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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Aug 05. 2020

퐁피두센터

세상의 주인은 나

1917 년 뉴욕의 독립 전시회가 열렸다. 누구나 1달러만 내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다. 독립 전시회장에 한 작품이 도착했다. 작품명은 <샘>이었다. 작품이 담긴 박스를 열고나서 심사위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박스에는 남성용 변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 화장실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변기를 거꾸로 해 놓고 <R. Mutt>라고 적혀 있을 뿐이었다.

 

당시 전시회의 조직 위원회는 이 작품을 외설적인 이유로 전시를 거부하였다. <샘>은 그 이후로 전시회장에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후 이 작품의 제작가가 나타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이벤트를 벌이며 현대회화의 시작을 알렸다.




1977년에 개관된 퐁피두 센터는 지금도 획기적인 건축물로 평가받지만 개관할 당시에는 혁신을 넘어 혁명적인 건물이었다.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건물 내부에 숨겨 놓아야 할 구조물을 건물 밖으로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내부 전시공간은 단순하고 넓어졌으며 언제든 용도에 맞게 바꿀 수 있게 되었다.


퐁피두 센터의 외부에 보이는 붉은색 구조물은 사람들의 이동수단인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이다. 녹색 파이프는 수도관이며 노란색 파이프는 전기배선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흰색 파이프와 깔때기 모양의 거대한 관은 환기관이다. 건축물의 뼈대 역할을 하는 이러한 철근 구조물은 디자인을 위한 것처럼 다양한 형태와 색깔로 외부에 노출되어 있다.


처음에 이러한 혁신적인 시도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이후 해마다 4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입장하는 파리의 명소가 되었다.

 

퐁피두 센터 5층으로 입장하여 현대화화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이전에 왕이나 귀족을 위해 사용하였던 화려한 장식은 물론 입체성을 위한 원근법과 명암마저 포기하며 단순하면서 평면적인 작품을 현대화가들이 완성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퐁피두센터 5층의 7번 방에서 야수파의 대표적인 화가 마티스의 <루마니아 풍의 블라우스>를 감상하자.




강렬한 원색을 사용한 이 작품에서 여인의 머리 모양과 이목구비는 과감하게 생략되어 작품 전제적으로 입체감은 사라지고 평면적인 느낌이 강하다. 대신 화려한 색채가 관람자를 압도한다.


배경의 붉은색과 푸른색 치마의 강렬한 대비로 흰색 블라우스를 돋보이게 한다. 또한 흰색 블라우스 위에 그려진 아라베스크 문양은 밝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마티스는 입체성이 없는 평면적인 화폭 위에 오직 강렬한 색감으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8번 방으로 이동하여 입체파 화가인 피카소의 <팔걸이가 있는 의자에 앉은 여인>을 감상하자.




피카소는 사물을 부분이 아닌 전체적으로 보기 위해 한 시점이 아닌 여러 가지 시점에서 바라보는 입체적 기법을 발견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시점에서 보는 장면을 하나의 평면적인 화면에 담았다.


작품에서 여러 형태로 쪼개져 새롭게 조립된 여인의 이미지는 단순한 배경과 대조를 이루며 마치 조각상같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다양한 여인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사람을 볼 때 한 가지 시각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으로 사람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5층 15번 방에서 추상화의 대표 화가인 칸딘스키의 <노랑 빨강 파랑> 작품을 감상하자.




이 작품에서 색의 3원 색인 노랑, 빨강, 파랑을 기본으로 다양한 색으로 된 점과 선이 보인다. 그리고 원형으로 된 무늬들이 작품을 돋보이게 한다.


화면의 왼쪽은 직선으로 사람의 얼굴을 노랑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화면의 오른쪽은 자유로운 곡선들과 파란색의 원이 보인다. 또한 화면의 중심에는 빨강을 배치하여 균형을 이루고 있다.


칸딘스키는 곡선과 직선 그리고 면과 색채를 단순히 배열한 것이 아니라 조화롭게 구성하였다. 또한 오른쪽 화면에 보이는 음악적 부호를 가볍게 춤추는 것처럼 표현했다.


음악이 우리에게 다양한 감동을 주듯이 칸딘스키는 색채나 형태를 통해서도 음악처럼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고 확신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노랑은 높은음을 보여주고 파란색은 낮은음을 표현하며 초록색은 바이올린의 음색을, 붉은색은 북소리를 상징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서 다시 작품을 보면 그의 작품이 마치 음악을 듣듯이 리듬 있는 울림을 준다.


20번 방으로 이동하여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대표적인 화가인 뒤샹을 작품을 감상할 차례이다. 뒤샹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해 현대 미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준 작품이다.




