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67화
[대문 사진] 지베르니 모네 기념관
송어인지 연어인지 대체 분간이 가질 않는 주홍빛 생선살에 야채를 곁들인, 아 이럴 땐 샐러드나 감자튀김이 간절해진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분주히 모네기념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뒤돌아보니 농가를 개조한 점심식당과 기념품가게는 모네의 정원을 보고 나온 단체관광객들로 서까래마저 무너질 지경이다.
흘긋 돌아본 풍경이지만, 세월은 청석이 낀 기와지붕에 내려앉았다. 나는 비로소 수첩을 꺼내 들고 펜으로 세월이 내려앉은 기와지붕을 수첩에 담는다.
디에프를 향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때늦은 시각에 들어선 국도변의 시골 레스토랑은 동네 주민들로 여겨지는 마을사람들에게 벌써 점령되어 있었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나는 하릴없이 유리창으로 비친 건물의 허물어져가는 지붕을 수첩에 담아 갔다. 아내는 늘 그러려니 생수 잔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런 나를 가만 내버려 두었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스케치를 일삼는 나를 그처럼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설 때마다 아내는 내가 탁자를 덮은 흰 종이에 끼적인 낙서까지도 웨이터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달라해서 잘 접어 늘 들고 다니는 가방에 챙겨 넣곤 했다.
그런 그녀가 솔직히 고마웠다. 말없는 배려가 따뜻한 보살핌만큼이나 절실했던 나로서는 그녀의 자상함에 차디찬 청어 요리도 따뜻하게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부부는 그런 사이인가 보았다. 말 없는 배려가 그 어떤 행동보다도 부부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느낌표를 찍던 날.
지베르니 클로드 모네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매표소가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금은 턱 없이 쌌다. 모네의 그림을 경매장에 내다 팔아야 할 정도로 시설 관리비와 유지비, 거기에다가 인건비까지 어마어마한 비용이 소요될 텐데도 입장료는 몇 년이 지났건만 조금 오른 거의 그대로였다. 재단의 수입은 입장료 수입과 기념품 판매가 고작일 텐데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오베르 쉬흐 우아즈를 다룬 기사에서 읽은 기억이 나 클로드 모네 재단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베르 쉬흐 우아즈 빈센트 반 고흐 기념관 오베르쥬 라부(Auberge Laboux)는 벨기에 인이 회장으로 있는 재단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문제는 재단의 수입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이었다. 벨기에 인이 운영하는 반 고흐 기념관 수입은 입장료와 기념품 판매 대금 그리고 사흘간밖에 운영하지 않는 식당운영으로 벌어들이는 수익금이 고작이지만, 인터넷을 통해 들어오는 모금액이 어마어마했다.
좀 더 신랄하게 이야기하자면, 벨기에 인은 전 세계인들에게 인터넷으로 호소하기를 반 고흐가 유언했듯이 그의 다락방에 그림 두 점을 사서 걸어놓을 예정이니 이 기념사업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는데, 저널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때 모인 모금액이 2,359억 원에 달했다.
나는 정말 이 돈으로 재단이 고흐의 그림을 사서 다락방에 걸어놓았는지 확인해 보고자 어느 날 고흐 기념관엘 찾아갔다. 그러나 고흐의 다락방에는 이름도 모를 이력도 불분명한 네덜란드 화가인지 벨기에 작가인지 국적조차 모호한 플랑드르의 화가의 풍경화 두 점이 생뚱맞게 걸려있었다.
그나마 반고흐 기념관을 유지하고 보수하는데 기금의 일부를 사용하는 듯해서 재단 일에 이래라저래라 참견하듯 댓글을 달기가 뭐 했지만, 그 벨기에 인이 대체 무엇을 의도하고 그 엄청난 기금을 모았는지 자꾸만 궁금해진 건 사실이었다.
정부 보조금이나 지베르니 시 당국의 지원금은 차치하고서라도 재단이 알게 모르게 거둬들이는 수입이 회계장부에 기재되어 있다면 모를까 이 가운데 일부가 ‘양심적’으로 기념관 운영에 쓰인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나 또한 재단을 감시하는 시민단체의 회원이나 세무공무원이 아닌 다음에야 재단의 일에 참견할 까닭은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 작가의 기념관이 다 그러하듯, 관광객한테 받는 입장료만으로는 기념관 운영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비즈니스와 무관한 지방자치단체의 역량으로는 작가의 생가나 기념관을 운영한다는 것은 밑 빠진 독에다 물 붓기 식이란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기념관 입구에는 생전의 클로드 모네를 담은 커다란 포스터 한 점이 걸려있는데, 포스터 안에서 모네는 특유의 기다란 수염을 기르고 관람객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입구가 비좁은 것은 정원의 크기에 관람객들을 놀라게 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고, 모네의 사진도 흑백으로 걸어둔 것은 정원을 가득 채운 화초들의 화려한 색조의 향연과의 대비를 은연중에 암시한 것이리라.
