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

몽생미셸 가는 길 64화

by 오래된 타자기


클로드 모네는 1840년 11월 14일 파리에서 태어나 1926년 12월 5일 지베르니에서 사망할 때까지 평생 오로지 그림만 그리며 살았던 인상주의를 완성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5살 때 부모가 파리에서의 생활이 곤란했던지 르 아브르로 이사[1] 가는 바람에 파리가 아닌 르 아브르에서 성장한 모네는 특이하게도 캐리커처를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모네의 화업의 시작은 그렇듯 르 아브르의 저명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었다.


모네는 화가 으젠 부댕의 권유와 숙모의 도움으로 성공에의 유혹에 빠져 파리로 출발한다. 스위스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뒤 샤를 글뤼흐에게 사사받고 조한 바르톨트 종킨트를 만나고 알제리 보병연대에 입대하고 등등 중간중간 끊어진 활동에도 불구하고 모네는 옹플뢰르 해안을 그린 작품들로 주목받는다.


1866년 개최된 회화 조각 미술대전에 출품한 「녹색 옷을 입은 여인」을 통해서는 성공을 확신하기도 한다. 그림 속의 여인 까미유 동시외는 1870년 모네와 결혼했다. 그렇지만 이 시기가 모네에게 있어서 가장 불안정한 시기였다.


Claude Monet, La Femme à la robe verte (Camille Doncieux).jpeg 모네에게 처음으로 화가로서의 명성을 가져다 준 「녹색옷을 입은 여인」. 모델이 된 여인은 모네의 아내 까미유 동시외(Camille Doncieux)이다.


1870년 보불전쟁이 터지자 전쟁을 피해 런던으로 도망친 모네는 이후 네덜란드의 한적한 시골에서 도피생활을 이어간다.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모네는 화상 폴 뒤랑 뤼엘을 알게 되는데, 그를 통한 그림 판매는 앞으로 모네의 작품 활동에 주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1871년 파리로 돌아온 모네는 1874년 처음으로 개최된 인상주의자들의 미래전에 참가한다.


1876년 모네는 에른스트 오쉐데를 만난다. 이 모네의 후원자는 급속도로 몰락하고 말았는데, 1878년 후원자의 가족과 모네의 가족은 베르퇴이에 위치한 주택에서 함께 기거한다. 1879년 까미유가 암으로 저 세상으로 떠나자[2], 에른스트가 자주 집을 비운 사이 모네와 에른스트의 아내인 알리스 오쉐데는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이 시기에 모네는 세느 강 풍경을 집중적으로 그리면서 동시에 규칙적으로 새로운 풍경을 화폭에 담기 위하여 노르망디 해안으로 여행을 다녔다.


1883년에 이르러 모네는 까미유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과 오쉐데 가족과 함께 지베르니에 정착했다. 모네와 알리스 두 사람 다 수중에 모아놓은 돈은 없었다. 그림을 한두 점 팔아가면서 생활하고 있었던 두 사람은 주택구입은 엄두를 못 내고 대신 농가를 한 채 빌려 세를 살기 시작했다.


1890년에 이르러서야 세 들어 살던 집을 구입했다. 살아갈 걱정이 없게 된 시기가 바로 이때부터이며 앞으로 모네에게는 죽을 때까지 행운이 뒤따랐다. 지베르니로 이사하고 나서 모네는 지중해가의 코트다쥐르(Côte d'Azur)로 여행을 떠났다. 또한 대서양의 벨일 섬(Belle-Île-en-Mer)에 그림을 그리고자 잠시 체류하기도 했다.


1890년부터 모네는 회화 연작에 전념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모네는 하나의 모티프를 낮 동안의 서로 다른 시간대에 걸쳐 변화하는 형상을 화폭에 담고자 고심했다. 또한 하나의 모티프를 갖고 서로 다른 계절에 따른 모습을 화폭에 구현하고자 애썼다.


그는 때때로 단 하나의 모티프로 시간의 변화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띤 형상을 10점이나 제작하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의 연작은 밀짚더미를 필두로 미루나무 연작으로 성공을 거두고 나서 다시 루앙 대성당 연작으로 이어진 뒤, 런던 국회의사당 연작과 지베르니 정원에서 키운 수련 연작으로 나아갔다.


총 8점에 달하는 이 거대한 크기의 수련 연작은 원래 벽면 장식을 위해 프랑스 정부가 주문한 것이었는데, 모네는 작품을 완성한 뒤 기꺼이 국가에 이를 기증했다. 1903년부터는 모네는 오직 정원 일에만 집중하여 매달렸다. 1908년에는 베네치아로 가서 베네치아 풍경을 화폭에 담기도 했다. 그러나 연작의 형식은 아니었다.


말년에 알리스가 죽고 그 역시 과도한 작업으로 말미암아 백내장이 도져 시력을 잃고 고생하던 모네는 결국 폐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86세였다.


모네는 그가 그릴 사물을 처음엔 흐릿한 윤곽들로 제시하다가 화폭 전체로 확대하여 완벽하게 구현하곤 했다. 그는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그림을 몇 번이고 다시 고쳐 그렸다. 달리 이야기하자면, 그가 이미 표명한 바와 같이 아틀리에에 놓여있는 작품들 대부분은 이미 완성한 그림들이었다. 이미 완성한 그림들은 새로 시작할 그림들을 위한 모델이었던 셈이다.


모네의 성격은 까다롭고 예민했을 뿐만 아니라, 낙담한 경우엔 화를 버럭 내기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반면 모네는 그 어떠한 사물을 화폭에 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던 열정적으로 작품제작에 임했던 탁월한 화가였다. 모네는 재치 있게 자신의 생을 요약해서 들려주기도 했다.


“누가 나에 대해 말한다지요? 내 당신에게 나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나라는 사람은 오직 그림 그리는 일하고 정원 손질하는 것하고 꽃 돌보는 것 말고는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오.”


지베르니 정원에서의 클로드 모네 생전 모습




[1] 르 아브르로의 이사는 부친의 이복누이, 즉 화가였던 숙모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르 아브르의 상인과 결혼한 숙모는 재정적으로 넉넉했다. 숙모였던 마리 잔느 르꺄르드(Marie-Jeanne Lecadre)는 모네를 화가의 길로 나서게 도와준 인물이다.


Marie-Jeanne Lecadre.jpg 모네를 화가의 길로 인도한 숙모 마리 잔느 르꺄르드(Marie-Jeanne Lecadre).


[2] 화가는 죽어가는 아내를 병상에서 지켜보면서 그림을 그렸다. 「죽어가는 까미유」, 오르세 미술관.


Camille sur son lit de mort (1879).jpeg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죽어가는 까미유(Camille sur son lit de mort)」, 1879, 파리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