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과 파란색이 필요한 이유

오르세 미술관

by 손봉기

봄이 와 푸르름이 넘실대는 들판은 해질 녘이 되면 저 멀리 울려 퍼지는 교회의 종소리와 함께 붉은 노을로 붉게 타들어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에 선 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자신의 길을 생각하며 불안에 휩싸여 있다.


고향같은 농촌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자신만만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에게 복잡한 파리보다 평화로운 농촌 생활이 훨씬 많은 영감을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화로운 농촌 풍경과 평범한 농부의 일상을 그린 그의 작품이 몇 년이 넘게 팔리지 않자 그는 가난하면서 불안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가혹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자식과 아내를 위해 며칠 째 자신의 작품을 팔기 위해 파리의 화랑을 배회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그의 작품을 받아주지 않았다.


화랑 주인들은 당시 유행하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상적인 주제나 여신의 모습이 담긴 작품을 원했다.


힘이 빠진 채 기차역으로 오는 길에 밀레는 미술학교 동창이자 화랑을 경영하는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친구는 초라한 밀레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그의 그림을 어떻게든 팔아 보겠다고 가져갔다. 그 작품이 <만종>이다.


밀레의 작품을 가져간 친구는 최신 유행하는 이상미가 넘치는 신고전주의 작품들을 경매로 판매하던 중 슬쩍 밀레의 만종을 올렸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천한 농부와 작품의 배경으로만 쓰이는 자연을 주제로 그리다니 정신 나간 작품이라고 비판하였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중에는 미국에서 건너온 거부가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 신대륙인 미국으로 건너가 석유와 금으로 큰돈을 번 사람들이 자신의 부를 자랑하려고 유럽으로 와서 미술 작품과 이태리 가구를 사가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 거부의 눈에 밀레의 작품은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오로지 종교에 의지하며 서부를 개척하던 자신들의 삶이 밀레의 작품에 그대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거부는 이 작품을 거액에 사들였고 다음날 밀레의 <만종>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작품을 구입한 미국인이 그림을 맡겨 두고 이탈리아로 가구를 사러 간 사이에 프랑스 정부는 자신들의 문화재를 계속 미국에 빼앗긴다는 명분으로 경매법을 바꾸어 만종을 재경매에 붙였다.


파리로 돌아온 미국인은 이 소식을 듣고 천문학적 가격으로 만종을 다시 낙찰받아 미국으로 가져간다. 미국에 간 만종은 미국인들로부터 열광적인 인기를 받으며 최고의 작품이 되었다. 이후 6.25 전쟁으로 미국의 영향을 받았던 우리나라 대부분의 이발소에도 밀레의 <만종>이 걸려 있었다.



하늘보다 대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밀레의 작품에서 농촌의 부부가 해질 무렵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에 기도를 하고 있다. 농부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작품 전체적으로 진실함과 경건함 그리고 평화로움이 넘쳐난다.


만종 이후로 신화나 이상적인 주제를 그린 신고전주의에 빠져 있던 유럽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사물을 그린 사실주의 작품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프랑스혁명 이후 사실주의와 인상파 화가들은 더 이상 왕과 귀족을 위해 입체적이며 이상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시민이 주인이 된 세상에서 그들은 평면적이면서 눈에 보이는 현실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르세 미술관에 가면 19세기 이상적인 신고전주의 작품부터 사실주의 그리고 인상주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오르세 미술관 1층 전시실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작품은 <올랭피아>이다.



매춘부 여성인 올랭피아가 옷을 벗은 채로 관람객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녀의 발아래 성을 암시하는 고양이가 보이고 고양이 위로 손님이 보낸 꽃다발을 들고 있는 하녀가 그녀를 보고 있다.


트럼펫 같이 납작하고 평면적인 올랭피아의 얼굴과 몸에서 억지로 꾸미지 않는 평면적이면서 근대적인 아름다움이 보인다.


인상파의 시작을 알리는 마네의 <올랭피아>가 얼마나 혁신적인지를 알고 싶다면 맞은편 전시실로 가서 당시 살롱전에서 대상을 받았던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을 비교 감상해보면 된다.



신화적 이상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에서 여인의 관능미를 숨기게 위해 천사를 그려넣어 여인이 신화 파도에서 태어난 비너스임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3층 전시실로 이동하면 인상파 화가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3층 전시실에서 가장 먼저 인상파의 문을 연 마네의 <건초더미>를 감상한다.



평생 빛을 실험한 모네는 특유의 짧고 과감한 붓질과 원색의 물감으로 햇살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빛에 반사된 건초더미의 그림자를 그리면서도 모네는 회색을 사용하지 않고 원색을 대비해서 사용했다. 그래서 환한 빛 속에서 보이는 사물에 살아 있는 생동감과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다음으로 모네의 <갈레트 풍차 위의 무도회>를 감상한다.



몽마르트에 있는 갈레트 풍차 위 무도장에는 밝은 태양이 비추고 나무 가지 사이로 수많은 빛이 쏟아진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춤을 추고 있다.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과 의상 그리고 가구와 초목에도 밝은 빛들이 반짝인다.


파리 시민들의 생생한 행복감이 화면 밖으로 흘러넘치고 있는 이 작품을 그린 르느아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삶은 끊임없는 파티다.
그리고 나는 세상이 웃는 법을 알았다.



3층 전시실 중앙에 있는 드가의 <압생트>에서 산업혁명 후 소외된 파리 시민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파리의 한 카페에서 한 여자와 남자가 압생트를 놓고 앉아 있다. 멍한 눈과 다리가 맥없이 풀려 있은 여인의 왼쪽으로 보이는 텅 빈 의자와 테이블이 두 남녀의 쓸쓸함을 더한다. 여인 앞의 테이블에 놓여 있는 술은 압생트로 <초록 요정>이라 불릴 만큼 강력한 환각작용을 일으킬 만큼 독하다.


햇살이 환한 아침, 독한 술 앞에서 멍 때리는 남녀의 모습에서 지난밤 있었던 하루 밤 사랑은 지극히 일상적이며 먼지와 같이 가볍다.


2층 전시실로 내려가면 물랭루주의 판화를 그려 유명해진 로트렉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어려서 유전병으로 불구가 되어 불운하고 짧은 삶을 살았던 로트렉은 매일 밤 물랭루주에서 술을 마시면서 일하는 여인들의 힘든 삶을 그렸다.


그녀들의 삶이 자신의 삶과 닮아 있으며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소외와 아픔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삶은 충분히 슬프다. 그래서 사랑스럽고 화려하게 그려야 한다. 이것이 빨간색과 파란색이 필요한 이유다.
이전 08화시가 된 사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