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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Aug 05. 2020

빈센트 반 고흐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

회오리치 듯 꿈틀거리는 긴 터치의 배경위에 야성적인 한 사내가 있다. 빗어 넘긴 갈색머리와 꼭 다문 입술 그리고 움푹 밴 볼과 붉은 수염에서 긴장감과 비장함이 보인다. 눈은 초점을 잃었지만 곤두선 눈초리에서 내면의 혼란스러움이 가득하다.


그는 강박적이며 병적인 마음과 정상적인 마음의 경계에 서 있다. 하지만 그 경계에서 한 발 짝도 물러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정신을 갉아먹는 또 다른 자신과의 싸움에 용맹하게 돌진한다. 그 싸움의 무기는 색이다.


그는 기존의 화가처럼 색을 사물을 재현하는데 사용하지 않았다. 그에게 색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도구였다. 그 특유의 긴 터치와 불꽃같이 타오르는 색으로 그는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그의 작품은 사물을 그리는 이전의 작품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현대회화의 길을 여는 신호탄이 되었다.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4년 후에 고흐의 평생 친구이자 동반자인 남동생 테오가 태어났다. 고흐의 가족은 유전적으로 정신병 내력이 있었다. 어린 시절 고흐는 잦은 발작으로 인하여 학교를 잘 다니지 못했다. 그는 학교를 자퇴하고 큰 아버지가 운영하는 구필 화랑에서 6년간 일했다. 제대로 미술교육을 받지 못한 고흐에게 이 경험은 후에 화가가 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조울증으로 구필 화랑의 일을 그만둔 고흐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꿈이었던 목사가 되고자 하였다. 하지만 번번이 신학대학 시험에 떨어지면서 화가에 뜻을 두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1885년까지 부친이 목사로 있는 누에덴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때 그린 것이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다. 이 작품에서 구도자 같이 청빈한 삶을 추구했던 청년 시절 고흐의 정신을 알 수 있다. 고흐는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는 램프 불 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민 손, 자신을 닮은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다. 그 손은,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를 암시한다. 정말 추하고 불쾌한 모습이지만 그래서 더욱 진실해 보인다. 누에덴에서 그린 그림 중 이 작품이 최고가 될 것이다.    


1886년 27세가 된 고흐는 동생 테오의 권유로 파리로 건너가서 본격적인 화가의 삶을 시작한다.


당시 파리는 인상파라는 새로운 물결이 넘치는 가장 현대적인 도시였다. 고흐는 파리에서 동생의 소개로 고갱을 만나 교류하였으며 로트렉과 절친이 되었다. 이들과 함께한 파리 생활은 고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무겁고 어두웠던 그의 화풍은 밝고 대담해졌으며 강렬한 붓 터치가 생겨났다. 또한 일본산 도자기를 감싼 종이에 그려진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아 선과 색채가 단순해졌다.  


1888년 2월 대도시인 파리의 생활에 지친 고흐는 마침 결혼한 동생과 함께 살 수 없다는 핑계로 프랑스 남부지방인 아를로 내려간다. 아를은 밝은 빛과 아름다운 색상으로 가득한 도시였다. 특히 밤의 풍경은 고흐를 매료시켰다. 여기서 완성한 작품이 <밤의 카페 테라스>와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이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 코발트블루의 밤하늘은 단순한 붓질이 아닌 붓의 자루로 겹겹이 누른 듯 칠하였으며 별은 노랑과 흰색 튜브 물감을 짜서 표현하고 있다.


고흐는 이제 일반적인 채색 방법을 떠나 자신의 생각을 반영한 색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보이는 대로가 아닌 느끼는 대로 그리기 시작한다. 그는 편지에서 다음과 이야기한다.


나는 점점 인상주의자들의 기법이 아닌 단순한 기법을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아볼  있게 그리고 싶다. 나는   앞에 있는 것을 똑같이 재현하기보다 자신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색채를 주관적으로 사용한다.  


오르세 미술관 2층으로 내려가 특별 전시실에서 후기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하자. 모네를 비롯한 초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에 의해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대상을 그렸다면 후기 인상파 화가들은 아예 색채와 형태를 화가가 느끼는 대로 사용하였다. 특히 고흐는 색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사용했다. 2층 특별 전시실에서 고흐의 작품들을  감상하자.


먼저 <해바라기>를 감상하자.


고흐에게서 해바라기는 강렬한 생명력과 희망이었다. 고흐는 해바라기의 강렬한 생명력을 두껍고 무거운 붓질에서 피어난 짙은 노란색으로 표현하였다. 그림 속의 물감은 붓으로 그렸다기보다는 캔버스 위에 그대로 짜 놓은 것 같다. 이러한 이유로 해바라기는 입체감을 준다. 고흐는 힘이 넘치는 강렬한 붓질로 해바라기의 꽃잎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그렸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의 작품 속 해바라기들이 모습이 모두 활짝 피어 있지 않다. 시들고 꺾인 해바라기도 보인다. 이는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꽃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얼마 있지 않아 시드는 것으로 아름다움과 인생의 덧없음을 표현하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빈센트의 방>을 감상하자.


