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62화
다시 길을 나설 시간이 되었다. 파리 16구의 아담한 정원 안에 위치한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에>에 걸려있는 수련 작품들을 다시 감상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보았던 신선하면서도 강렬했던 충격을 되풀이하기에도 갈 길 또한 너무 멀었다.
오르세 미술관 벽에 걸려있는 모네가 그린 수련은 푸른빛 색조에 보랏빛 색조를 적당히 혼합한 바탕색에다가 그 미묘한 색감 속에 마치 어둠 속에 빛이 솟아오르듯 저 물속 깊이에서 수련이 빛으로 떠오르는 형상으로 묘사한 그림으로 모네가 그린 수련들 가운데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나는 그 모네의 <수련>이 참으로 ‘인상적’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수련이라기보다는 빛에 가까웠고, 화가는 수련을 그린 게 아니라 빛을 그린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모네는 물 위에 떠있는, 빛을 받아 검은 물웅덩이 속에서 솟아오르는 연이파리와 꽃을 그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평소 나는 모네가 왜 수련을 반복하여 그렸는지에 대해 궁금하던 참이었다. 수련은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내 일찍이 부여 궁남지에서 보았던 수련은 잎도 크고 꽃봉오리도 탐스러운 그야말로 덩치가 큰 수련이었다.
전주의 덕진공원에서 본 연꽃도 그와 같았다. 연꽃 위에 정좌하고 계신 석가모니가 연상될 정도로 우리의 연잎은 크고 넓었다. 하지만 서양의 수련은 볼품도 없고 크기도 작을 뿐만 아니라 꽃봉오리도 우리 연꽃처럼 풍성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만일 수련 위에 서계신다면 연못에 퐁당 빠질 것만 같은 걱정이 들 정도로 서양의 수련은 작고 초라하면서 볼품조차 없었다. 볼품없는 수련을 말년에 그토록 애지중지 키우면서 그것도 모자라 쉼 없이 화폭에 담은 모네의 치열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하는 것이 그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강박관념이었다.
이제는 고정관념으로 굳어진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수없이 지베르니를 찾았다. 그때마다 동반한 사람들에게 묻기를 “인간 존재에 수련이 주는 의미는 뭘까요? 어떡하면 수련하고 인생을 함께 살 생각을 했을까요?”였다.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수련(睡蓮)은 말 그대로 빛이 사라지면 움츠러들고, 빛을 받으면 피어나는 꽃 아닌가요?”
티브이에 갇힌 오전, 오늘도 여행이란 과연 어떠한 것인가를 고민하던 순간이 다하자 서둘러 길을 떠날 준비를 한다. 모네의 수련정원이 있는 지베르니로 가기 위해서는 베르농을 거쳐가야만 한다.
파리에서 13번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망트 라 졸리를 지나서 오른쪽 길로 빠지면 베르농으로 향한 길이 나온다. 아직 나무이파리들이 여름빛을 띠고 있어서 베르농까지 이어진 진초록의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기분마저 상쾌해질 것이다. 지방도로로 들어서자마자 세느 강이 어느새 모습을 다시 드러내고 강을 끼고 쭉 이어진 길을 거슬러가다 보면 베르농에 다다를 것이다.
베르농(Vernon)은 ‘오리나무 텃밭’이란 뜻이다. 라틴어 학명으로 오리나무와 베르농은 유사관계를 이루고 있다. 실상 베르농 지역은 세느 강과 함께 습지대를 끼고 있어 이런 토양에서 자라기 좋은 나무가 오리나무인 것만은 틀림없다.
베르농과 지베르니는 세느 강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마주하고 있다. 베르농은 중세 때부터 번성했던 도시이지만, 지베르니는 예나 지금이나 자그마한 시골 농촌마을에 불과하다. 클로드 모네가 이 작은 마을에 정착했던 연유는 생활이 불안정하여 파리 인근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정주할 것을 결심하고는 장소를 찾던 중에 우연히 지베르니를 발견하면서였다.
전형적인 파리 태생으로 스스로 파리지엥이라 불러 달라했을 만큼 파리 시민이기를 바랐던 모네로서도 파리인근을 떠돌며 불안정하게 생활하는 것이 지극히 불안했을 것이다. 더구나 공장굴뚝마다 쏟아져 나오는 매캐한 연기와 겨울철 난방을 위해 벽난로 굴뚝을 타고 흘러나오는 연기에 더해 호주머니에 돈 한 푼 없던 젊은 시절 시끄럽고 번잡했던 도심은 그를 더욱 절망감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가 생 라자르 역 플랫폼을 연속해서 그린 것은 런던에 체류할 때 목격한 윌리엄 터너의 화풍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는 허공으로 퍼져나가는 증기와 증기에 의해 사물이 흐려지는 묘한 분위기를 화폭에 담고자 한 것이지 매캐한 연기를 그리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5살 때 대서양 해안도시인 르 아브르로 이사 가서 청년시절 다시 파리로 돌아온 모네였지만, 그가 다시 지베르니로 이사 온 때는 이미 아내 까미유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후원자였던 에흐네 오슈데(Ernest Hoschedé)의 아내 알리스 오슈데와 새 살림을 차린 뒤였다.
까미유가 난 두 아들과 알리스가 전 남편 사이에 난 여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월세 집을 전전하기에는 금전적으로 벅찼을 뿐만 아니라, 풍경화가이기도 했던 모네는 이미 도심생활에 지쳐가고 있었다.
여기저기를 떠돌던 모네가 베르농에 와서 엪트 강이 세느 강과 합류하는 지점인 지베르니를 발견하고는 마치 오아시스를 찾은 사람처럼 기뻐했던 것은 젊은 시절의 불안정한 삶 탓이었다.
참으로 열심히 작업하면서 꾸준히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했지만, 낙선이라는 불명예와 함께 ‘인상적’이라는 조롱 섞인 작품평이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그의 앞길을 가로막고 나서는 바람에 그림도 팔리지 않았을뿐더러 수중엔 돈 한 푼조차 없었다.
매번 몽펠리에 태생의 프레데릭 바질에게 돈을 빌려 써야 할 만큼 궁색한 삶을 살았던 모네로서는 자신의 모델이기도 했던 까미유 동시외(모네의 그림 「녹색 옷을 입은 여인(Femme en robe verte)」의 주인공)과 어렵사리 결혼했지만, 아내의 병을 치료할 만큼 그림도 팔리지 않았던 불운한 화가였다. 모네는 결국 아내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새 여인, 비록 자신을 도와주던 은인의 아내이기는 했으나 알리스와의 안정적인 삶을 꾀하고자 새 삶터를 찾아 지베르니로 이사 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