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땐 이렇게
사라진 동사
소설 이런 문장이 있었다. «Elle sourit, à peine.» 직역하면 "그녀는 미소 지었다, 겨우." 정도가 된다. 그런데 이 문장의 핵심은 'à peine'라는 부사구에 있다. '겨우', '간신히', '거의 ~않게'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미소가 너무 작아서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 "그녀는 겨우 미소 지었다"라고 옮겼다. 하지만 읽어보니 어딘가 어색했다. '겨우'라는 단어가 한국어에서는 힘겨움의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기 때문이다. "그녀는 살짝 미소 지었다"는 또 너무 가볍고 명랑했다.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도 뭔가 달랐다. 희미함은 번진 것이지, 작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사흘을 그 문장 하나에 머물렀다. 결국 "그녀의 입술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로 풀었다. 단어 하나 대신 입술의 움직임 자체를 묘사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원문의 동사 'sourire'가 사라지는 대신, 독자가 그 미소를 눈앞에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살리고 싶었다. 편집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동의라고 믿기로 했다.
이런 순간들이 번역을 힘들게 만들지만, 동시에 가장 매혹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두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발견하는 순간, 나는 언어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그 자체임을 새삼 깨닫는다.
번역가에게 편집자의 전화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의미한다.
칭찬이거나, 수정 요청이거나. 대부분은 후자다.
존댓말의 무게
어느 해 겨울, 나는 19세기 희곡을 번역하고 있었다.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데, 프랑스어 원문에는 'vous'와 'tu'의 구분이 있었다. 'vous'는 공식적인 2인칭, 'tu'는 친밀한 2인칭이다. 초반에 두 주인공은 서로 'vous'를 썼고, 중반을 지나며 조용히 'tu'로 넘어갔다. 관계의 변화를 작가가 말하지 않고 대명사 하나로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한국어에는 이 구분이 없다. 그 대신 존댓말과 반말이 있다. 나는 두 인물이 서로 존댓말을 쓰다가 반말로 전환하는 시점을 원문의 'vous→tu' 전환 시점에 맞추기로 했다. 그런데 편집자가 전화를 했다. "12장에서 갑자기 반말로 바뀌는 게 어색하지 않나요?" 나는 그것이 의도적 선택임을 설명했다. 원문에서 대명사가 바뀌는 지점이 바로 거기라고.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편집자가 말했다.
"독자들이 알아챌까요?"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눈치채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느끼면 됩니다."
책이 나온 뒤 한 독자가 리뷰를 남겼다.
"12장부터 두 사람이 달라 보였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리뷰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번역가의 슬럼프
슬럼프는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특히 긴 작업이 끝난 직후가 위험하다. 몇 달을 한 작품 안에 살다가 갑자기 그 세계에서 나오면, 잠깐 동안 어느 언어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하는 기분이 든다. 한번은 번역을 마친 소설의 교정지를 받아든 날, 내가 쓴 문장들이 모두 낯설어 보인 적이 있다. 분명히 내가 고르고 고른 단어들인데, 한 줄도 내 것 같지 않았다. 그날 나는 책상 앞에 두 시간을 앉아 있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동네를 한 바퀴 걸었다.
걷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낯섦 자체가 번역의 본질에 가까운 것 아닐까. 번역가는 남의 언어로 남의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내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오히려 뭔가 잘못된 것일지 모른다. 낯섦을 유지하면서도 독자에게 닿게 하는 것, 그것이 번역의 윤리 같은 것이 아닐까.
끝내 포기한 단어
가장 최근의 작업은 프랑스 현대 철학자의 에세이집이었다. 문학 번역과는 결이 달랐다. 개념어들이 촘촘하게 얽혀 있고, 한 단어의 선택이 논리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그중에 'pudeur'라는 단어가 있었다. 수치심, 정숙함, 부끄러움, 내밀함… 어느 하나로도 완전하지 않은 단어다. 저자는 이 단어를 단순한 감정이 아닌 타인을 향한 존중의 형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몇 주를 이 단어와 씨름했다. '수줍음'도 아니고 '수치'도 아니고 '내밀한 품위' 같은 말로 풀어써 보기도 했다.
결국 나는 그 단어의 한국어를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다.
(pudeur: 자신의 내면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태도. 타인의 시선 앞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조용한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