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69화
클로드 모네의 「아르장퇴유 나무들」이란 그림을 보면 화가가 나무들을 유난히 검정 단색으로 처리했음에 시선이 집중된다.
화면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화폭의 절반을 가득 채운 나무들이지만 화가가 생각한 것은 세느 강 풍경이다. 겨울이어서인지 아니면 늦가을이어서인지 그도 아니면 비가 내린 탓인지 나무둥치가 유난히 검다.
화가의 초기작품에 해당하는 이 그림은 화가의 불안정한 내력을 암시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세잔이나 에두아르 마네와는 달리 애송이 화가였던 모네는 아직 형상에 대한 표현에 눈이 어둡다. 검은색을 많이 사용한 것은 그 때문이다. 시간 또한 한 순간에 고정되어 있다기보다는 여름을 제외한 온 계절이 다 자리하고 있다.
나무들조차 불분명하다. 잎사귀들이 넓은 것을 보니 미루나무(포플러)보다는 버짐나무(플라타너스)에 가깝다. 나무둥치가 검은 것은 습지대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 오리나무와도 다르다. 오리나무는 아무리 어두워도 짙은 회색에 가까운 색조여야만 한다.
모네는 어느 날 윌리엄 터너의 그림과 마주했을 것이다. 뿌연 증기가 가득한 화면을 마주하자마자 모네는 대상을 정밀하게 그리기를 포기하고 마치 물안개에 젖은 흐릿한 풍경으로 나아갈 것을 결심한다. 참으로 인상적인 화풍이 비로소 시작된 셈이다.
부지런했던 화가는 아침 일찍 일어나 팔레트와 캔버스와 튜브물감을 들고 해돋이를 한다. 말년에 그린 「베네치아」에서는 그 촌스런 빨간 점이 없는 걸 보니 ‘인상’이란 말은 이전의 해돋이 그림에 대한 적절한 평가였던 것 같다.
「해돋이 인상」을 건너뛰어 「베네치아」만 보면 저녁 해질 때의 풍경이 아니란 점만큼은 분명해진다. 아침노을은 두오모(둥근 지붕)를 밝게 물들이고 있다.
이처럼 그림 속의 두오모는 밝은 하늘색과 분홍빛에 가깝다. 모네는 아침 이미 해가 떠오른 상태에서의 운하를 그린 것이다. 유치한 빨간 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해는 정오를 향해 솟아오르고 아침의 강렬하면서도 두터운 새틴 커튼과 같은 빛의 실루엣은 온 운하를 휘감고 돈다. 전체 바탕화면은 엷은 하늘빛으로 가득 차 있지만, 마지막 순간의 아침노을의 잔광이 분홍빛으로 서려있다.
곤돌라를 매달아 놓기 위해 물속에 박아놓은 나무기둥들은 붉은빛, 초록빛, 노란빛으로 절묘하게 바탕의 하늘색과 어울리면서 또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아침물살은 흰색을 뒤섞어 푸른빛이 슬며시 화면에서 사라지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가로 혹은 거친 붓 터치로 화면아래에서 물살이 일렁이도록 계산한 그림, 누가 봐도 화면 아래쪽이 운하의 물살이라는, 아직 배들이 지나다니기 이전의 풍경이란 점은 명증해 보인다.
「수련」에서 마주한 수평의 안정감은 「베네치아」에서 수직의 평온함으로 이어지고 있다. 물살과 수직을 이룬 나무기둥들조차 조화로운 균형을 위해 밝게 채색되었다. 멀리 두오모는 아침햇살이 안개에 뒤섞여 뭉개진 듯하지만, 그 거대한 실존의 언어는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클로드 모네는 「베네치아」에서 무엇을 노린 것인가? 두오모인가 나무들인가? 하늘인가 운하의 물살인가? 묻기를 좋아하는 이들은 철학자들 아니면 비평가들이다. 시인보다 더 다양한 색조의 언어로 화가들은 그림을 그려왔고 그리고 있고 그려나갈 것이다.
세잔에게는 저 아카데믹한 주제들로부터 면과 선 그리고 원이 분할하는 20세기 추상까지 공존한 평면이 이어진다. 실상 화가들은 두 눈으로 지각한 대상을 손의 감각에 의지한 채, 색채의 다양한 뒤섞임으로 빛의 풍경을 재현할 따름이다.
때로는 시가 이미지를 보다 더 단순하고도 명증 하게(철학적으로) 재현해 보이지만, 화가의 언어는 수만 가지 색채의 바리에이션으로 화가의 시선에 고정된 사물의 이미지를 훨씬 효율적으로(경제적으로) 구성한다.
여행의 기록을 담은 노트의 끝부분에는 모네의 「베네치아」에 대하여라는 제목과 함께 어수선한 수채화 한 점이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