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보가 낯선에서 고스트 독까지
그의 모든 영화의 주제는 미국의 정체성이다. <데드맨> 이후 이루어진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은 무엇인가? 그의 과거, 그의 폭력성, 토착문화에 대한 그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것이 그의 영화작업의 화두가 될 것이다.
최초의 영화, 즉 그의 졸업작품이라고 알려진 <영원한 휴가>는 한 청년의 대도시 뒷골목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실험영화를 만들던 전력이 보여주듯 이 영화는 생소하다. 대도시의 모습이 그의 카메라를 통과하면서 초현실적으로 그려진다. 도시는 항상 이상한 종소리들을 동반하고 주인공이 찾아간 폐허 더미 속에선 전쟁의 소음 속에서 유령 같은 사람들과 대화한다. 물론 자무쉬의 모든 영화가 낯설긴 마찬가지이다. 뉴욕의 대도시는 우리 눈에 익은 도시가 아니다. 텅 빈 골목들을 휘도는 황량한 바람들만이 있다. 찰리 파커처럼 빨리 죽는 것도 괜찮다고 말하는 청년은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를 읽는다. 그가 하는 일은 주로 황량한 거리를 헤매는, 정확히 말해서 산책하는 것이다.
이 산책은 자무쉬 영화의 주요한 특징이 된다. 대도시의 뒷골목을 가로지르는 카메라가 그의 모든 영화에 등장한다. 뉴욕에 도착한 에베가 거닐던 뒷골목에서부터 고스트 독이 차를 타고 밤거리를 지날 때의 그것까지. 고다르는 이러한 산책, 곧 트래블링은 작가의 이데올로기적 발언이라고 했다. 즉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것을 의식적으로 관객에게 보도록 강제하고 있다.
자무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미국, 그것은 살풍경한 그런 곳이다. 거대한 고층의 숲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피가 튀기는 어두운 뒷골목도 아니다. 신문지와 쓰레기들만이 바람에 날리는 황량하고 삭막한 곳이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청년은 폐허와 같은 도시를 걷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정신병원에 갇힌 자신의 어머니부터, 거리에서 만난 미친 여자와 남자, 극장에서 마주친 흑인, 아마도 미국의 성공한 역사 속에 실패한 사람들이다. 너무 앞서간 색소폰 연주자에 대한 흑인의 이야기를 들은 청년이 마지막에 선택한 것은 미국을 떠나 파리로 가는 것이다. 뭔가 새로운 희망을 찾으러 가는 것 같지만 막상 떠나려는 항구에서 마주친 색소폰 부는 남자는 파리에서 막 귀국한 남자이다. 거기에서 여기로 여기에서 거기로의 이야기라고 밝힌 것처럼 어디에도 희망은 없어 보인다.
미국을 바라보는 자무쉬의 시선은 모두 이방인의 시선이다. 영원한 휴가 중인 청년, 천국보다 낯선 윌리와 에바, 미스터리 트레인을 타고 내슈빌을 찾은 일본인 남녀, 우연히 감옥에 갇힌 이탈리아인, 세계 대도시의 택시 기사, 서부의 끝으로 간 윌리엄 블레이크, 사무라이 고스트 독. 이들은 모두 이방인이다. 아니, 미국의 역사 자체가 이방인의 역사가 아닌가. 인디언 원주민 위에 폭력적으로 세워진 역사는 <데드맨>에서 냉철하게 인식되고 있다. <데드맨> 이전의 영화에서 자무쉬는 특유의 냉소적인 유머로 미국을 바라본다.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감독 중의 하나는 버스터 키튼이다. 키튼의 유머는 채플린의 유머와 변별된다. 비극 속의 희극, 혹은 희극 속의 비극, 아니면 희극이자 비극이 키튼의 유머라고 할 수 있다.
<천국보다 낯선>의 유머는 통상 블랙 유머라고 불린다. 인물들의 상황과 그들의 우연한 반응이 유머를 자아낸다. 헝가리 출신 윌리는 실패한 이주민으로 할 일 없이 지낸다. 그는 극도로 자시의 모국어를 혐오하고 자신이 진짜 미국인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는 자기 뿌리를 애써 잘라내고 있었고 그런 와중에 헝가리에서 사촌 에베가 찾아온다. 그녀가 도착한 케네디 공항은 황량한 사막처럼 보인다. 미국은 천국이 아니었다. 복고풍의 옷차림과 모자, 인물들의 툭툭 던지는 대사, 우연히 벌어지는 엇갈린 상황들이 서글픈 웃음을 짓게 한다. 브레송과 고다르, 오즈, 니콜라스 레이, 빔 벤더스의 영향 속에서 자무쉬는 자신의 서사화법을 개발한다. <천국보다 낯선>은 뉴욕에서부터 얼음 도시 클리블랜드를 지나 따뜻한 남쪽 바닷가 플로리다로 향하는 세 명의 여정이다.
