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봉기 Aug 24. 2020

로트렉

삶은 충분히 슬프다.


삶은 충분히 슬프다.
그래서 그것을 사랑스럽고 화려하게 그려야 한다.
바로 그래서 파랑색과 빨강색이 필요하다.


그녀들은 늘 슬펐고 술에 취해 있을 때만 웃었다. 하지만 로트렉은 그녀들의 삶을 진심으로 이해했다. 그녀들의 삶이 바로 자신의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숙명적인 소외와 슬픔이었기 때문이다.


로트렉은 몽마르트 언덕 아래의 사창가에 살았다. 그리고 그는 그 곳의 여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녀들의 작은 비밀이나 질투마저도 공유했다. 그는 그녀들이 몸단장을 하거나 목욕을 할 때도 같이 있었고 침실에 들어가 같이 잠들기도 했다.


로트렉은 지독한 고독과 고통이 자신의 영혼을 사로잡을 때면 이 소외된 여인들을 찾았다. 그녀들은 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주고 다정하게 위로해 주었다. 로트렉과 여인들은 하나의 가족이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몸단장>이다.



여인은 윗옷을 벗은 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다.

그 어디에도 섹시함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오히려 앙상한 팔과 등 그리고 다리에서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짐작하게 한다. 여인은 이제 몸단장을 하고 무대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화려한 조명과 흥겨운 음악속에 웃음을 팔며 춤추어야 한다. 여인은 지금 그런 자신을 보면서 긴 탄식을 하고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구도와 뛰어난 소묘력 그리고 빠른 붓 놀림으로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로트렉은 이작품에서 어떤 과장도 없이 진실한 인간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화면 가득히 여인에 대한 슬픔과 따뜻한 위로가 돋보인다. 어쩌면 화가 자신의 고독과 위로 받고 싶은 마음을 그렸을지도 모른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은 1864년 남프랑스에 있는 알비의 유복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귀하게 자랐지만 부모의 근친혼 때문에 <농축 이골증>에 걸렸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친 사촌간이었다.


<농축 이골증> 은 극히 드문 유전병으로 뼈가 잘 부스러지고 키가 자라지 않는 병이다. 1867년 남동생이 태어났지만 1년도 살지 못하자 부모들은 합의 이혼한다. 당시 로트렉의 나이는 4세였다. 부모의 이혼 후 로트렉은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를 왕래하며 나름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점점 병이 발현돼 14세에는 지팡이 없이 걷기 힘든 몸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거실에서 일어나려다 넘어진 로트레크는 왼쪽 다리가 부러지고 이마저도 회복이 되기도 전에 또다시 낙마사고를 입어 오른쪽 다리가 부러진다. 이후 그는 키가 152cm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았으며 격한 야외활동은 하지 못했다. 당시 유전병을 몰랐던 아버지는 로트렉을 수치스럽게 생각해 만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는 병 치료를 위해 그를 데리고 여기저기를 다녔다. 이때부터 그림은 로트렉의 유일한 희망이자 위로가 되었다.  


1882년 로트렉은 파리로 가서 미술 공부를 시작하였다. 파리에서 그는 존경하던 드가와 마네를 만났으며 일본 판화에도 관심을 가졌다. 또한 무명시절의 반 고흐를 만나 그의 작품을 좋아하며 좋은 관계를 맺었다.


1885년부터는 로트렉은 몽마르트에 자신의 작업실을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그 특유의 단순하면서도 뛰어난 필치로 극장과 술집, 카바레, 서커스, 매춘부들의 하류생활 등을 소재로 하여 자신의 작품을 그렸다. 당시 그의 작품을 본 드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드디어 우리편이 하나 더 늘었다.


하지만 30대 이후 알코올중독으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1899년에는 3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하였다. 입원 중에도 그림 그리기를 계속하였으나 37세의 나이로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생애를 마쳤다. 그가 어머니에게 마지막 남긴 말은 죽는 것도 굉장히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불운하고 짧은 삶을 살았던 로트렉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은 <물랭루즈에서의 춤>이다.


