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위의 세계 / 정영문
‘익살스런 라마’를 닮아간다는 소설의 화자. 나는 익살스러운 라마를 본 적 없으니 소설 표지 뒷면의 작가 사진을 보며 ‘어두운 과거를 떠올릴 때의 어떤 동물의 눈’으로 ‘평생 혼란을 떨치지 못하는’ 시선을 지닌 익살스러운 라마를 상상했고 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를 상상했다.
이 사진 속의 남자와 그가 구축한 ‘어떤 작위의 세계’ 속 상상하는 화자가 동일인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떻든, 재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빚어낸 샌프란시스코 표류기이자 체류기에서 이 둘은 서로의 상상에 개입하며 끈질기고 덧없는 상상을 이어간다. 나는 이 둘의 상상에 또 하나의 잡스러운 상상을 추가한다. 이것은 실체 없는 관념의 장광설이자 맥락 없이 지겹고 무의미한, 일방적인 수다였다가 마지막엔 뜬구름 같은 한탄으로 마무리할지도 모른다.
‘재미있어서는 안 된다는 어떤 풍조가 있는 한국 사회’지만 무의미와 존재의 근거 없음, 권태나 우울, 불안만큼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한없이 재미없는 것으로, 지극히 자폐적인 나르시시즘으로 치부되곤 한다. 객관적 합리성의 세계에 닿지 않는 이야기들은 무용한 사변일 뿐이다. 한국 사회는 재미 공동체보다는 의미 공동체라 할만하다.
이 소설이 한 해에 문학상 3개를 거머쥐었다는 것은 ‘유희에 대한 어떤 끈질긴 욕망’으로 자폐적 무의미를 사회적 의미로 전환했다는 문학계의 승인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이는 약간 재미있는 일에 속하고, 무의미를 인식하는 곳에서 의미가 출현한다는 아주 재미없지만 조금 의미 있는, 의미 공동체적 발상이라는 상상도 덧붙여본다.
무, 무의미, 존재의 근거 없음, 재미를 위한 상상, 복수로서의 소설 쓰기(치유와 위로가 아니다). 지겹도록(!)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런 단어들을 이 소설의 헤시태그로 붙인다면 참 상당히 그럴듯해 보이겠군. ‘우울과 절망과 권태의 능력이야말로 지력의 핵심’이라는 자의 지루하고 뜬구름 같은 사변, 무의미에 대한 강박, 근거 없는 존재로서의 기이한 유희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나 역시 지겹도록(!) 반복적으로 자문하는 어떤 질문, 삶이란 무엇인가(혹은 산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나)? 라는 다소 ‘진부하지만 어엿한’ 질문 때문이다.
이 소설의 화자는 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없다. 그의 일상에는 욕설도, 분노도, 싸움도 없다. 누군가와 맞선다면 늘 지는 쪽을 택한다. 심지어 섹스에도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물론 ‘자지’와 ‘엉덩이’에 대한 상당히 독창적이며 부질없는 이론은 가지고 있다.
주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시간을 보내는 그는 무척 무료하고 주로 우울하다. 목에 난 종기나 지나가는 누군가 뱉은 침이 바지에 튀는 것에 약간의 불만을 품고 그것을 자주 울분으로 표현하지만, 특별히 화를 내거나 흥분하는 일 없이 울분에 가만히 잠겨 있는 것으로 울분을 잠재운다.
‘모든 의지는 잔인하고 가혹할 뿐이다.’
현실에 대한 불만, 특히 재미없는 사람들과 너무 열심히 뭔가를 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한국 사회에 대한 불만은 있지만, 세계 전체 대한 불신이나 이성과 역사에 대한 총체적 회의, 불의와 위선에 대한 분노와 슬픔은 지니지 않은 듯하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 느껴야 하는 것임에도 그것을 어떤 생각의 처리를 통해’ 느끼려 하고, 언제나 적절한 비유를 찾는 데 고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뭔가에 오만 정이 다 떨어진 것 같았는데 그 뭔가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다.
삶에 실제적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허기’이며 이를 ‘허기의 사실주의’라 부르는 이 화자 혹은 작가는 의미와 무관하게 어떻든 살고 있다.
사는 것에 의미가 없다는 말은 일종의 관용어라 할 만하다. 의지와 상관없이 우연히 던져진 존재, 어디로도 갈 수 없고, 꼼짝없이 갇혀 피치 못할 죽음을 맞는 존재가 바로 인간 아니냐고, 저 건조하면서 우울하고, 냉혹하면서도 낭만적인 철학자 하이데거가 물었던가.
