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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Aug 04. 2020

나폴레옹

영웅인가 독재자인가

조금도 물러설 수 없었다.


누구나 능력이 있으면 신분에 관계없이 사회적으로 성공을 할 수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단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신분제를 고수하고 있는 주위의 왕국들은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는 주위의 왕국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결코 이 싸움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왕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이루어 낸 조국 프랑스가 민주적 절차를 거쳐야 하는 제도로 인해 대 혼란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간과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심 끝에 황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의 최종 목표는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근대적 프랑스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주변의 왕국과 대적할 수 있는 군사력과 정치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전략적 후퇴를 결심했다. 그가 스스로 황제가 되어 유럽 최고의 가문인 합스부르크가와의 혼인을 통해 주위의 왕국들을 안심시키면서 내부적으로 힘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왕의 목을 단두대의 칼날로 자르며 공화정을 이룬 조국 프랑스에서 그가 황제가 되는 순간 그를 영웅으로 칭송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권력에 취한 변절자로 취급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독배를 마셔야 했다. 그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더욱이 그가 되려는 황제는 세습이 아니라 국민투표를 통해 선출되는 황제였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나폴레옹은 90퍼센터의 압도적인 지지로 황제가 되었다. 그는 노트르담 성당으로 들어가서 스스로 황제관을 머리에 얹었다. 자신의 운명은 이제 신의 축복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고 확신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황제의 관을 스스로 쓰고 성당을 걸어 나오자 불 같은 감격들이 올라오면서 지금까지 삶들이 그의 머리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원래는 이탈리아였으나 전쟁으로 프랑스의 영토가 되어버린 코카서스 섬에서 나폴레옹은 태어났다. 당시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추진하다가 좌절하여 이탈리아 귀족에서 프랑스의 귀족이 된 아버지 덕분에 그는 파리 군사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군사학교에서의 생활은 늘 혼자였으며 시골 출신이라는 놀림과 따돌림을 받았다. 당연히 성적도 좋지 못했다. 하지만 혼자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읽었던 많은 책들이 그를 성장시켰다. 그는 책 속에서 알렉산더 대왕과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 역사적 영웅들을 만나며 그들의 삶과 정신을 배웠다.


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부르고뉴 지방에 배치되었을 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그는 코르시카로 돌아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위한 활동을 하려 했으나 배신자 낙인이 찍힌 아버지로 인해 코르시카에서 쫓겨나야 했다.

인생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프랑스로 돌아와 급진공화파인 로베스피에르파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지만 로베스피에르 역시 사망하자 그는 감옥에 갇혀 언제 죽을 지 모르던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행운은 그의 편이었다. 새로운 혁명정부의 실권자인 폴바라스가 그를 발탁하여 반대세력인 왕당파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포병을 배치하여 곧 바로 진압해 성공하였다. 그리고 승승장구하며 자신이 권력의 정점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때 조세핀과 결혼하였으며 그녀는 시골뜨기 말단 장교인 그에게 언제든 최고의 권력에 오를 수 있다는 자부심을 주었다.


1796년 3월 그는 사령관이 되어 이탈리아 원정길에 나섰다. 이탈리아 원정은 그에게 자신도 몰랐던 그의 천부적인 군사재능을 알게 했다. 그가 생각하고 실행하면 전쟁은 언제나 자신이 생각한대로 움직였다. 연전 연승하면서 그는 최고의 명예와 능력을 입증 받았다. 이제 모든 것이 자신의 손안에 있는 것 같았다.   



개선장군의 축하를 내심 기대하며 파리로 돌아온 그는 당황했다. 파리는 내전과 외부의 침략으로 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국가질서를 회복해달라는 시민들의 요구가 그에게 주어졌다. 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혁명정부를 무너뜨리고 통령이 되어 내전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권력을 누릴 틈도 없이 오스트리아로 가서 싸워야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와 평화협정을 맺은 그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외부의 침략을 막으면서 프랑스 혁명정신에 입각한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그 스스로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황제가 된 그는 오스트리아와 영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 이기면서 10년만에 조국 프랑스에 평화를 선물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전략대로 조세핀과 이혼하고 합스부르크 황실의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였다. 새 왕비는 프랑스 혁명 당시 목이 잘린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비난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를 재건하고 예술을 후원하는데 집중하였다. 당시 만들어진 것이 그 유명한 나폴레옹 법전이다. 당시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의 진정한 영광은
마흔번에 걸친 전쟁의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 민법전을
이제 누구도 말살할 수 없는 데 있다.



