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농

몽생미셸 가는 길 63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베르농의 동종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베르농(Vernon)에 이르는 915번 지방도로는 세느 강을 옆에 끼고 뻗어있는 전형적인 시골길이다. 세느 강 협곡에 중세 때 형성된 요새도시들처럼 베르농 역시 지정학적 요충지에 자리 잡았다.


베르농은 그 때문에 천 년 가까이를 전쟁에 시달리는 불운을 겪기도 했지만 21세기에 이 지역 역시 교통의 중심지로서 중요성이 날로 더해갔다. 베르농은 세느 강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선 단아한 기품을 지닌 도시다.


베르농 세느 강 우안


기욤(윌리엄)의 시대에 지어졌다가 필립 오귀스트에 의해 파괴되어 새로 축조된 세느 강 좌안의 동종과 함께 세느 강 우안으로는 정복왕 기욤의 아들 앙리 1세 보클레흐가 지은 동종이 또 하나 세워져 베르농은 세느 강 이쪽저쪽에 걸쳐있다. 이 중세도시는 12세기에 지어진 참사원교회(성모 마리아 성당)와 함께 전형적인 중세풍의 자취를 자랑하는 노르망디의 대표적인 도시가 되었다.


911년 바이킹의 우두머리 롤로와 프랑크 왕 샤를 3세 단순왕은 생 클레흐 쉬흐 엪트 조약을 통하여 베르농을 두 왕국의 경계로 삼았다. 베르농의 역사는 노르망디 공국과 프랑크 왕국의 경계도시로 시작되었다.


이후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몽고메리 장군이 베르농을 가로지르는 세느 강 다리를 건널 때까지 수없는 전란의 불길에 휩싸이는 불운함을 겪기도 했다. 전쟁의 상처는 도시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 아픔을 절절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클레망소 대교 옆 끊어진 다리 교각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오래된 물레방앗간이다. 그러하기에 이 꼴롱바쥬 형태로 지어진 초라한 방앗간 건물이 베르농의 랜드 마크로 자리 잡은 것이다.


베르농의 랜드마크 물레방앗간


방앗간 건물은 클레망소 대교로 말미암아 초라해 보이기는 하지만, 나름 기품이 있고 노르망디를 대표하는 꼴롱바쥬 건축물로써도 손색이 없다. 옆의 앙리 1세 보클레흐가 처음 세운 동종(요새)은 수없는 전란으로 무참히 파괴되었으나, 21세기 들어와서 다시 복원되는 행운을 얻어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세느 강가 성모 마리아 성당 옆에 차를 주차시키고는 인근의 알퐁스 조르쥬 푸랭 시립미술관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클로드 모네가 생전에 기증한 수련 작품이 걸려있다. 특이하게도 둥근 캔버스에 그린 작품으로 수련의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모네와 까미유 사이에서 태어난 장은 알리스의 딸과 결혼했는데 그 딸 역시 화가가 되었다. 그녀의 작품도 의붓아버지인 모네의 수련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이 작품 역시 모네의 딸이자 며느리였던 화가가 기증한 작품이다.


모네와 알리스의 동거는 프랑스 사회에서도 끔찍한 사건으로 회자된 스캔들 중의 스캔들이었다. 자신을 도와준 사람의 아내와 눈이 맞다니 우리 같았으면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었겠지만, 남편의 잦은 외출(외도)이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을 가깝게 만들었으며, 서로 다른 부모를 둔 아들과 딸은 또 한 몸을 이루고 요지경 집안인 것만큼은 분명한데, 애당초 두 부부가 한 집에서 살 때부터 운명은 시작되었다.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남편이 자주 집을 비우자 그 부인이었던 알리스는 이미 홀아비가 된 모네와 운명적으로 가까워지고 남편이 죽고 난 뒤에는 새 남자와 함께 지베르니로 이사 오고 두 사람의 관계는 어찌 보면 필연에 가까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세느 강 좌안 도심을 한 바퀴 돌아본 다음 다시 차를 몰고 세느 강을 건너뛴다. 여름을 이용하여 바캉스를 즐기는 북유럽 관광객들이 타고 온 페리 선박이 강변에 묶여있다. 페리를 타고 온 많은 여행객들은 지금 한창 모네의 정원을 누비고 있을 것이다. 대서양을 향해 도도히 흐르는 세느 강 좌안과 우안을 연결하는 다리는 모네의 친구이자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클레망소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클레망소는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프랑스의 국가영웅이자 국가원수다. 그래서 샹젤리제 대로 한가운데 지하철역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딴 샹젤리제 클레망소다. 영웅 중의 영웅은 베흐덩 전투에서 참호를 파고 독일군에 항전했던 페탱 원수이기는 하나 페탱은 제2차 세계대전당시 비시정부를 세워 독일에 협조한 죄로 전후에 지탄을 받아 공공의 적이 되는 바람에 클레망소가 그 상처뿐인 영광의 면류관을 안아 들었다.


민간인 포함하여 1천만 명 이상이 희생된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는 결과적으로 페탱의 베흐덩 지역에서의 지연작전에 더한 미군의 참전으로 인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이후로 친독정부를 세웠다는 이유로 말미암아 페탱은 몰락하고 클레망소가 새로이 주목받기에 이른 것이다.


