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55화
[대문 사진] 까미유 피사로가 그린 1902년 디에프 풍경, 디에프 시립 박물관
이제는 디에프를 떠나야만 할 시간이 되었다. 이번 답사의 마지막 여행지인 샤토 듀(Château d'Eu)로 향해 길을 떠날 때가 된 탓이다.
캄캄한 어둠의 숲 너머로 디에프 성채가 홀로 불타오르는 때, 나는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겼다. 왜 그들은 이곳에 왔을까? 그것도 신혼여행지로 왜 이 해안 도시를 선택했을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69년 8월 15일 코르스(코르시카)의 아작시오 마을에서 태어났다. 위로 형 조제프를 둔 차남이었다. 앞으로 그의 형제들이 줄지어 태어나 8남매의 가정에서 나폴레옹은 장남 조제프 다음이었다.
부친이었던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는 차남이었던 나폴레옹을 브뤼엔 군사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때 나이가 10살, 형 조제프 역시 부친의 바람대로 신학교에 들어갔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 15세를 알현한 부친으로서는 아들 둘을 한 명은 신부로 다른 한 명은 군인으로 키우리라 작심했다. 코르시카는 루이 16세에 의해 프랑스 영토로 편입되었고 나폴레오네 부에노파르타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 불려야 마땅했다.
당시 프랑스 상황에서는 장남은 성직자로 차남은 군인으로 키우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편이었다. 군사학교를 졸업한 뒤(군사학교 시절 아버지를 여의었다), 파리에 소재한 포병 군사학교였던 에콜 밀리테르(Ecole militaire)[1]에 입학한 나폴레옹은 학교를 졸업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고 하루빨리 군대에 배속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던 끝에 지휘관 시험에 합격하여 조기에 학교를 졸업했다.
군대에 배속된 나폴레옹은 그러나 대혁명 이후의 부패할 대로 부패한 군대 조직과 맞닥뜨렸다.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지옥과도 같은 프랑스 군대를 탈출하여 코르시카 독립운동을 이끌던 파울로 파스쿠아 산하의 무장 조직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자신의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목숨을 걸고 코르시카를 도망쳐 나와 프랑스 군대로 복귀했다. 하릴없이 부대에 매일 배송되던 일간지들을 정독하던 중에 프랑스의 모든 국사(國事)가 파리 7번지 빅토르 가에 위치한 과부 집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폴레옹은 남편을 여의고 홀로 살고 있는 조세핀 집 대문을 두드리기에 이른다.
조세핀은 부패한 정치군인의 아내였다. 대혁명 당시 남편이 단두대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재산이 압류 당하자 그녀는 하는 수없이 슬하의 남매를 키울 목적으로 당시 제1 통령이던 바레스의 정부가 된다. 그러고는 사교클럽을 개최하던 중에 어느 날 밤 포병 대위였던 나폴레옹을 만나게 된 것이다.
조세핀을 알게 된 나폴레옹은 승승장구했다. 마랭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마이너스 상황이던 프랑스 재정을 플러스로 전환시키면서 그의 인생도 대전환기에 들어섰다.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은 파리 치안 사령관을 거쳐 환호하는 국민의 신임을 받아 제3 통령에 입각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2 통령 마침내 바레스를 물리치고 제1 통령으로 올라섰다.
이어 1804년 5월 열화와 같은 국민의 성원을 한 몸에 받으면서 국회의 비준을 거쳐 황제가 되었다. 황제 대관식은 같은 해 12월 2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나폴레옹은 35살로 6살 연상이었던 조세핀은 41살이었다. 두 사람은 5년 전에 결혼식을 치른 상태였다. 나폴레옹은 조세핀의 전 남편 소생 아이들을 극진히 보살폈다. 아들 으젠을 친아들처럼 생각했고 딸 오르탕스를 친딸처럼 예뻐했지만 국민의 시선은 싸늘해지기만 했다.
왜냐면 두 사람 사이에 후사가 태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곳에서 아이가 생긴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황제의 정통성을 이을 후계자에 대한 갈망이 국민들 사이에서 싹튼 것 또한 그 한 원인이기도 했다.
국회는 드디어 국민의 열망을 받들어 나폴레옹과 조세핀을 이혼하게 만들고는 황제가 합스부르크의 공주였던 마리 루이즈와 재혼할 것을 명령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폴레옹은 조세핀을 애틋하게 여긴 탓에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딸인 오르탕스를 자신의 동생이자 보나파르트가의 4남인 루이에게 시집보냈다. 루이와 오르탕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3남에 해당하는 아이가 훗날 나폴레옹 3세가 되는 루이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은 새로운 황후 마리 루이즈와 신혼여행을 떠나 디에프에서 이틀간을 머물렀다. 이때 나폴레옹은 디에프가 항구로써 너무 빈약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인근의 불로뉴 쉬흐 메흐에서 건조되고 있는 영국 정벌을 위한 군함들이 드나들 기에는 항구가 너무 작고 수심이 낮았던 탓이다.
이런 황제의 관심으로 말미암아 당시 귀족사회 구성원들은 앞 다투어 디에프를 찾았다. 그 가운데 한 여인이 바로 조세핀의 딸이자 루이 보나파르트의 아내였던 오르탕스였다. 그녀가 디에프를 찾을 때마다 데리고 온 아이들 가운데 한 명이 또한 루이 나폴레옹이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어릴 적 어머니 손을 잡고 거닐던 디에프 항구 주변과 절벽 중턱에 자리 잡은 성채를 잊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디에프 앞바다를 늘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삼촌의 영광을 재현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 3세란 이름으로 황제가 되어 황후가 된 으제니와 함께 디에프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오늘날 디에프 앞바다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대로인 베흐됭 대로는 이때 건설되었으며,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해수욕장이 건설되었고 공원이 해안가에 조성된 것도 이때다. 해안가 공원과 잔디밭은 황후 으제니가 일일이 노트에 도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디에프의 비약적인 발전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폴레옹 3세는 이후로 디에프를 다시 찾지 않았다. 그가 관심을 기울인 곳은 대서양 북쪽이 아니라 이제는 대서양 남쪽 비아리츠였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황제로 집권할 동안 대서양 전 지역의 연안을 개발하고자 구상했을지도 모른다. 그 출발점이 디에프였다.
[1] 파리에 소재한 에꼴 밀리테르(군사학교)는 루이 15세가 귀족 자제들을 장교로 양성하기 위해 세운 포병 군사학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