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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Aug 23. 2020

런던 내셔널 갤러리 2

근대 영국의 모습을 담은 미술

16세기 바로크 시대를 지나 17세기가 되자 네덜란드는 해상무역을 기반으로 시민국가를 형성하며 당시 강력한 군주들이 지배하였던 유럽의 국가들과 대립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왕권신수설을 받아들였으며 왕권신수설에 의해서 왕은 신에게서 지배권을 받았으므로 인간이 만든 어떤 법과 구속도 받지 않으며 신민들은 왕에게 절대복종해야 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의회의 권한이 강했던 잉글랜드에서 왕권신수설은 많은 마찰을 빚었다. 1215년 영국의 존 왕은 <마그나카르타>를 통해서 왕들은 앞으로 귀족들과의 사전 협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이후 제임스 1세를 비롯한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왕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갈등은 본격화되었다. 이로 인해 영국의 민주주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내셔널 갤러리의 <찰스 2세 기마상>이다.  




찰스 2세의 기마상


 1603년 튜더 왕조의 마지막 여왕 엘리자베스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 6세가 헨리 7세의 후예라는 이유로 즉위하며 스스로를 제임스 1세라 칭하며 스튜어즈 왕조시대를 연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 1세는 자신의 기반을 생각지 않고 절대왕권을 누리려 하였다. 그는 왕실 경비가 전임 엘리자베스 1세에 비해 7배에 달할 만큼 낭비가 심했고 이는 국민들의 불만을 살 수밖에 없었다. 결국 1612년 절대 왕권을 포기하고 연금을 받는 계약을 의회에 제출했으나 의회는 이를 거부하자 왕은 의회를 해산하며 대립하였다.


이후 30년 전쟁으로 재정이 필요해진 왕은 1621년 다시 의회를 소집하였으나 의회가 이를 무시하며 대립은 격화되지만 제임스 1세의 사망으로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제임스 1세를 이은 아들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며 독단적인 행동으로 의회와의 충돌을 전면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당시 적대적이었던 가톨릭계 프랑스 공주와 결혼하며 개신교 중심의 의회에 처음부터 신임을 잃은 그는 첫 의회 소집부터 비난을 들어야 했고 결국 그는 2달 후 의회를 해산시켰다. 하지만 왕의 총애로 전권을 얻은 버킹엄 공작의 무리한 외교정책으로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하자 재정 문제가 다시 가중되어 찰스 1세는 1621년 의회 소집을 다시 한다. 하지만 의회의 강력한 반대로 재정확보는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버킹엄 공작의 살해로 인해 찰스 2세는 스스로 신체 위협을 느낀다. 그래서 3차 의회를 소집하여 <권리 청원>을 받아들인다.


<권리청원>은 의회의 동의 없이 과세를 할 수 없으며 이유 없는 구속을 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강력한 왕권에 대항하는 최초의 시민법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11년간 찰스 1세는 의회의 동의 없이 자의적으로 과세했으며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이는 의회의 반란을 초래하였다.


1640년 11월에 소집된 잉글랜드의 의회는 국왕의 종교정책과 과세정책을 비판하자 국왕은 무력으로 의회를 제압하고자 했다. 이에 의회도 스스로의 방어를 위해 군대를 모집함으로써 1642년 8월 20일 내전이 발생하였다. 내전은 초기에 왕당파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으나 점차 스코틀랜드군의 지원을 얻은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가 승리한다. 이후 찰스 1세는 1649년 1월 반역죄로 왕으로서는 처음으로 목이 잘린 채 처형된다.


이후 영국은 1688년 <명예혁명>으로 네덜란드에 있던 메리 2세와 네덜란드 총독인 윌리엄 3세 부부가 영국의 왕으로 군림하면서 <권리장전>을  발표한다. 이는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선언문과 함께 입헌군주제를 선포하면서 의회민주주의를 발판 삼아 19세기 대영제국의 토대를 만들어낸다.    