인간에게는 단지 죽음에 대한 자각만 있을 뿐이고, 남는 건 시간의 고문이며, 거기에 불안이 찾아드는 건 당연하다, 고 말하면 거참 상당히 관념적이군, 이런 소리를 들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데도, 그러거나 말거나, 어떻든 확실하게 존재하는 불안을 떨치려 흔히 그러듯 과거에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하고 미래를 향해 자신을 용감히 투척하여 의미를 생성하려던 이 철학자는 결국 나치즘으로 뛰어들었던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에는 아들이 죽음으로 구한 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 그냥 그저 그런, 아니 조금 모자란 사람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어머니가 있다. 매년 아들의 기일에 그를 오게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고통을 주기 위해서.
살아남은 자들에겐 시간이 고문이다. 만약 한 사람의 희생이 세상을 더 나쁜 쪽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책임을 져야 하는 걸까, 라는 의미 없는 생각은 접어 두고.
삶의 무의미와 존재의 근거 없음을 견딜 수 없는 이 화자. 매일 공포와 암담함과 참담함을 느끼는 하루, 매일 최후를 맞는 것 같은 이 느낌. 권태와 우울은 일시적인 무력감이나 절망, 혹은 나태함에서 오지 않는다는 화자의 생각은 언뜻 보들레르를 떠올리게 하지만 결코 보들레르의 독기를 지니고 있지 않다. ‘삶 자체가 억지 같은 그러한 삶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살게 될 거라는, 아니,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거라는 그리고 그것을 알 수도 있다는 데 있는 것 같았다’라는 자각만이 삶에 유일한 긴장을 부여한다.
죽느냐 사느냐. 소설 속 화자는 많은 시간 자살과 추락, 죽음에 대해 상상한다. 죽음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니 뭐라 할 말도 없다. 완벽한 무의미. '재미있어 보이기조차 한 상상'으로 죽음에 대해서도 의미 없는 복수를 한다. 이 삶과 죽음의 긴장 역시 상상의 반복으로 이어진다.
이제 근거 없는 생과 미지의 죽음 사이에 시간이 발생했다. 아니 시간이 남았다. ‘삶은 결국 남은 시간을 어떻게 허비하는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소설의 화자에게는 시간을 죽이는 것이 유일한 삶의 방식이 된다. 주로 술을 마시고 옥수수 알을 세듯 시간을 허비하는 것일 뿐인데 그러자면 지루하고 재미없으니 스스로 재미있다고 여기는 구름과 바람, 안개, 나무, 동물들, 주정뱅이들에 대해서 쓸모없는 상상을 이어가며 홀로 수다를 떤다. 그에게는 에스트라공 혹은 블라디미르 같은 친구는 없다.
시간을 허비하기 위해 상상하는 것은 당연히 의미가 없는 상상이어야 한다. 화자가 아이들과 동물들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상상을 즐기는 그의 유아적 세계관 때문이 아니라 동물과 아이들에게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이 의미 없다고 느낄수록 그 삶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시간을 잊기 위해서. 시간을 인식하는 순간 고통은 시작된다.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칠수록 무의미하다 느끼고, 또 그 시간만큼 의미에 집착하는 악순환. 우리가 사랑에 빠지거나 돈을 벌거나 섹스를 하거나 술을 마시는 일상의 행위는 의미 없으므로 집착하고 집착함으로써 의미를 갖게 되는 시간의 일들이기도 하다.
화자의 집착은 소설 쓰기와 기이한 상상이다. 그에게 이것은 피와 정념이 없는 뜨뜻미지근하게 처절한 복수다. 무의미한 삶에는 무의미한 상상으로, ‘어떤 말 할 수 없는 극심한 지겨움을 길게 표현’하는 것으로 어떤 작위의 세계를 구축해나간다. 그리고 더욱더 무의미하고 기이한 상상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신기하게 소설 한 편이 끝나 있고 어이없어한다. 이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삶의 끝에 도달할 것이고 어이없어할 것처럼. 무의미, 존재의 근거 없음의 영원한 순환으로 빠져든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던가? 그러나 문제는 비극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소설의 화자는 짐 모리슨을 떠올리며 만나는 사람마다 아메리카 인디언을 보았는지 묻는다. 짐 모리슨 유년의 원초적인 기억으로 자리 잡은 ‘늘 울고 있는 인디언’, ‘고속도로 위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인디언 가족’은 오랜 추방의 역사를 지닌 채 살아남은 원주민 가족이 결국 길 위에서 비명횡사하는 비극적인 이야기는 마치 죽음의 불공평과 무자비함을 떠올린다. 깊은 우울로 침잠하게 하는 것 외에 어디로도 갈 곳이 없는 이야기.
