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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Aug 08. 2020

피사 여행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열망

피렌체를 여행하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피사를 가야 한다.

피렌체에서 기차로 1시간 거리에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선정된 피사의 사탑이 있기 때문이다.


피사역에서 내려 10분정도 걸어가면 기적의 광장이 나온다. 기적의 광장을 두르고 있는 성벽을 지나면 넓고 푸른 풀밭 위로 피사 대성당과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이 우아하면서 장대하게 펼쳐진다. 여기를 한 번이라도 방문한 사람이라면 이 광장을 <기적의 광장> 이라고 부르는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다.



1174년 피사의 사탑이 10미터 높이에 이르렀을 때 한쪽 지반이 내려앉아 공사가 중단되었다.

무너진 지반을 확인해 보니 해안지대의 모래와 점토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후 기울어진 탑의 밑부분을 보강하는 한편 반대편 지반에 무거운 납덩어리를 쌓아 기울어진 형태 그대로 건물을 보정했다.


이후 피사의 사탑을 정상적으로 세울 수 있었지만 기울어진 사탑이라는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피사의 사탑은 중세시대의 대표적인 건물 양식인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로마가 멸망하면서 서유럽은 중세시대로 접어들었다.

중세시대 초반에는 로마제국처럼 유럽의 질서를 지배할 강력한 세력이 없어 혼란스러웠다. 초기 중세를 지나자 서유럽에 강력한 프랑크 왕국이 생겨나면서 조금씩 질서가 잡혀 갔다. 프랑크 왕국의 왕이었던 샤를마뉴 대제는 서유럽을 통일하고 이탈리아를 점령하였다. 또한 유럽으로 침략해오던 이슬람 세력을 막아내어 당시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른다.


광대한 영토를 차지한 샤늘마뉴 대제는 이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먼 지역은 자신의 신하들인 영주가 통치하는 봉건제를 실시하였다. 신하들은 샤를마뉴에게 충성을 맹세하였고 그 대가로 자신의 지역을 다스리는 권력을 얻었다. 하지만 권력이 점점 강해지는 지역의 영주들이 왕국자체를 위협하는 일이 생기자 샤를마뉴 대제는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교황이 자신에게 왕관을 내리면서 왕은 영주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이 내린 권위를 갖게 되었다. 아무런 지지기반이 없던 교황 역시 황제부여권을 가지면서 권위와 실질적인 조력자를 얻게 되었다.



샤를마뉴 통치하에서 봉건제와 기독교는 유럽을 통합하고 질서를 유지하였다. 이로 인하여 인구와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였으며 무역이 활성화되고 도시가 탄생했다. 그리고 도시 중앙에는 종교와 정치권력을 상징하는 성당과 성이 존재하게 되었다.


중세시대의 한 복판인 서기 1000년이 되자 유럽의 사람들은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했다.우리 역시 2천 년에 밀레니엄 버그라는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불안한 천년을 맞이하고 있던 유럽인들은 신의 은총에 자신의 안락과 영혼을 맡겼으며 이는 유럽 곳곳에 있는 성지를 방문하는 것으로 죄사함을 받았다. 이때부터 성지순례를 가기 위해 먹고 자는 중간도시가  발달하였다. 도시들 마다 관광수익을 벌어주는 더 많은 순례자를 유치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그들의 안식과 믿음을 지켜 줄 대성당을 지었다.  


당시의 성당 건축은 그들에게 최고의 기술이자 문명이었던 로마식으로 지었는데 이를 로마네스크 양식이라고 한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기존의 나무로 지어져 화재에 위험이 컸던 십자가형의 성당에서 벗어나 돌로 지었다. 또한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크게 지었다.


당연히 대형 돌건물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그 하중에 두터운 벽과 기둥이 사용되었으며 무거운 하중을 잘 견디는 로마식 아치가 입구와 천장으로 사용되었다. 반면 두터운 벽과 기둥으로 창이 작은 성당의 실내는 좁고 어두웠다. 피사의 대성당이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피사 대성당


도시국가였던 피사가 팔레르모 해전에서 이슬람의 사라센 함대에 대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피사 대성당은 길이가 100미터, 높이는 34미터 이르는 대규모 성당이다.


피사 대성당은 교차점에 둥근 천장을 하고 있어 하늘에서 보면 신을 향한 믿음을 상징하는 십자가가 완벽하게 보인다. 또한 아치형태의 입구와 장식을 가지고 있는 외관은 그리스 로마의 영향을 받아 흰 대리석 바탕에 짙은 대리석을 집어넣어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성당 안은 기본적으로 작은 창문으로 인해 실내는 어둡지만 모든 벽은 흰색과 붉은 색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벽을 따라 올라가면 금박을 입힌 화려하면서 단아한 나무 천장을 만날 수 있다.



피사 대성당의 압권은 대성당의 입구가 있는 정면 파사드로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아치와 기둥으로 연결된 장식을 아케이드라고 한다.