고흐는 고갱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리면서 이 작품을 처음 그렸다. 그는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그린 작품은 내 방이다. 여기서 색채만이 모든 것을 보여준다. 색채가 사물의 본질을 더욱 명확히 드러내게 한다. 이 방이  색채로 인하여 휴식 또는 잠을 자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실 사물을 어떻게 보는가는 보는 사람의 마음 상태와 상상력에 달려 있다. 벽은 창백한 보라색이고 바닥에는 붉은 타일이 깔려 있다. 침대의 나무는 나무 부분과 의자는 신선한 버터의 노란색이고, 시트와 배게는 라임의 밝은 녹색이며 담요는 진홍색이다. 창문은 녹색, 세면대는 오렌지색이고 세숫대야는 파란색이다. 그리고 문은 라일락색이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색을 칠하는 고흐는 침대 커버를 빨간색으로 사용해 생기를 더하고 있으며 방안의 의자 역시 따뜻함과 행복을 상징하는 노란색을 사용하였다. 원래 의자의 색깔은 하얀색이었다.


또한 그의 방에 있는 두 개의 의자와 두 개의 베개 그리고 두 개의 병에서 고흐의 동료애에 대한 갈망이 보인다. 그리고 살짝 열려 있는 창문은 외부 세계와 연결된 통로를 상징한다. 침대 위의 초상의 왼쪽은 자신의 자화상이고 오른쪽은 누이의 초상이다. 당시 유행하던 철제 침대 대신 농민의 침대를 구입한 고흐는 오베르로 이사하면서 이 침대를 가지고 갔으며 그가 숨을 거둔 것도 바로 이 침대에서였다.


계속해서 <오베르의 교회>를 감상하자.


파리에서 기차로 1시간 거리인 오베르에서 오베르의 교회를 직접 본 사람이라면 고흐의 <오베르의 교회>를 본다면 그의 독창성에 깜짝 놀란다.




평범한 교회 앞마당은 파도처럼 물결치는 짧은 붓 터치로 생명력이 넘치며 짙은 그림자로 연결된 교회로 이어진다. 돌로 만든 교회 역시 벽과 지붕을 선명하게 표현했음에도 압축된 공간 안에 끼여 비뚤비뚤해 보인다.


교회 지붕은 푸른색과 오렌지색으로 칠해졌으며 길 위를 걸어가는 여인은 교회의 무시무시한 형상에 눌려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교회 위로 코발트 빛 하늘은 그 빛이 너무 짙어 딱딱한 평면적 공간으로 보인다.


고흐 특유의 살아서 꿈틀대는 듯한 격렬한 터치와 강렬한 색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고흐 작품에서 가장 화려한 것으로 고흐의 원숙한 기량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의사 가셰>를 감상하자.


오베르에서 고호의 정신병 치료를 담당한 의사가 가셰였다. 작품 속에서 그의 앞에 놓인 식물은 디기탈리스로 심장의 통증을 치료하는 재료이다. 그 옆으로 보이는 노란색 표지의 책은 공쿠르 형제의 소설로 예술과 노이로제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식물과 책은 가셰 박사가 의사임을 상징한다. 고흐는 자신의 작품 <의사 가셰의 초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가셰 박사의 초상을 우울한 모습으로 그렸다. 누가 보면 인상 쓰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슬프지만 점잖고 지적이다. 앞으로 초상화는 이런 모습으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셰 박사의 초상화에는 오랫동안 지켜봐 왔던, 아마도 백 년 후에도 고대하게 될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슬픔과 구원이 담겨있다.  


고흐는 가셰 박사의 모습을 그리면서 동시에 그 속에 자신의 모습을 넣었다. 작품 속 주인공은 환자이자 의사이며, 고통받는 사람이자 치유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오늘날 이 작품을 우리 시대 상처 받은 마음을 표현한 작품 중 최고의 작품으로 이야기한다.




1888년 아를의 정착한 고흐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서 마음껏 그림을 그리는 화가 공동체의 설립을 꿈꾸었다. 그는 노란 집에 4개의 방을 빌려 친했던 고갱을 초청하지만 거절당한다. 하지만 화구상으로 당시 이름이 있었던 동생 테오의 설득과 금전적 지원을 약속받으며 고갱은 아를로 내려온다. 고갱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고흐는 기쁨으로 들뜨며 고갱의 방을 장식할 해바라기를 그린다.


고갱이 내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생활은 곧 파국을 맞이한다. 이성적이고 냉정한 고갱은 감성적이며 변덕이 심한 고흐와 성격뿐 아니라 그림에 대한 다른 생각들이 달랐다. 고갱이 힘든 동거 생활을 끝내고 파리로 떠나려 하자 고흐는 그의 뒤를 쫓아가 고갱에게 남아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고갱은 이를 뿌리치고 집에서 10분밖에 되지 않은 기차역으로 떠나버린다.