정원 쪽에 단체관람객을 위한 통로가 따로 마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구는 북새통을 이뤘다. 그만큼 개인 관람객 역시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증거일 터였다. 기념품 판매소는 대형 수련 연작을 위해 모네가 생전에 새롭게 지은 건물인데, 넓은 공간 역시 관람객들로 가득 차있었다.
기념품 판매소에서 내가 산 것은 고작 모네의 삶과 예술을 요약한 자그마한 책자뿐이었지만, 다행인 것은 한쪽 기다란 벽에 모네의 대형 수련 작품을 복사한 사진을 붙여놓았다는 점이다. 관람객들은 그곳에서 기념촬영을 한다고 난리였다.
정원 오른편에 들어선 생가 역시 북새통을 이루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단의 중국 단체 관광객들이 입구를 가로막고 인증샷을 찍는다고 통행을 가로막았다. 한때는 일본관광객이 몰려오고 그러다 한국관광객이 쇄도하더니 이제는 중국인들이 모네의 집과 정원을 사들일듯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생가 앞에 큰 키로 자란 레바논 삼나무는 싱그러움을 더하고 앞마당 너른 뜰을 차지하고 있는 정원에는 온갖 화초들이 각자의 고유한 색조들을 뽐내고 있는 와중에 그 사이를 오가는 중국관광객들은 볼성사나운 짓만을 골라 그것도 아주 자연스레 연출하고 있었다.
정원을 바라보자니 모네가 네덜란드를 다시 찾아가서 그린 들판 가득한 튤립 그림이 언뜻 떠올랐다. 생가 건물의 페인트칠 또한 분홍색으로 초록의 덧문과 함께 묘한 색감의 대비를 두드러지게 강조한 듯했다.
생가로 들어서자 현관에 이르고 온 벽에는 일본의 목판화가 단정하게 걸려있었다. 돈만 생기면 일본 목판화를 수집했다더니(이 가운데 10점은 가난한 화가 고흐가 사들였다) 그 수가 엄청난 것은 당연한 일, 목판화의 대가 히로시게의 작품은 그 가운데 보석처럼 빛을 발하고, 계단이 시작되는 거실을 지나자 모네가 처음 아틀리에로 사용하던 큰 거실로 이어졌다.
방의 벽이란 벽은 천정까지 모네가 생전에 그린 그림들의 복제화들이 어수선하게 걸려있었다. 모네는 정원으로 난 이 널따란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사색에 잠겼을 것이다. 사색하지 않는 자는 그림도 그릴 수 없다는 듯이.
폭 좁은 나무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 보니 모네의 침실로 이어졌다. 남쪽과 서쪽 방향으로 난 유리창 앞으로는 ‘꽃의 정원’이 펼쳐졌다. 모네는 아침에 눈뜨자마자 저 유리창을 통해 정원을 내다봤을 것이다. 그리곤 아래층으로 내려가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오후에는 정원을 가꾸고 그것만이 모네의 일상이었으리라. 모네의 침실에서 내가 생각한 건 그처럼 오직 그림 그리고 정원 가꾸는데 열정적이었던 모네의 태도였다. 그건 자신한테 대한 엄격함이었는가 아니면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이었는가? 알 수가 없다.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는 것은 그는 눈을 뜨면 정원을 돌보고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이다. 매일같이!
모네의 침실은 곧바로 화장실[1]로 이어지고 다시 알리스의 방으로 이어진다. 알리스의 방 유리창 앞에는 생전에 알리스가 쓴 것과 같은 재봉틀이 놓여있다. 알리스 방을 나오자마자 계단, 계단을 건너뛰면 아이들 방이 나온다. 계단을 내려와 현관 쪽 왼편으로 들어서면 식당과 부엌이 차례로 이어진다.
식당과 부엌은 상당히 넓은 편인데 아마도 생전에 모네 집을 찾았던 손님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20명은 거뜬하게 식사할 수 있는 식탁이 식당 한가운데 놓여있고, 부엌은 50명 식사준비도 가능할 정도의 크기다. 식당과 부엌은 생전에 성공한 작가의 명성에 걸맞은 규모다.
[1] 프랑스에서 화장실(toillettes)이라 함은 말 그대로 ‘얼굴 고치는 방’을 가리킨다. 표기는 항상 복수형으로 한다. 남녀화장실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화장실에는 커다란 거울이 걸려있다. 궁전 같은 곳에서는 커다란 거울 달린 방 한쪽에 난 조그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에 요강이 있었다. 수세식 화장실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상수도가 설치된 시기와 일치한다. 모네의 집은 재밌게도 모네의 침실과 알리스의 침실 사이에 화장실이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