빨간 풍차라는 뜻의 물랭루주는 에펠 탑이 세워지던 해에 개장한 카바레로 당시 파리 사교계의 거점으로 돈과 권력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이곳을 찾는 여자들은 기품 있는 모자와 화려한 옷으로 한껏 멋을 부렸고 남자들은 멋진 중절모에 단정한 옷차림으로 가벼운 지팡이를 들었다.


물랭루즈가 오픈한 지 2년후인 1891년에 흥행사 지드렐은 새로운 공연물을 위해 로트렉에게 포스터를 부탁하였다. 로트렉은 이미 물랑루즈의 단골이었고 그곳을 테마로 작품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지드렐이 무명의 로트렉에게 포스터를 맡긴다는 것은 상당히 대담한 결정이었다.


물랭루즈가 오픈 한 이래 물랭루즈의 포스터는 인기판화가 세레가 맡고 있었다. 당시 세레가 그린 화려하고 달콤한 포스터는 대중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1890년부터 포스터가 애호가들에 의해 점차 예술적 작품으로 인정받으며 단지 홍보수단이 아니라 감상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1889년과 1890년에 파리에서 두 차례에 걸쳐 열린 세레의 포스터 전람회가 크게 호평을 받았다.


당시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 포스터가 일반 대중들에게 잠깐 동안이라도 화려한 꿈을 주고 있었다. 자신의 포스터가 세레의  포스터와 비교될 수 밖에 없음을 안 로트렉은 셰레의 달콤하고 화려한 양식과는 달리 날카로운 현실 관찰과 석판제작의 특색을 살린 대담한 구성으로 포스터를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보통의 여자들은 발목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치마를 번쩍 들어 올리는 캉캉 춤을 춘다는 로트렉의 포스터는 파리의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다.


  

작품을 보면 맨 위에는 물랭루주라는 글씨가 세 번 연속 적혀 있다. 그 아래로 빨간 스타킹을 신은 여인이 치마 속이 다 보이게 오른쪽 다리를 들어 캉캉 춤을 추고 있다. 남들이야 보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춤을 추고 있는 이 여인은 물랭루주의 메인 댄서인 라 굴뤼이다.


라 굴뤼는 먹보라는 뜻으로 당시 그녀가 손님이 주는 술을 너무 많이 먹어 붙여진 애칭이다. 이곳에서 댄서로 몇 년의 전성기를 보낸 그녀는 카지노에서 꽃을 팔았고, 레슬링 선수로, 조련사로 일하다가 말년에는 사창가의 청소부로 전락해 외롭게 죽었다.


다시 작품으로 와서 포스터 앞에 클로즈업 된 어두운 실루엣의 남자는 물랭주의 댄스 스타 발라탱이다. 당시 그가 얼마나 유연하고 춤 솜씨가 좋았던지 <뼈 없는 발랑탱씨> 라고 불리었다. 화면 곳곳에 보이는 노란 덩어리는 가스등을 표현한 것으로 이로인해 밤새워 놀 수 있다는 의미를 상징한다.


포스터를 종합하면 물랭루즈에 오면 밤새도록 춤을 추며 당시 최고의 댄스 스타인 라 굴뤼와 발랑탱의 춤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빠트리지 않아야 할 로트렉의 또 다른 작품은 <침대에서>이다.


침대 시트 밖으로 얼굴만 내놓고 마주보며 편안하게 누워 있는 두 여성은 짧은 머리를 하고 있다. 당시 파리 여성들 사이에는 틀어 올린 긴 머리가 유행한 것을 감안하면 작품 속 여성들의 짧은 머리는 이들이 매춘부라는 것을 상징한다.


여성 둘이 함께 침대에 있는 것을 보아 두 여성은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로트렉은 다양한 형태의 사랑도 화폭에 담기를 주저하지 않았는데 사랑을 나누는 여인들에게서도 예술적 영감을 찾았다.


작가의 이전글 런던 내셔널 갤러리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