샹젤리제 클레망소 지하철역 입구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자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샤를 드골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특유의 둥근 모자를 쓰고 훤칠한 키에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가는 포즈의 전신 조각상, 그의 발걸음은 대통령궁인 엘리제궁을 향하고 있다.


사실 프랑스 정치판은 좌우를 떠나 드골 이후의 제5공화국 대통령들만큼은 드골의 정치이념과 궤를 같이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거친 비유이긴 하지만, 그들 모두는 드골의 정치적 양아들이었던 셈이다. 일제하의 조선을 버리고 중국에 흘러 들어 동족을 대상으로 한 온갖 잔혹한 살인과 테러를 자행하던 인간쓰레기들의 집합소의 우두머리였던 자가 이승만 대신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면 해방 후 대한민국의 정치판은 어떻게 변질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좌파출신 대통령이었던 프랑수아 미테랑은 문학작품을 즐겨 읽었을 뿐만 아니라 작가들을 대통령 궁전인 엘리제 궁전에까지 불러들였다. 이와는 달리 클레망소는 화가인 클로드 모네와 막역한 사이였다. 파리에서 베르농을 관통하여 루앙에 이르는 기찻길 선로가 놓이자 제일 먼저 친구인 모네에게 달려가 철길이 놓였으니 지베르니에 한결 편하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고 너스레를 떨 만큼 두 사람은 친구이자 허물없는 사이였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클레망스 정부가 주문한 8폭의 대형 수련 작품들을 모네는 국가에 아무런 조건 없이 기증했다. 이유는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에 벌어진 보불전쟁당시 비겁하게 런던으로 도망친 것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마음에서라는 이유였다. 크기가 얼마나 큰지 작품을 기증받은 정부는 어디에다 작품을 전시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파리 오랑쥬리 미술관 계단 통로 벽에 걸어놓았다. [1]


다리 건너 물레방앗간이 한눈에 보이는 강변에 섰다. 세느 강 우안을 방어할 목적으로 세워진 동종은 앙리 1세 보클레흐가 지은 요새로 필립 오귀스트가 빼앗아 개축하여 노르망디 공국의 본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지만, 그 위용만큼은 사자왕 시대를 빼어 닮은 것처럼 견고해 보였다.


동서남북 방향으로 4개의 망루를 세워 세느 강으로 드나들던 적의 이동을 감시할 목적으로 세워진 동종은 베르농의 또 다른 자랑거리였다. 세느 강 협곡에 자리 잡은 탓에 도시를 한눈에 관측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 앞에 세느 강이 도도히 흐르고 강변에 고즈넉이 물레방앗간이 위태롭게 교각 위에 걸터앉아 있다. 원래는 강물을 이용하여 물레방아를 돌렸겠지만, 지금은 가옥만 남아 처음엔 무슨 용도로 지은 집인지 궁금하게 만들던 유적과도 같은 건물이다. 정오를 지난 시각에 기울어진 햇살을 받아 꼴롱바쥬 형태로 지어진 가옥은 한층 빛을 발한다.


동종과 물레방앗간


그러나 모네는 이 건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저 너머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 자리한 베르농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모네가 그림을 그렸음직한 장소라 여겨지는 다리 근처로 걸어가 보았다.


뿌연 안개에 싸인 모네의 베르농 풍경을 담은 그림과는 달리 여름 햇살에 눈부신 강 건너 풍경이 시야를 한껏 어지럽혔다.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너무 눈이 부셔서 나 역시 그림을 그려볼까 하는 생각을 단념하게 만들었다.


대신 사진을 한 컷 담았다. 쓸쓸해 보이기까지 한 모네의 풍경화와는 달리 파인더에 담긴 베르농의 풍경은 화사하고 생기가 넘쳐흘렀다. 백 년도 훌쩍 뛰어넘은 시간들이 세느 강을 통해 흐를 즈음 동양인 여행객의 손에는 붓 대신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세느 강 우안을 한 바퀴 돌아본 다음 미루나무 밑에 주차시킨 차로 되돌아와서 지베르니[2]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이제 세느 강이 멀어지면서 엪트 강이 나타날 차례였다. 그러나 그전에 모네의 정원에 이를 것이다.


수많은 여행객들이 오가는 길이라 도로 표지판도 산뜻하고 길은 반듯했다. 관광객들을 위한 꼬마열차까지 가세하여 베르농과 지베르니를 오갔다. 한 조그마한 농촌마을이 화가 한 사람에 의해 예술가의 마을로 탈바꿈한 것이 기적이었다면, 일군의 미국 화가들이 모네의 그림에 감명을 받아 이 시골구석까지 몰려와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창작활동을 펼친 것은 또 다른 기적에 해당했다.


실뱅 테쏭이나 페터 한트케처럼 처음엔 지베르니까지 걸어갈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차로 십 분이면 닿을 곳이라 처음 생각한 대로 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맘먹었다. 길은 단단했고 세느 강변의 미루나무들은 오후의 햇살에 그을려가고 있었다.






[1] 현재는 8폭의 대형작품들을 4점씩 모아 한데 전시하려고 아예 미술관을 뜯어고쳐 한 자리에 모아놓았다.


[2] 산 아래 세느 강과 엪트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들어선 지베르니(Giverny) 마을은 염소라는 말에서 마을이름이 파생하였다. 산언덕과 목초지에서 키우던 짐승이 염소였는지 마을이름은 가축이름과 관련이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