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매치기> 단상

로베르 브레송

by tout va b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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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탐정영화가 아니다. 작가는 이미지와 소리로써, 스스로의 나약함 때문에 소매치기의 유혹에 빠져 좌절해 가는 한 청년의 악몽을 그리고 있다. 오직 낯선 통로를 통한 이러한 행위가 결코 서로를 알지도 못했을 두 영혼을 맺어줄 것이다.”


표면에서 내면으로


영화의 시작과 함께 떠오르는 자막이다. 이미 명백하게 밝히듯 이 영화에는 탐정영화가 가지는 복잡한 추론의 과정이나 그것을 방해하는 장애물들, 그리고 치밀한 복선과 극적인 반전들을 찾아볼 수 없다. 소매치기가 보여줄 수 있는 드라마적인 요소가 모두 배제되어있다. 단지 일기와 독백으로 한 소매치기의 행위들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말하는 자는 행동하지 않고 행동하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행동한다” 첫 장면의 일기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주인공 미셸은 심리적 갈등이나 긴장감 없이 무표정하게 행동할 뿐이고 카메라는 그를 마치 기록영화처럼 표면적으로 기록할 뿐이다. 기록영화가 -물질을 통해 정신으로-비 기록영화적인 목표들에의 도달을 원한다면 브레송에게서는 표면의 기록이 곧 내면으로의 이행이 되는 것이다.


심리소설의 극치라고 알려진 도스토예프스키의“죄 와 벌”이 영화의 원작이지만 영화는 심리주의적 접근을 아예 차단하고 있다. 시각적인 영상으로 가득차 있다는 베르나노스의 소설“시골사제의 일기”를 영화로 옮기면서 브레송은 영화에 주어질 소설 속의 회화적 이미지를 완전히 제거하면서 주인공의 주변에 대한 냉혹한 관찰로 일관한다. 반면 “죄와 벌”이라는 심리분석과 내면의 묘사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주인공의 일상에 마치 기록영화처럼 접근하면서 존재 혹은 모델에 대한 탐구를 진행한다. 트뤼포의 “작가정책”에서 언급된 것도 기존 프랑스 영화의 문학적 세습에 반하는 영화에 대한 자의식 때문일 것이다. 주제와 스타일에서 매우 엄격한 감독인 브레송은 영화에서의 연극적 특성이나 허구의 리얼리즘, 환타지, 완결된 내러티브나 플롯들을 철저히 배격하면서 금욕주의적 영화작업으로 일관했다. 그가 “씨네마”와 변별되는 용어로 사용하는 “씨네마토그라프”는 바로 그의 엄숙주의와 금욕적인 영화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파멸


소매치기는 그의 일관된 주제라고 할 수 있는 파멸, 속죄, 구원이라는 종교적 테마 안에 있다. 미셸은 경마장에서의 최초의 소매치기가 성공하자 그 돈으로 어머니에게서 훔친 돈을 갚는다. 우연히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를 하는 한 남자를 발견하고 그는 본격적인 소매치기가 된다. 그가 정확히 무슨 이유로 소매치기가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죄의식에 번민하거나 불안에 떨지도 않는다. 그저 주변을 살피고 자신의 손을 세심하게 움직일 뿐이다. 그는 점점 대범해지고 능숙해져간다. 이러한 범죄의 행위 속에서 그의 손은 자유를 획득한다.


이미지


클로즈업된 손들의 연속편집이 인물의 얼굴대신 정감을 극대화시킨다. 베르히만의 말을 빌리면“우리들 작업의 시작은 인간의 얼굴이다”라고 했지만 브레송에게서는 손 혹은 인체의 다른 부분들이며 급기야는 그 유명한 비어있는 공간이 된다. 손과 인체의 부분들의 연속적인 연결이 공간들을 촉각적으로 만들면서 정감을 발생시킨다. 클로즈업이 공간을 축출하면서 이미지를 포화상태에 놓는 것에 비해 이제 정감은 (얼굴)클로즈업에 의존하거나 클로즈업이 공간을 축출하지도 않고 공간 속에서 직접 보여진다.(들루즈, 영화1). 그의 손이나 신체의 여러 부분들은 범죄행위 속에서 파멸이 가져다주는 야릇한 쾌락을 맛보고 거기서 구원을 찾는 주인공의 정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들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가 외출하거나 기차에 올라 소매치기를 할 때 보여지는 것은 다리에서 무릎으로 다시 손으로 그리고 얼굴로 차례로 보여지거나 상이한 각 부분들이다. 이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의미가 획득되지만 중요한 것은 직접적으로 정서를 동반하지 않는 신체부분들이 공간 속에서 연결됨으로써 사물과 공간자체가 정감을 띠게되는 것이다. 브레송에게서 중요한 것은 한 장면 내의 아름다움이나 조화, 즉 화면 자체의 완결성이 아니라 그 부분들의 연결이다. “회화가 내게 가르쳐준 것은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아니라 필요한 이미지를 만들라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브레송의 화면들은 고립시킬 때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가 이 영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유사편집의 예들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손들의 움직임, 신문, 편지봉투, 지갑 등등.