1917년 뉴욕의 독립 전시회가 열렸다. 이곳에 R. MUTTS라는 작가 이름이 적힌 <샘>이라는 작품이 도착하였다. 하지만 박스를 열어본 독립 전시회 위원들은 변기를 보자 말도 안 되는 작품이라고 무시하고 창고에 처박아 두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독립 전시회의 이사이자 조직 위원이었던 뒤샹이었다. 그는 지난 파리 시절에 새로운 아이디어에 기인한 자신의 작품이 거절된 것을 경험 삼아 이번 일을 꾸몄다.


뒤샹은 <샘>이 무시당하자 누구나 전시할 수 있다는 독립 전시회의 기획의도와 배치된다고 주장하며 이사직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자신이 창간한 잡지 <눈먼 사람들>에 익명으로 다음과 같이 글을 올린다.

   

독립 전시회에 변기가 외설적이라서 거부한 것은 잘못되었다. 또한 변기를 작가가 직접 제작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변기에 새로운 제목과 시각으로 기존의 변기에 대한 이미지를 없애고 새로운 개념을 창안했다. 진정한 현대 예술은 작가의 생각에서 나온다.

나는 작품을 평가하는 비평가들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보수적이며 상업적이다. 그들은 미술가들과 한 통속이 되어 작품을 비싸게 파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뒤샹의 조롱 섞인 비판으로 <샘>에 대한 논쟁이 격화되자 당시 뉴욕 예술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스타 글리치가 소변기의 사진을 찍어 자신의 갤러리에 전시하였다. 이후 <샘>은 하루아침에 유명해졌다. 그리고 뒤샹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뉴욕 미술계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파리에서 온 뒤샹은 뉴욕 미술계에서 이미 저명한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루앙에서 태어난 마르셀 뒤샹은 1905년 파리에서 기존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독립 전시회에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라는 작품을 출품하였다. 당시 조직위원들은 그의 작품을 보고 당황했다.





파편화된 몸을 한 사람이 계단을 내려오는데 내려오는 순간의 장면이 겹쳐지면서 혼란스럽게 보였기 때문이다.

혁신적인 그의 작품은 고정된 사물의 파편을 그리던 입체파 화가들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예술을 하던 뒤샹의 형들 마저도 작품을 철수하도록 충고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작품을 떼어내어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져갔다.


파리와는 반대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는 뉴욕에서 가장 도발적인 작품이 되었다. 뒤샹의 작품을 보기 위해 연일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들은 뒤샹의 작품 속 인물이 현기증이 나게 무질서하지만 그 움직임 뒤에 보이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발견했다. 입체 주의자들이 공간의 동시성을 표현했다면 뒤샹은 공간은 물론 시간의 동시성을 표현했다.


이후 뉴욕 화단의 초청으로 뉴욕으로 건너간 뒤샹은 상업적인 비평가들로부터 독립한 독립예술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그는 그림이나 조각처럼 작가들이 무엇을 만드는 기존의 예술에서 해방되어 이미 만들어진 일상용품에 작가의 아이디어만 있으면 작품이 된다고 믿었다.


이로 인해 20세기 현대미술에서 가장 혁신적인 <샘>이 탄생했다. <샘>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아름답지 않다. 그냥 소변기일 뿐이다. 심지어 오리지널 작품도 아니다. 그러나 뒤샹이 소변기를 택한 것은 오히려 미학적인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예술은 이제 예술가가 만들어낸 대상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예술가의 생각에 있었다. 그리고 그 작품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느낌에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현대미술은 예술가의 작품보다
대중 자신이 그 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감각을
스스로 탐구하고 파악하는 것이다.



뒤샹은 더 이상 붓과 캔버스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존의 물건에 자신의 생각을 담아 예술작품을 창조했다. 이후 그의 작품은 현대의 설치미술과 행위예술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다.


5층 번 38방으로 이동하여 추상 표현주의 화가인 잭슨 플록의 <넘버 26A> 작품을 감상하자.


추상주의 화가인 칸딘스키가 음악을 대상으로 추상적인 그림을 그렸다. 이처럼 추상주의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대상이 있다. 하지만 추상표현주의는 대상이 없다. 대상 없이 순수한 추상 이미지를 만드는 화파를 말한다.




거대한 캔버스에 붓 자국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플록은 캔버스를 바닥에 눕힌 평면의 상태에서 캔버스 위를 걷거나 한 복판에서 서 있는 상태에서 검은 페인트를 떨어 뜨리고 붓거나 튀기면서 작품을 완성하였다. 이런 식의 행동 역시 작업의 일부였다.


그러나 난장판이 된 그의 작품을 자세히 보면 일정한 규칙과 패턴이 존재한다. 실제로 플록은 수많은 시간 동안 페인트를 뿌리며 페인트가 바닥에 닿는 흐름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도달하였다. 결국 우연을 필연으로 만든 그의 독특한 예술 표현에서 격정적인 감정이 느껴진다.  


39번 방으로 이동하여 추상표현주의 또 다른 화가인 로스코의 <검정. 빨강 위에 흑색 너머 빨강>을 감상하자.