장식을 목적으로 한 아케이드는 이탈리아 북부와 독일 남부에서 주로 사용되었는데 피사의 대성당은 무려 4개층을 이루고 있는 아케이드로 장식되어 있다. 특히 피사 대성당의 아케이드는 갈색과 청록색 등 형형색색의 돌로 레이스처럼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이는 반복되는 아치로 인하여 율동감과 생동감이 넘친다. 더욱이 햇빛이 대성당을 비추면 화려한 아케이드가 그림자를 만들어 그 깊이감을 더한다.


피사의 사람들은 4단의 아케이드가 만들어낸 화려함에 도취되어 6단으로 늘려 대성당 옆에 종탑을 지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피사의 사탑이다.


중세의 황금시대   


샤를마뉴 대제가 사망하자 손자들이 서로 자신이 왕국을 물려받기 위해 전쟁을 하여 프랑크 왕국은 서 프랑크와 동 프랑크 그리고 중 프랑크로 나누어진다. 이것이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의 모태가 된다.


9세기 분리된 프랑크 왕국의 왕권은 자연스럽게 약화되었으며 지방 영주들의 힘은 강해졌다. 특히 북으로부터 노르만족이 침입해오자 서 프랑크는 대 혼란을 겪는다. 이때 지방의 영주 출신인 로베르 공이 노르만 침입을 막으며 지방영주들에 의해서 프랑스 왕으로 선출된다. 이후 서프랑크는 루이 9세 등을 거치면서 왕권이 점차 강해지고 왕국은 중앙집권화 되었다. 특히 당시의 경제발전은 왕권을 강화시키는 좋은 호재가 되었다.


12세기가 되자 로마 교황청은 그들의 재정적 기반이 되는 수도원을 봉건 영주로부터 독립시켜 자신의 권한으로 가져오기 위해서 강력한 왕의 힘이 필요했다. 프랑스 왕실 또한  봉건영주들을 견제하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로마 교황청의 권위가 필요했다.


프랑스 왕실과 로마 교황청의 연대는 거대한 권력을 탄생시켰다. 당연히 거대한 권력은 그들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축물이 필요했다. 이렇게 탄생한 건물이 고딕양식의 대성당이다. 그들은 신에게 보다 많은 영광을 돌리고 보다 많은 은총을 받기 위해 성당을 높고 화려하게 지었다


고딕 성당은 기존 로마네스크 성당보다 더 높게 지어야 했다. 그래서 하중이 많이 가는 아치형 건물대신 뽀족한 아치를 사용하였다. 로마식 아치형 건물은 하중을 옆에 있는 벽으로 많이 가게 하여 벽이 두텁고 쌓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뽀족한 아치를 사용한 고딕 건물은 하중을 밑으로 가게 하여 벽을 얇게 만들 수 있어 쌓기가 쉬웠다.



그리고 얇아진 벽을 보충하기 위해 옆으로 부벽을 대고 본 벽과 부벽을 가로로 잇는 기둥을 만들어 붙였다. 이를 플라잉 버틀레스라고 부른다. 뽀족한 아치와 부벽 그리고 플라잉 버틀레스로 인하여 교회는 더 높게 지을 수 있었다. 또한 하중이 적어진 벽에 큰 창문을 낼 수 있어 성당은 더 높고 더 밝으며 더 완벽하게 지어졌다.

 

고딕 건축가들은 높아진 성당의 외벽에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상징하는 조각들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빛이 들어오는 큰 창에도 역시 성경 속 이야기들로 채워 글을 모르는 신자들에게 성경 속 이야기들을 보여주었다.


또한 기존의 아치로 연결된 낮고 무거운 천장 대신 우산의 살과 같이 생긴 뽀족 아치들이 서로 교차하며 만들어진 높고 웅장한 천장은 마감처리 없이 그대로 두었다.


이는 빛이 천장에 와 닿으면 천장을 받치는 뼈대 같은 뽀족 아치의 물질적인 부분과 빛의 영적인 부분이 조화를 이루며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결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성당이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이다.


중세의 르네상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중세에 대한 부정적이며 어두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는 그 다음 시대인 르네상스 시대의 자유롭고 밝은 이미지와 대비되어서이다 .하지만 중세가 남겨 놓은 예술은 그런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찬란하다.


절대적인 힘이자 질서였던 로마가 멸망하고 혼란한 중세시대에 접어들자 유럽은 지방의 봉건영주가 다스리는 세상이 되었다. 봉건 영주들은 영토확장을 위해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하였으며 이는 중세를 더 큰 혼란에 빠트렸다


전쟁과 혼란으로 가득한 중세에 사람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기독교였다. 혼란의 시대에 살았던 그들은 세속적인 감정을 숨겼으며 오직 신에 의한 구원을 소망했다. 당연히 그들은 신의 구원을 보여주는 높고 상징적인 건물이 필요했다. 그래서 중세의 고딕 성당은 더 없이 찬란하게 지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이라는 보이지 않는 상징적인 관념을 보이게 하는 성당으로 짓는 일은 보이는 물건이나 인물을 사실대로 그리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보이지 않는 신의 모습을 오로지 상상과 영감에 의존해서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세의 건축가들은 예술에서 최고의 경지인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내기 위해 모든 상상력과 돌 그리고 빛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의 영혼을 울리는 고딕 성당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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