이 작품에서 찰스 1세는 거대한 말을 타고 압도적인 기세로 숲을 나와 밝은 곳으로 행진하고 있다. 당시 말을 탄 채 자신의 위용을 자랑하는 기마상은 군주들이 주로 쓰는 홍보방법으로 거친 말을 다스리는 승마술은 간접적으로 왕의 통치력을 보여준다.


1637년, 찰스 1세는 권력의 정상에 서 있었다. 자신의 권리를 신이 부여했다고 생각한 그는 의회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나라를 이끌어 갔다. 하지만 5년 뒤 그의 죽음을 암시하듯 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우울함이 보인다.


이후 영국의 청교도 혁명은 미국의 독립전쟁으로 이어지고 이후 프랑스의 대혁명으로 이어지며 근대의 도래를 알렸다. 19세기 프랑스혁명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 정신으로 전 유럽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를 기반으로 미술사에서는 기존의 왕실과 귀족 중심의 바로크와 로코코 미술에 반하여 혁명적 영웅에 바탕을 두는 신고전주의가 발생하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영웅적인 신의 모습을 가져오는 신고전의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그렸으며 규범과 규칙을 중시했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화가가 앵그르로 그의 작품을 감상하자.


 


무아트시에 부인의 초상


그림 속 주인공은 1821년에 태어나 1842년 무아트시에와 결혼한 이네스 드 푸코로가 1897년 사망했다. 앵그르는 그녀가 결혼한 직후 초상화를 의뢰받았지만 거절했다. 그런데 그녀를 소개받은 자리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앵그르의 뛰어난 소묘 실력과 세련미를 통해 그녀의 팔과 어깨 윤곽선 안의 살집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녀의 드레스와 보석 그리고 방의 가구는 그녀가 살던 제2 제정 시기에 상류층이 누리던 부유함을 전해준다. 앵그르는 이 평범한 인간에게서 찾은 풍요의 여신상을 몇 년간 꾸준히 수정하고 다듬어 7년 만인 1856년에야 완성했다. 세부적 묘사가 전체 디자인에 완전히 종속한 이 작품에서 앵그르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


19세기 영국에서 출발한 산업혁명은 유럽 경제와 생활양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며 집에서 실을 내어 옷을 만들며 살았다.


하지만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의 힘에 의해 대규모 생산이 이루어지자 사회는 산업사회로 급변했다. 이로 인해 영국은 엄청난 부를 쌓았으며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당시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실주의 회화 작품이 <진공펌프 실험>이다.    


 


진공펌프 실험


이 작품이 그려진 18세기는 이성과 계몽의 시대로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작품 속 중앙 상단에 있는 커다란 유리 공속에는 하얀 앵무새가 들어 있다. 유리공 왼쪽에 서 있는 과학자는 유리 공과 연결되어 있는 펌프를 통해 공안에 들어 있는 공기를 빼내려고 하고 있다.


유리공 안의 공기가 빠져나가고 진공 상태가 되면 새는 산소 부족으로 죽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상식으로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18세기에 이 같은 실험은 마치 마술처럼 보였다. 그래서 당시 과학자는 손 끝 하나 안 대고 새를 죽이는 마법사이기도 했다. 그래서 과학자의 복장은 마법사의 복장을 하고 있다.


과학자를 둘러싸고 있는 아이와 어른들 그리고 연인과 철학자는 제각기 진지한 모습으로 과학자의 실험을 지켜보고 있다. 두 아이들은 새가 곧 죽을까 봐 울 것 같은 표정이며 새장을 든 소년은 과연 이 새장이 쓸모 없어질지 궁금해하며 새장을 들고 있다. 화면 왼편에 앉아있는 또 다른 소년은 실험에 완전히 빠져든 듯,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실험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화면 오른편의 나이 든 남자는 과학의 힘으로 하나의 생명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려운 듯 차마 시선을 유리공에 주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산업혁명의 대규모 산업사회는 엄청난 부롸 함께 인간의 소외와 불평등을 가져왔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잃어버린 개인의 삶을 찾기 위해 도시를 떠나 자연을 찾았다.