그들은 천국을 찾아 나섰지만, 그들이 마주한 곳은 쓸쓸하고 적막한 바닷가이다. 세상의 끝에 선 그들은 우연 속에서 각자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세상 어디에도 천국은 없다는 것이 이제 명백해진다. 미국은 그들에게 너무 가혹하고 그들은 떠난다.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일상의 사소한 시간은 축약되거나 제거된다. 소통되지 않는 언어 속에서 의사소통은 좌절되거나 회피된다. 미국적인 삶은 윌리의 손바닥만 한 아파트에서 보인다. 낮에는 도박이나 경마로 지내고 밤에는 인스턴트식품과 맥주를 곁들인 미식축구 관람. 또 이 무식한 게임을 이해할 수 없는 에바는 윌리가 사다 준 유행하는 옷을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미국은 우스운 나라가 된다.
이 영화는 다른 행성에서 온 듯하다. 그러나 또한 편 매우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친숙한 낯섦. 혹은 낯섦의 친숙함. 영화 속의 일상은 아주 진부하며 공허하다. 마치 일상이 천국보다 더 낯설게 되기 위해서 그의 현재성 혹은 실재성을 잃어버린 듯하다. 공허하고 진부한 일상은 화면 속에서 3차원적인 공간이 아니고 심도가 부재한 평면적 이미지로 드러난다. 윌리가 저녁 식사를 하며 텔레비전을 보는 장면은 완벽하게 폐쇄되어 있다. 그곳에서는 시간이나 공간, 의미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 자체가 폐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황량한 뒷골목의 낡고 지저분한 건물들과 쓰레기 속에서 텔레비전과 함께 고립되어 있다. 현대는 미국의 주변부 인물들에게서 보이고 자무쉬의 카메라는 무의미한 일상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아벨페라라의 작업방식이 주류의 전통적인 영화 양식을 사용해서 극히 반미국적인 영화들을 만들어내지만, 자무쉬는 오즈나 고다르, 벤더스의 영향 아래 현대영화의 양식에 접근해 있다. 타란티노의 저지대 삶에 대한 영화적 시간성과 장르적 관심에서 멀리 있다. 그러나 자무쉬는 세 명의 탈주범을 그린 <Down by low>를 마지막으로 자기 영화의 전기를 맞는다. <Down by low>는 이탈리아 코미디언 로베르토 베니니가 등장하면서 전작들, <영원한 휴가>, <천국보다 낯선>에서 보인 산책, 방랑, 탈출의 꿈들과 연장선상에서 미국적인 감성과 유럽적인 문화가 만나는 하나의 가교를 놓게 된다. 부유하는 일상과 방랑하는 인물들 사이로 유쾌한 이탈리아인이 끼어들고 감옥 탈출을 동행한다. 이 이탈리안이 두 명의 건조하고 냉소적인 인물들에게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은 분명하다.
이전의 삼부작에서 보여준 단순함의 미학과 흑백의 화면들은 이후의 <미스터리 트레인>과 <나이트 온 어쓰>부터는 다른 인물들과 다른 시간으로 이동하면서 조금씩 화려해진 화면과 칼라가 등장한다. 현대의 미국을 좀 더 잘 보기 위해서 인지도 모른다. 로큰롤의 왕 엘비스가 살아있다는 기사를 보고 그를 만나기 위해 내슈빌을 찾은 일본인 남녀를 통해 미국적 전통이란 것에 눈을 잠시 돌린다. 그러나 결국 엘비스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이트 온 어쓰>는 세계 각국 대도시의 밤거리를 달리는 택시 기사들이 등장해서 각자의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현대는 어디에서든 모두 단절되어 있고 삶은 우연과 냉소로 가득 차 있다.
카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나이트 온 어쓰> 이후 <데드맨>까지 삼 년간의 긴 휴식 동안 자신이 소진되어 있음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는 그동안 주변의 사람들을 관찰하며 사람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며 몇 편의 단편을 제작하던 그가 근 10여 년 전부터 가지고 다니던 수첩의 메모들을 영화화하기로 한다. <데드맨>은 그가 말한 대로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영화이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는 차가운 냉소가 아니고 진지한 성찰로 미국에 접근하는 것이다. 일단 미국의 정체성에 접근하기 위해서 그는 뜻밖에도 서부영화라는 장르를 택한다. 그 안에 미국의 전통과 신화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무쉬는 아주 색다른 서부영화를 만들기로 작정한다. 일자리를 구하러 동부의 클리블랜드에서 서부의 끝으로 온 소심하고 연약한 윌리엄 블레이크는 우연히 공장주이자 마을의 지배자 디킨슨의 아들을 살해하고 쫓기면서 비정한 살인자, 총잡이의 신화를 창조한다.