구원


미셸은 어머니를 간호했던 이웃집 여자 쟌느를 만나지만 그들은 쉽게 서로에게 다가서지 못한다. 계속되는 범죄행위들에서 위기를 맞는 미셸은 외국으로 도피하고 소매치기는 계속된다. 그는 다시 파리에 돌아오고 쟌느를 만나서 사랑을 느끼게 되고 진정한 구원을 위해서는 속죄가 필요함을 깨닫는다. 그는 다시 처음의 경마장으로 향하고 결국 붙잡힌다. 감옥에서 그는 쟌느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은 얼마나 방황하며 다녔던가” 감옥의 창살, 마치 십자가들을 사이고 두고 두 남녀는 사랑을 말하게 된다. 쟌느의 사랑이 속죄와 구원에 이르게 한 것이다. 사랑을 통한 구원.

미디움 숏의 전략


영화의 전편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이미지는 정적인 미디움 숏으로 일관하고 있다. 미디움 숏은 배우의 몸짓이나 신체언어를 포착하면서도 얼굴표정의 미묘한 변화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이미지로써 영화와 tv를 통틀어 많이 사용되고 있다. 브레송은 소매치기의 미디움 숏들을 사용하여 인물의 행위를 억제함으로써 극적인 상황을 배제하고 얼굴클로즈업의 극단적인 정서적 몰입도 차단하고 있다. 카메라는 최대한 객관적인 이미지들을 구축하기 위해 움직임을 자제한다. 관객으로 하여금 동화가 아니고 관찰과 사유로 인도하면서 인간존재에 대한 심오한 탐구를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극적인 감정의 고저를 상세히 서술하지 않고 인생이 어떠한 것인가를 사람들로 하여금 느끼도록 해주고 싶다” 브레송의 진술이다. 파멸에서 구원으로 가는 극적인 내러티브가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다. 브레송의 드라마투르기는 바로 탈드라마화에 있다.


중복되는 나래이션


첫 장면에서 일기를 쓰는 미셸의 손이 보여지고 동시에 미셸의 음성이 쓰여진 것을 읽는다. 우리는 문자를 통해서 그리고 미셸의 음성을 통해서 두 번 정보를 전달받는다. 그리고 은행로비에 가는 장면에서는 인쇄된 글과 말, 시각적 이미지로써 동일한 사건을 세 번에 걸쳐 전달받는다.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기록에 적합한 양식인 일기와 독백이 시청각적 이미지들과 결합되는 이러한 중복은 브레송 영화의 엄격한 스타일로써 극적인 요소의 배격을 통한 거리 두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이러한 중복적인 화법은 브레송의 영화적 욕망과 연결되어있다. 종교적인 주제와 엄숙주의 속에서 인간 내면의 심층을 드러내는 씨네마토그라프를 위한 독특한 장치가 된다. 일상의 표면들만을 기록하는 감독은 영화사에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의 창작 스타일로 굳어진다면 이것 역시 씨네마가 된다. 이것을 방지하는 것이 바로 중복적인 나래이션으로써 자신의 영화가 스타일로 굳어지지 않고 현실에 대한 냉혹한 시선을 견지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리


클로즈업된 손과 마찬가지로 소리 역시 클로즈업된다. “사운드가 이미지를 대신할 수 있을 때는 그 이미지를 자르거나 거기서 의미를 제거하라. 귀는 내부에 더 수월하게 향하고, 반면 눈은 외부를 향하는 속성이 있다.” 브레송에게서 소리는 이지미와는 독립적인 지위를 지닌다. 시각적 이미지에 곁들여지거나 그것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 그 자체가 시각적 이미지를 대체하기도 한다. 인간 내면의 심층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이 일상의 표면들을 클로즈업으로 기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리 역시 내면으로 들어가기 위한 방법으로 소리의 클로즈업을 사용한다. 소매치기에서의 소리들은 지극히 정제되어있다. 실외 혹은 거리의 소음들은 자연 음들이지만 선택적으로 들린다. 발자국 소리, 차량소음, 사람들의 말소리들은 현실적이기보다는 작위적으로 들리지만 관객은 화면에 보여지는 것 이상의 소리를 듣는다. 화면 밖의 소리들. 냉혹한 현실의 기록은 눈으로 보여지는 것과 귀로 들리는 것 모두의 기록이다. 소매치기의 귀에 들리는 것은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지하철의 열차소음, 지나치는 사람들의 소음들이다. 우리는 소매치기를 보고있지만 소리는 그 화면에 있지 않다. 이것이 외 화면의 확장이라거나 디에제시스적 공간의 표현이 아니고 주인공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이 영화의 명확한 의도대로 불안정한 감정들 속에서 살아가는 소매치기 미셸, 범죄를 저지르는 한 인간존재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시각적인 이미지들과 소리들로써 표현하고 있다.인간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라는 신학적인 주제를 속죄와 사랑으로 풀어내고 있지만 그의 영화작업 역시 구도자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이야기를 드라마화해서 허구적이고 세속적인 현실을 기계적으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포착하기 위한 고행의 자세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브레송의 불가능한 욕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지와 소리를 사용하는 브레송의 스타일은 분명 영화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과 함께 영화의 지평을 넓혔고 이후 누벨바그의 작가들부터 우리의 홍상수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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