고흐는 엄청난 실망감과 좌절로 자신의 귀를 자른다. 이후 정신병이 깊어진 고흐는 아를 근처에 있는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당시 병원에서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 몇 주는 기이한 경험이었다. 최근에 있었던 일들이 대부분 기억에서 사라져서 그 조각들을 이리저리 다시 끼워 맞춰보려 했지만 다 부질없다. 문득문득 발작성 불안감이 휘몰아치듯 닥치곤 하는데 그러다가도 밑도 끝도 없는 공허와 허탈감이 밀려온다.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상 아무렇지 않게 멀쩡히 하루를 보내는 때도 많으니 내 걱정으로 너무 마음 졸이지 않았으면 한다. 적어도 내가 판단할 수 있는 바로는 아직 내가 진정으로 이성을 잃은 건 아닌 것 같으니 말이다.


창살이 있는 병동에서 하루 3번 이상 샤워할 것을 요구받을 정도로 정신착란 현상을 보인 고흐는 야외 생활이 금지된 상태로 자신이 이전에 그렸던 작품들을 보며 모사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좀처럼 병은 낫지 않았다.

 

1890년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더 이상 치료에 대한 희망을 잃은 고흐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휴양지인 파리 근교 시골마을 오베르로 올라왔다. 오베르의 전원생활은 평화로웠다. 동생의 정성 어린 보살핌과 의사 가셰의 세심한 치료 덕분에 고흐의 병세는 진정되는 듯했다.


당시 그는 푸른 하늘과 밀밭이 가득한 전원풍경을 마음껏 그렸다. 하지만 오베르의 평화로운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랫동안 자신을 뒷바라지란 동생 테오의 아이가 큰 병에 걸렸지만 돈이 없어 수술도 못하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고흐는 평생 자신의 뒷바라지 때문에 끊임없는 가정불화와 궁핍한 생활에 시달린 동생을 보면서 좌절한다.




석양이 지는 오베르 쉬르 오아즈의 넓은 들판에 서서 고호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응시하며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강력한 색상과 꿈틀거리는 긴 터치로 그의 마지막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추수가 되면 곧 생명을 잃겠지만 그래서 더욱 찬란히 빛나는 황금빛 밀밭 위로 두 갈래의 길이 있다. 이 길은 고흐가 걸어가야 할 죽음의 길이다. 푸르다 못해 검은 하늘 위로 두 무리의 구름과 무수히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까마귀들이 보인다. 이것들은 죽음과 삶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이는 두려움의 대상도 찬양의 대상도 아닌 그저 인간이 운명처럼 가야 하는 길임을 암시한다.


그는 <밀밭 위의 갈까마귀 떼>를 완성하고 하숙집으로 돌아와 권총 자살한다. 그러나 동생이 소식을 듣고 올 때까지 죽지 못하고 있다가 동생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



고흐는 동생의 품 안에서 자신의 운명을 끝낸다. 고흐가 눈을 감은 뒤 그의 품에서 동생에게 보내려던 마지막 편지 한 통이 발견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은 고통과 영원히 작별하는 날이다. 평생 나를 돌봐 주었던 테오의 품에서 마지막을 보낼 수 있어서 행복하다. 마지막으로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사랑하는 동생아, 내가 늘 말해왔고 다시 한번 말하 건대 나는 네가 단순한 화상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너는 나를 통해서 직접 그림을 제작하는 일에 참여했다. 최악의 상황에도 그 그림들은 남을 것이다. 그래, 내 그림들. 나는 그 그림들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그것 때문에 반쯤은 미쳐버렸지.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너는 사람을 사고파는 장사꾼이 아니다.


큰 캔버스 하나 살 돈이 없어 평생 가난했으며 인생의 대부분은 정신병으로 지내야 했던 고흐는 살아서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하였다. 고흐는 가난과 병 그리고 무명 등 인간이 가져야 할 모든 불행을 안고 살다가 죽었다. 그가 남긴 전설적인 작품들 역시 그의 죽음과 함께 그대로 묻혔다. 그런데 동생 테오의 아내인 요한나에 의해서 마법처럼 세상에 알려졌다.


요한나는 고흐가 사망하자 고흐의 작품과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600통을 책으로 출판하였다. 그리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며 고흐는 단박에 위대한 화가가 되었다


1990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의사 가셰의 초상>이 경매장에 나왔다. 경매 시작가는 2천만 달러였으며  백만 달러씩 호가가 올라갔다. 3천5백만 달러에서 잠시 멈추더니 이후 거침없이 올라 5천만 달러를 순식간에 넘었다. 다시 치열한 경합을 거쳐 결국 8천만 달러에 낙찰된다. 이는 당시 미술품 경매가 최고가로 생전에 단 한 점 밖에 팔리지 않았던 반 고흐의 그림이 세계 미술시장을 평정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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