자무쉬가 존 포드보다는 하워드 혹스의 서부극을 좋아한다고 밝혔듯이 그는 영웅을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 전통적이지 않았다. 기존 웨스턴 장르의 관습들인 총잡이, 인디언, 바운티 헌터가 등장하고 총격과 추격, 결투가 등장하지만, 양상은 전혀 다르게 진행된다. 총격전은 느닷없이 일어나고 엉겁결에 쏜 총탄에 사람이 죽어 나간다. 선과 악에 대한 명확한 구분도 사라지고 자신을 위해 하는 원인 제공자에 대한 복수도 존재하지 않는다. 선과 악에 대한 이분법만이 아니라 서부극의 근저에 놓인 야만과 문명에 대한 대립도 해체한다. 그리고 더욱이 문명화가 시작되는 공장 지역의 야만성들이 폭로되면서 가장 미국적인 전통과 신화 위에 기초한 웨스턴 장르가 변질되기에 이른다. 미국 사회에 대한 반성으로 택한 양식이 웨스턴이라면 그 장르 역시 성찰에 포함되어야 함은 마땅하다. 장르의 자기반성과 전복, 더 나아가 장르를 발생시킨 미국 사회에 대한 발언이 곧 <데드맨>이다.
미국 사회가 폭력에 기초한 사회라고 단언하지만, 그 폭력은 두 가지 양상으로 드러난다. 공장주 디킨슨의 야만적인 폭력과 윌리엄 블레이크가 힘겹게 자신을 지켜가는 과정 속의 폭력이 그것이다. 미국은 이 두 힘 간의 지난한 결투 속에서 건설된다.
사경을 헤매며 쫓기는 블레이크는 인디언 마을로 들어가서 미국의 신비스러운 토착문화에 접하게 되고 초월적인 세계로의 여행을 준비한다. 노바디가 블레이크를 카누에 띄워 보내면서 블레이크는 존재의 다른 차원으로 진입해 가는 것이다. 동시에 물의 이미지를 통해 그가 원래 출발했던 그 지점으로 회귀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몽환적인 여정”은 자무쉬의 다른 영화에서도 공통으로 보이는 하나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제자리로 돌아온 색소폰 주자, 헝가리로 떠난 윌리, <Down by low>의 마지막에 보이는 두 갈래의 길 위에 각각 선 두 남자, 비둘기가 되어버린 고스트 독 등은 모두 일종의 원점으로의 회귀가 된다.
그의 최근작 <Gost dog>은 전작의 웨스턴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필름누아르의 양식을 채택한다. 마피아와 살인 청부업자가 등장하고 청소가 이루어지지만 황당하게도 청부업자인 주인공을 이끄는 것은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이다. 자무쉬의 모든 영화에 등장하는 트래블링은 여전하고 초기 삼부작의 변두리 거리의 풍경도 낯익다. 마피아 보스들은 텔레비전 만화영화의 열렬한 시청자들이거나 랩음악을 능숙하게 따라 부른다. 세상이 많이 변한 것이다. 첨단장치를 이용해 차를 절도하고 빈틈없이 임무를 완수하는 전문적인 킬러는 건물의 옥상에서 비둘기를 돌보며 산다. 첫 장면에서 비행하며 어두운 도시를 가로지르다가 주인공의 옥상으로 날아드는 비둘기는 곧 일본에서 건너온 사무라이의 혼령인 듯하다. 그는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하고 주군에게 충성을 다짐하며 비둘기 통신을 하는 고전적인 미국 사무라이이다. 현대의 미국에 대한 사유를 하기에 가장 적절한 양식인 것처럼 보이는 이 장르는 자체가 전복적이고 혁신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자무쉬의 개인적 선호가 작용한 것처럼 보인다. 개인과 집단의 대결, 충성과 배신이라는 누아르의 전형적인 구조를 가지지만 인물들의 설정은 전통적인 필름누아르에서 벗어나 있다. 전통적인 누아르의 인물들이 거대한 조직이나 거스를 수 없는 운명적인 상황 앞에서 좌절하며 그려나가는 암울한 정서를 대변한다면 고스트 독의 사무라이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 흑인 사무라이의 길은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그리고 주군에게 충성하고 배신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 목이 잘려 나가도 반드시 복수는 실행된다는 것이다. “인생은 한낱 꿈에 불과하다”라는 금언 속에서 킬러는 초연한 구도자의 모습을 유지한다. 배신이 난무하는 누아르의 인물들이 현대 미국 사회를 건설했다면 그 이면에는 고스트 독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충성을 다한 중간보스는 유일하게 조직에서 살아남아 킬러를 살해하고 새로운 보스가 된다. 조상이 다른 흑인 킬러와 늙은 마피아가 죽음과 동시에 한 시대의 불꽃이 꺼져간다. 이 흑인 킬러는 타락하고 추한 백인사회에 대한 응징자이자 초월적인 존재로서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낸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흑인과 마을의 소녀에게 킬러가 남긴 유산이다. “한 시대의 정신은 인간이 되돌릴 수 없다. 그것의 소멸은 세상의 종말을 의미한다. 백 년 전 세상으로 되돌리고 싶어도 이는 불가능하다. 결국 각 세대의 노력만이 최선이다”
자무쉬의 영화작업은 끊임없이 자기 뿌리를 확인하는 과정이 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집요하게 탐구하는 것이고 또 동시에 그러한 과정은 영화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초기와는 다르게 영화에 대한 자기 반영적 탐구가 현재 진행 중이다.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