유럽을 군사적으로 제패하는 것보다 자신의 법전을 더욱 자랑스러워한 그는 가문이나 혈연이 아닌 능력위주로 운영되는 관료제를 확립하였다. 또한 근대적 엘리트 육성 교육제도를 도입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가 생각한만큼 그렇게 많지 않았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는 프랑스의 황제 체제를 인정하였으나 영국과 러시아가 반발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가 반불 동맹을 맺어 프랑스로 침략해오자 나폴레옹은 18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아우스터리츠에서 두 나라의 황제들이 이끄는 연합군을 대파했다. 새 황제의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이 전쟁에서 그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그는 개선문을 세우고 판테온을 제국의 위대한 인물에게 바치는 성전으로 만들었다. 1811년은 그에게 정점에 이른 해로 유럽의 대부분을 직간접적으로 통치한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5년 안에 나는 세계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마지막에 러시아만 남겠지만 이 나라마저
파괴할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침공이 그의 몰락을 재촉했다. 가능한 전력을 집중해 적의 중심을 깨트리는 나폴레옹의 전략은 러시아에서 참담하게 실패하였다. 60만 대군을 동원한 나폴레옹의 대군을 맞은 러시아는 전투를 피하며 시간을 끌었다. 결국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점령하였지만 러시아군은 항복을 거부하며 모스크바를 불태웠다.



그리고 겨울이 다가오자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던 나폴레옹은 후퇴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군의 이때부터 대대적인 반격을 가한다. 러시아 침공으로 나폴레옹 원정군은 병력 57만명과 말 20만 마리 그리고 포 1,050을 잃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불패의 신화가 깨졌다.


파리로 귀국한 나폴레옹은 먼저 정국을 수습하고 군을 재조직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러시아와 프로이센 그리고 오스트리아 영국을 비롯하여 스웨덴까지 가담한 100만의 연합군이 프랑스로 공격하여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했다. 4월6일 나폴레옹은 왕위를 양위하고 지중해의 엘바섬으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파리로 돌아왔다.



엘바 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은 자신의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1815년 엘바 섬을 탈출하여 왕족의 재건을 두려워한 600명의 지지자들과 파리로 돌아왔다. 당시 그를 막는 프랑스 군인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에게 그는 여전히 사령관이었다. 재기를 노리며 군대를 모집한 그는 6월 18일 워터루에서 영국과 러시아 연합군에 패배한다.


이제 그는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당시 그가 남긴 회고록으로 이후 나폴레옹의 신화가 탄생한다.  


1830년 파리에서 일어난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루이 필리프 1세는 나폴레옹 황제 숭배 열기에 편승하여 나폴레옹의 시신을 파리로 옮겨와 앵발리드에 묻었다. 당시 나폴레옹의 시신이 해안에 도착하자 수 많은 축포가 울렸으며 파리로 운반하는 내내 구름 같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자유 평등 박애에 입각한 계몽주의자이자 공화주의자인 나폴레옹은 공화국의 헌법을 만들고 근대교육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그는 왕권을 지키려는 주변 국가와 끊임없이 전쟁을 해야 했으며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무력으로 이 모든 성취를 이룬 그는 무력에 의해 물러났다.


그는 실패했지만 그의 시대에 이루고자 했던 공화국의 정신인 자유와 평등은 유럽으로 뻗어 나갔으며 오늘날까지 전세계에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공화국에서 황제가 된 인류상에 가장 모순적인 인간인 나폴레옹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난세의 영웅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사망한 사람만 100만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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