1949년 무렵 로스코의 그림에서는 형태가 사라졌다. 그가 그림에 담고 싶은 것은 인간의 유한함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숭고함과 무한함이었다. 무한을 담아내기 위해 유한한 형태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의 작품에서 커다란 두 개의 사각형이 보이지만 그는 사각형을 그린 것이 아니다. 사각 캔버스 위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무형의 형태를 그렸다. 그래서 사각형이 형태로 인식되지 않도록 테두리 부분들을 스펀지로 부드럽게 뭉개 버렸다. 결국 황홀한 색채만이 캔버스에 남았다.




로스코는 자신을 단순한 색채화가로 규정짓는 것도 거부했다.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빛이 인물들의 영혼을 표현하듯이 그는 그의 작품 속 색채가 정신적 숭고함을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내 작품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내가 그 작품을 그리면서 느꼈던
숭고한 종교적 경험을 체험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종교적 체험 같은 것이 되길 원했다. 그래서 관람자가 빠져들 수 있도록 큰 그림을 그렸으며 작품이 더 크게 느껴질 수 있도록 45cm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감상할 것을 요구했다.


프랑스혁명 이후 시민이 주인 되는 세상에서 시민들은 이전의 왕이나 종교 세력이 원했던 화려하거나 입체적인 장식을 없애고 단순하면서 평면적인 작품을 원했다. 이후 인상파를 시작으로 마티스와 피카소 그리고 추상주의 미술은 원근법과 명암에 의한 입체성을 없애고 단순하면서 평면적인 회화를 추구했다. 하지만 현대의 미니멀리즘 화가들은 가식이 없는 <평면성>을 완성했다는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작품에서 여전히 입체적인 형상이 보인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잭슨 플럭의 작품에서 먼저 뿌린 것과 나중에 뿌린 것 사이에서 높낮이가 존재하고 로스코의 빨간색과 검은색 사이에 역시 입체성이 보인다고 이야기하였다.


이후 현대 화가들은 화가가 캔버스에 무엇을 그리는 순간 그 속에 사람들이 어떤 허상을 찾는다고 주장하며 물감과 캔버스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의자 같은 <사물>을 전시하며 이제 실재만 있을 뿐 거짓 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대 예술은 회화 자체를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현대 미술의 모험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단순화된 의자 자체를 전시한 미니멀리즘 화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의자>라고 쓴 글을 전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 의자와 <의자>라고 쓴 글이 입체적인 거짓 형상을 제거하는데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이로 인해 현대 예술은 아름다움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언어마저 전시하면서 개념미술로 나아갔다.


근대회화는 왕과 귀족을 위한 입체적이며 화려한 바로크 화화에서 벗어나 시민혁명을 통해 시민이 주인 되는 사회에서 가식적인 입체성을 버리고 평면적인 사실주의와 인상파로 나아갔고 이는 야수파와 입체파를 거쳐 추상주의에 도달하였다. 이후 추상주의는 추상표현주의와 미니멀리즘을 거쳐 현대의 개념미술이 되었다.


개념미술은 예술가의 생각과 아이디어가 미술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예술이다. 이는 1차 세계 대전 이후 나타난 다다이즘의 대표적인 화가인 뒤샹의 생각과 완벽히 똑같은 주장이다. 이제 그들은 전통적인 조각이나 회화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 후로 현대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표현하기 위해 무엇이든 제약 없이 사용하였다.




한편 현대 미술은 개념미술이라는 형식적인 변화와는 별도로 내용적인 면에서도 혁신을 이루었다. 이는 2차 세계대전의 영향이 컸다. 그 이전까지 서구 문명은 백인 남성의 합리적인 판단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들이 합리적인 판단이 천만 명을 죽이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당시 예술가들은 더 이상 백인 남성이 주도하는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유색인종과 여성 그리고 성소수자 등이 주도하는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후 다양한 사람들이 예술가가 되었으며 지금 현재 가장 인기를 누리는 영국인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 역시 성 소수자이다.


이러한 현대 예술의 경향은 사회 전반적 분위기로 확산되어 현대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미국에서는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또한 대중매체의 영화나 오락 속의 주인공은 더 이상 백인 남성이 아니라 흑인과 여성이 되었다.


다양성을 강조하는 현대미술의 주인공은 더 이상 미술 작품이 아니라 미술 작품을 보고 자신의 감각을 자유롭게 느끼는 개인이 되었다. 그래서 현대 미술은 작품과 그 작품을 감상하는 감상자와의 소통을 중요시한다. 결국 현대 미술의 목표는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 관람자가 작품 안에서 자신의 감각을 자유롭게 탐구하며 자신을 감정을 스스로 느끼는 것이 되었다.


현대의 시대 정신인 다양성 속에 존재하는 개인은 인종과 성별 그리고 계층에 상관없이 모두 존중받아야 하는 시대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주인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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