자연 속에서 잃어버린 향수와 낭만을 노래하며 개인이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를 희망했다. 낭만주의 작품은 이 시대를 반증하고 있다.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작가인 윌리엄 터너와 컨스터블의 작품을 감상하자  



전함 테메레르


1805년 프랑스와 겨룬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은 큰 승리를 거둔다. 이 작품은 그때 활약한 전함이 그 수명을 다해 증기선에 끌려 선박 처리장으로 운반되는 무상함을 담았다. 작품에서 장대한 일몰과 낡은 전함을 조화시켜 향수와 상실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쟁과 평화, 삶과 죽음, 과거와 미래가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서정시처럼 깊게  펼쳐지고 있다.


터너는 그림의 내용보다 순수한 색채와 빛의 변화에 몰두한 화가로,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에게 필요한 색채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소재를 선택해 그림을 그렸다.



건초 마차


1821년 런던에서 그린 이 작품은 컨스터블이 〈한낮의 풍경〉이라고 이름 붙였으나 그의 친구에 의해 〈건초 마차〉로 정해졌다. 이 그림은 컨스터블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할 뿐 아니라 영국 회화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에 속한다. 그림 배경은 컨스터블의 고향에 있는 플랫 퍼드 방앗간 근처 풍경으로, 왼쪽에 보이는 집이 마지막 여생을 보내려고 윌리로 치라는 농부에게서 빌린 집이다.


작품 중앙에 무더운 여름날 평화로운 전원에서 말을 쉬게 하려고 마차를 세우는 모습에서 마부의 말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작품 상단에 있는 하늘은 밝은 빛을 쏟아내고 있고 그 반사로 인한 그늘과 조화를 이루며 빛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컨스터블은 무궁무진하게 피어나는 구름과 하늘 그리고 빛을 통해 산업사회에서 소외받고 힘들던 시민들에게 자연을 통하여 평온한 마음과 힐링을 주고 있다.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회화는 왕과 귀족이 아닌 시민들을 위해 존재하며 사실주의와 낭만주의를 거쳐 인상파로 나아간다. 이는 카메라의 발명으로 사실을 재현하는 회화가 더 이상 힘을 가질 수 없으며 화가의 마음을 그리는 화가가 되어야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당시 근대 문명의 산물인 기차와 물감의 발견으로 근교로 나가서 마음껏 자연의 빛을 그릴 수 있는 인상파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인상파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고흐의 <해바라기>를 들 수 있다.



해바라기


유난히 태양을 좋아한 고흐는 네덜란드에서 파리로 다시 파리에서 아를로 내려왔다. 아를로 내려온 고흐는 뜻을 함께하는 화가들과 새로운 사조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무명인 그와 함께 뜻을 같이 하려는 화가들은 없었다. 고흐는 할 수 없이 파리에서 화구상을 하는 동생 테오에게 그가 존경하던 고갱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부탁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갱이 아를로 내려온다는 연락을 받자 고흐는 마음이 들떠 고갱이 머무를 방을 꾸미려고 이 작품을 그렸다. 이 작품을 그릴 당시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해바라기는 빨리 시들기 때문에
온종일 해바라기만을 그린다.



그래서 그림 속에서 해바라기가 여러 송이가 보이지만 어떤 꽃은 생생하고 어떤 꽃은 시들어 있다. 고흐는 해바라기를 그릴 때 선보다는 색채를 중요시했다. 그는 색채에 그의 마음을 담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술적 이견과 성격적 불화로 고갱이 떠나자 격분한 고흐는 자기 귀를 잘라 창녀에게 주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다.


근대 미술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살았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화가들은 당시 사람들이 살면서 가졌던 기쁨과 슬픔 그리고 행복과 불행을 그렸다. 이러한 모습들은 오늘날 하루에도 수 천 개가 올라오는 SNS의 사진과 사연 같다. 시대를 뛰어넘는 아름다움에 대한 교감과 소통 그리고 삶과 역사에 대한 성찰과 혜안이 담긴  미술은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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