소설 <어떤 작위의 세계>는 인간 존재의 비극적 ‘뜬구름’을 뜬구름 잡듯 이야기하며 무의미한 의미로 채워진 객관적 실재에 복수를 가한다, 라고 말하는 건 참으로 재미없고 지겹다.
어떻든 나는 이 복수극을 장장 보름에 걸쳐 읽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도 현실의 넘쳐나는 온갖 비극들, 미얀마에서, 아프리카에서, 중동에서, 미국에서, 유럽에서 일어났고, 내 주변에서도 역시 불의한 죽음, 또는 일상의 자연스러운(?) 죽음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이 모든 죽음 자체가 잔혹한 비극이고 그래서 더욱더 삶은 무의미하고 존재는 근거 없다고, 결국 죽고 말 것을,,,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분노와 울분보다는 ‘허기의 사실주의’에 빠져 자주 먹었고 또 먹은 만큼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주로 잠을 잤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죽음에 대해서 쉽사리 떠올리지 않는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일수록 현재의 활력 덕택에 이 죽음이나 소멸에 대해서 거리를 둔다. 혹은 성공적인 삶이 아닐지라도 오래된 모종의 책임감으로 인해 자기 죽음은 못마땅한 것으로 여긴다. 이와 전혀 상관없이 세포는 생성보다는 소멸에 더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오히려 현재의 삶에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며 더욱더 빠르게 소멸로 향한다. 죽어라 하고 죽을 둥 말 둥 의미를 찾다 죽는 것을 의미 있게 여기면서. 반면 죽음은 늘 우리의 의지 밖에서 잔혹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렇다면 폭력도, 불의한 죽음도, 모두 다 용인해야 하는가? 삶과 죽음이 그런 거라고? 이것이야말로 무의미가, 죽음이 우리에게 가하는 복수다. 용인할만한 죽음이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대중의 비난마저 열광의 표출이 된 미셸 우엘벡이 그의 소설 <어느 섬의 가능성>에서 밝힌 ‘주체가 필멸할 운명일 때 윤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던 불멸의 전망은 탐욕의 또 다른 이름 아닐까. 결국 우리는 윤리적 명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벗어났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무용하고 기이한 상상이나 소설 쓰기로 언제나 우리를 덮칠 준비를 하는 죽음에 대한 가엾은 복수, 죽음이 우리를 해치우기 전에 우리가 죽음을 해치우겠다는 필사적인 복수밖에 없다. 생은 언제나 불길한 긴장 속에 존재한다. 이 ‘불길함의 정체’를 어찌해야 하나?
'어떤 작위의 세계가' 단순히 ‘실재 세계의 객관적 합리성에 대한 반성적 세계’가 아니라는 것은 바로 이 불길함 때문이다. 실재 세계를 무너뜨리고 한 개인이 세계의 중심인 절대적 무의미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시도, 그것을 문학이나 혹은 예술이라 해도 좋다. 이 원대한 시도는 바로 그 불길함으로 인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어떤 작위의 세계” 역시 결국 침묵과 상상의 멈춤으로 그 패배를 기록한다.
이 불길함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돈과 사랑과 섹스의 트라이포드가 이 불길함의 징후마저 감추는 재미없는 한국 사회에서, “죽음이 후세의 아들들에게 전해질 것”이라는 누군가의 지겨운 망상과 수 천 년 이래 종교가 약속했고 지금은 과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영생과 불멸의 전망을 믿으며 일순간 흔적 없이 사라지는 무의미의 복수, 죽음의 복수를 기다리는 것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는 것일까.
과학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실재하는 비극조차 자신의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반복하고 재생산하는 현대의 문학은 범람하는 치유와 위로의 문학적 수사를 상품으로 개발한 산업의 게임이라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곳에서 위대한 문학예술의 열망이 죽음에 저항하리라는 믿음은 역시 덧없다. 아니 뻘쭘하다.
<어떤 작위의 세계>의 필연적 실패는 존재 그 자체가 유일한 저항이라는 진부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결론으로 인도한다. 영생과 불멸의 전망도 없는 나에게 남겨진 질문은 단 하나.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것일 텐데, 나는 어떤 방식으로 죽음에 저항할 것인가.
-인간 조건에 절망하는 자는 겁쟁이이며 그것에 희망을 품은 자는 바보다- A.Camus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