉한 자신의 맘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까지 화가들이 여성의 누드를 많이 그렸지만 그것은 언제나 신화 속의 이상적인 여인이었다. 그런데 작품에서 현실의 여인이 옷을 벗고 관람객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나폴레옹 3세 시절 파리에는 공식적으로 5,000명, 실제로는 약 12만 명의 매춘부가 있었다. 당시 파리 인구가 170만 명이었음을 감안하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위선적인 파리 시민들은 공적인 장소에서 노골적인 장면을 아무렇지 않게 그린 이 작품에 당황했다.


또한 이 작품은 기술적인 면에서도 사람들의 공분을 쌌다. 작품 속 인물들과 배경은 입체감이 없이 평면적이다. 명암법을 무시하고 표현된 옷 벗은 여인은 마치 색종이를 오려 붙인 것처럼 납작하게 그려져 있다. 전통적인 그림 속의 누드는 세세한 명암의 변화를 꼼꼼하게 표현하였지만 자연광이 강하게 내리쬐는 빛 속에서 여인을 본다면 대부분 마네가 그린 것처럼 빛에 드러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으로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또한 원근법을 무시하고 있다. 작품 뒤쪽의 여인 옆에 놓인 배를 보면 그들이 타고 온 배라고 보기에 너무나 작게 그렸다. 르네상스 이후 화가들이 회화를 2차원의 평면에서 3차원의 입체로 만드는데 노력을 기울였다면 마네는 회화를 다시 2차원의 평면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눈 앞의 사물이나 인물을 이상화하지 않았다. 당대의 비평가들의 비난에 마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가능한 한 내가 보는 사물들을
단순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나는 내 눈이 보는 그대로 그렸다.


31 전시실로 이동하여 모네의 <개양귀비>를 감상하자.



작품에서 붉은 개양귀비가 가득한 들판을 양산을 든 여인이 아이와 함께 거닐고 있다. 하늘에는 구름이 두둥실 떠 있고 들판 위로 나무들과 집들이 보인다. 개양귀비 꽃밭에 묻힌 아이는 꿈결처럼 두둥실 떠 있는 것 같다. 화사하고 밝은 톤을 가진 아름다운 풍경화이다. 하지만 작품 앞으로 바싹 다가가 들여다보면 반전이 이루어진다.


아름다운 풍경화에 풍경은 보이지 않고 평평한 화면에 가득한 물감만 보인다. 인물을 포함한 화면 속 모든 것의 세부적인 묘사는 생략되어 있다. 마치 팔레트의 물감을 붓에 바른 뒤 그대로 캔버스에 찍어 놓은 듯한 느낌이다.


마네가 당시의 시민들의 삶을 2차원적인 평면으로 그리며 인상파 시대를 열었다면 본격적인 인상파 시대는 모네부터 시작한다. 모네는 2차원적인 평면에 빛을 그렸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은 물질에 닿은 빛을 보는 것이라 생각하고 눈에 보이는 빛을 그대로 그리려고 하였다.


1872년 모네는 자신의 친구인 르누아르와 드가 그리고 피사로 등과 함께 전시회를 열렸다. 이 전시회에서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본 루이 르루아가 풍자신문에 작품들을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그 인상만큼은 확실하지만 유치한 벽지보다 못하다.


이후부터 인상파가 그들을  대표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이제 30번 방으로 이동하여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보여주는 르누아르의 <물랑 드 라 칼 레트>를 감상하자.


몽마르트르에 있는 갈레트 풍차 위 무도장에는 밝은 태양이 비추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춤을 추고 있다. 화면 전체에 서민적이고 밝은 분위기가 넘친다. 그리고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과 의상 그리고 가구와 초목에도 밝은 빛들이 반짝인다.




중앙에 앉은 소녀와 화면 왼쪽에서 흥겹게 춤을 추고 있는 여인의 얼굴에는 행복감이 넘친다. 그녀의 드레스는 무슨 색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붉게 물들어 있다. 또한 보색으로 처리한 사람들이 입고 있는 검은색의 예복 역시 무척 부드러워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관능미로 물든 당시 파리 시민들의 생생한 행복감이 화면 밖으로 흘러넘치고 있다. 르느아르는 평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삶은 끊임없는 파티요
세상이 웃는 법을 알았다.



르누아르는 움직이는 사람들 위에 떨어지는 햇살과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드는 빛의 순간적인 변화와 움직임마저 포착해 행복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37번 방으로 이동하여 세잔의 <사과와 오렌지>를 감상하자.


현대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잔은 사물의 본질적이며 전체적인 모습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물을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본 모습을 한 화면에 담았다.




작품에서 물병을 보면 정면에서 보는 물병과 위에서 내려다보는 물병의 이미지를 하나로 합쳐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사과와 복숭아가 더 잘 보이게 하려고 탁자를 앞으로 기울여 표현하고 있다. 실제 탁자가 저 모습이라면 위의 사과들은 앞으로 굴러 내렸을 것이다. 또한 상단의 사과들은 위에서 바라보는 시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릇에 담긴 오렌지는 정면에서 바라보는 시점을 가지고 있다.


색채 또한 견고해서 가까이서 보면 사과와 오렌지의 표면의 질감이나 색조 그리고 미세한 명암까지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견고한 색감과 다시점을 사용한 세잔의 사과는 플라스틱 사과처럼 완벽한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이를 통해 그는 변하지 않는 사물의 본질을 보여준다. 모리스 드니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세상에 유명한 사과가 셋 있는데 그것은 이브의 사과와 뉴턴의 사과 그리고 세잔의 사과이다. 평범한 사과는 먹고 싶은데 세잔의 사과는 마음에 말을 건넨다.


계속해서 세잔의 <여인과 커피포트>를 감상하자.


여인의 정수리부터 얼굴과 몸은 정확히 수직으로 나뉘어 좌우대칭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배경으로 보이는 격자무늬의 문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여인의 옷에서 나오는 차가운 색채가 여인의 얼굴과 문에서 나오는 따뜻한 색과 대비되면서 원근법이 아닌 색에 의한 입체감을 보여준다. 여인의 얼굴이나 문을 보면 다양한 색채들이 사용되고 있다. 특히 여인의 얼굴은 한 가지 색이 아니라 진홍색과 노란색 그리고 황록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고흐와 고갱 그리고 세잔으로 이어지는 후기 인상파의 시대를 지나면서 근대 회화는 정점에 이른다. 이후 근대 회화는 야수파와 입체파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두 사조 모두 세잔의 영향을 받았다.




입체파의 대표적인 화가 피카소는 세잔의 다시점의 구도에서 영감을 받아 사물을 한 가지 시점이 아닌 여러 가지 시점으로 보는 입체적 기법을 만들었다. 그는 컵을 그리면서 위에서 본 장면과 앞에서 본 장면을 한 화면에 동시에 담았다.




피카소와는 달리 야수파의 거장 마티스는 세잔으로부터 색채의 해체를 배웠다. 여인의 얼굴에 여러 가지 색을 사용한 세잔의 작품에 영감을 받은 마티스는 색을 대상과 분리하여 색 자체로 자신의 느낌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작품 <자화상>을 보면 얼굴색이 자연색이 아니고 청색이 주를 이루며 퍼져 있다. 이후 마티스는 고흐에게 영향을 받아 원색적인 색채를 거침없이 화폭에 담아내었다. 이를 본 사람들이 마치 포악한 짐승과 같다고 이야기하며 마티스를 야수파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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