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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Sep 07. 2020

벨베데레 궁전 1

클림트

빈 중앙역에서 걸어서 10분만 가면 <전망 좋은 건물>이라는 뜻을 가진 벨베데레 궁전이 나온다. 궁전은 1697년 사보이의 왕자 오이겐이 지었지만 1752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일한 여왕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이 건물을 사들였다.


프랑스혁명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딸인 마리 테레즈가 이 곳에 머물며 지냈다. 궁전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사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이다. 사라예보에서 그가 암살당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이 되었다


벨베데레 궁전은 중간에 정원을 두고 상하로 위치해 각각 상궁과 하궁으로 불린다. 현재 상궁은 현대 미술관으로 하궁은 바로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관 중의 하나인 이 곳을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이유는 클림트의 <키스> 때문이다. <키스>는 공항에서부터 시작하여 시내 곳곳에 그 이미지가 넘쳐날 정도로 명실상부한 빈의 마스코트이다.


<키스>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벨베데레 궁전의 상궁 바로 위에 있는 매표소로 가야 한다. 여기서 상궁과 하궁을 모두 볼 수 있는 통합 입장권보다는 클림트의 <키스>가 있는 상궁 입장권만 구입하는 것이 좋다. 하궁은 상궁과 많이 떨어져 있는 데다가 특별한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


표를 구입하고 미술관으로 입장하면 화려한 바로크식 궁전의 로비가 나온다. 정면에 보이는 계단을 통하여 2층으로 올라가면 <키스>를 위한 특별전시관이 바로 나타난다.


은은한 조명에 작품의 황금색을 강조하기 위해 검은색 배경을 한 특별 전시관은 오직 <키스> 만을 위해 존재한다.



작품을 보면 한 쌍의 연인이 온갖 색의 꽃들이 만연한 정원 끝 절벽에서 무릎을 꿇고 키스하고 있다. 복잡한 의미나 상징성 없이 단순히 남녀가 하나가 되어 육감적인 키스를 하는 황홀한 장면이다. 남자의 손을 잡고 있는 여성의 손가락이 안으로 오그라들어 지금 여성이 사랑의 무아지경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키스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계속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연인들을 둘러싼 화려한 장식으로 눈길이 옮겨 간다.


화면 가득히 금비가 내리고 있다.  


금비 속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두 여인들의 머리는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남자는 검은색 무늬가 들어 있는 사각형 옷을 입고 있고 여자는 무수한 원형에 짙은 붉은색과 검은색이 혼합된 무늬가 들어 있는 옷을 입고 있다.


클림트는 이 작품을 완성하면서 내용만큼 작품을 장식하는데 더욱 많은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작품에서 클림트는 세상의 모든 근심과 불안 그리고 부조리와 모순도 두 여인의 감각적인 사랑 앞에서 모두 사라지고 찬란한 기쁨과 아름다움만 남는다고 주장한다.


클림트가 살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유럽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강력한 국가로 당시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는 1848년부터 1916년까지 68년간 제국을 다스렸다.


이 시기 프랑스나 영국 등 유럽 각국은 시민 혁명을 거치며 근대로 나아가고 있었으나 유일하게 비엔나는 제국의 수도로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바로크 시대에 갇혀 있었다. 이후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위기를 느낀 프란츠 요제프는 빈 도시를 정비한다는 명목으로 도심 주위로 큰 원을 그리며 도로를 내고 도로 주변으로 바로크 시대의 웅장한 극장과 의사당 그리고 궁전 등을 건립하며 시민들이 화려한 건축과 예술에 빠져 살기를 원했다.   


어려서부터 가난한 금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난 클림트는 당시 미술전문학교에 들어가 공부 중이었는데 황제의 웅장한 건물과 화려한 내부 장식의 주문이 학교로 쏟아져 들어오자 교수님을 도와 작업을 하며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졸업 후 클림트는 <쿤스틀러>라는 회사를 차려 많은 장식 회화를 선보이면서 탄탄대로의 길을 걸었다. 1890년에는 비엔나 구 국립 극장의 실내장식 작업으로 황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유럽에는 20세기의 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럽 각국은 세기말의 불안과 공포를 주제로 상징주의와 표현주의라는 새로운 회화를 선보이며 시대를 앞서 나아가기 시작했으며  빈에서는 프로이트가 나타나 정신분석학을 내놓으며 인간이 가지고 잠재의식과 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클림트는 건축 미술 조각에 관심이 있는 주위의 예술인들과 함께 새로운 시대의 예술에 관심이 없는 보수적인 빈의 예술계를 비판하며 그들과 분리되는 분리파를 만들어 빈을 새로운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 것을 주장한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회화와 건축으로 빈을 새롭게 장식하자는 생각으로 뭉쳤다. 그래서 <성스러운 봄>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화려한 장식이 아닌 심플한 예술회관을 만들어 각종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빈의 예술계의 혁신을 이끌어 갔다.


1894년 오스트리아 문교부의 의뢰를 받아 비엔나 대학 강당의 천장화를 의뢰받은 클림트는 철학과 법학 그리고 의학의 제목으로 천장화를 완성했다.


하지만 문교부를 비롯한 대학 측은 클림트의 작품을 거부했다. 작품이 너무 에로틱하며 작품 속 내용들이 모두 기존 학문이 불필요하다는 식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의학에서 의학이 아무리 발전하여도 인간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법학에서는 법이 있어도 인간의 본질적 무질서를 막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당시 빈의 비평가로부터 변태 성욕자의 무절제한 작품이라는 비난이 끊이지 않자, 지금까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던 클림트는 이 작품들이야말로 성스러운 제단에 바칠 유일한 작품들이라고 이야기하며 작품들을 철수시킨다.


이후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천장화의 <철학>이 금상을 받고 다른 작품 역시 로댕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찬사를 받으면서 그는 입지는 더욱 굳건해졌다.  


너무나 비극적이고 너무나 성스러운 작품이다


비엔나 분리파가 지나치게 장식적인 면에 집착하자 1905년 분리파를 나온 클림트는 독자적인 예술세계로 나아간다. 1907년 옛날 동유럽의 수도였던 이탈리아 라벤나를 방문한 그는 비잔틴 미술의 화려한 금박 무늬에 감동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를 자신의 작품에 녹여내는데 이때부터 그의 최고 전성기인 황금시대를 연다. 이 시기 대표적인 작품이 <키스>와 <유디트>이다.   


유디트는 서양미술사에 획을 긋는 유명한 화가들인 미켈란젤로와 카라바조 그리고 렘브란트 등이 한 번씩은 소재로 사용한 성경 속 이야기이다.


유디트는 유대를 포위한 아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와 하룻밤을 보낸 뒤 그의 목을 베어 민족을 구했다는 전설 속의 여인이다. 클림트의 <유디트>를 보면 다른 작품에서처럼 영웅의 모습은 사라지고 유디트의 몽환적이고 에로틱한 얼굴이 연출되고 있다.


사각 진 얼굴 위로 음란한 시선과 유혹하는 듯한 붉은 입술 그리고 무심한 표정과는 달리 그녀의 왼손에 들려있는 잘린 목이 섬뜩함을 준다. 여성의 성을 무기로 남성의 폭력성을 이겨내는 클림트의 <유디트>는 남성 안에 여성이 있고 여성 안에 남성이 있는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과 세기말적인 혼란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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