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크 수도원을 진흥시킨 랑프랑크

몽생미셸 가는 길 92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베켈루앵 수도원의 생 니콜라 종탑 현판


랑프랑크(Lanfranc)는 1010년경 이탈리아 파비 지방에서 출생했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수학한 뒤 교회법전을 편찬하기도 했으며, 프랑스로 건너온 때는 1030년경으로 알려졌다.


1039년에 몽생미셸 인근의 아브랑슈에 도착한 그는 수도원에서 수사들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베크 노트르담 수도원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1042년경의 일이다.


베크 수도원은 에흘루앵이 창건한 수도원으로써 랑프랑크는 이곳에서 1045년부터 1063년까지 수도원장으로 봉직했다. 이 시기에 에흘루앵은 세 명의 수도사들을 딸려 랑프랑크를 생테브홀 수도원을 복구하도록 파견했다.


1061년 초에는 생테브홀 수도원장이었던 매니에의 초청을 받아드리고 수도원장 선출에 따른 자문을 도왔다. 그는 프레오의 성 베드로 수도원장이었던 앙프루아와 함께 기욤 공작의 자문을 맡았으며, 이후에 기욤이 캉에 생테티엔 수도원을 건설하자 그곳의 수도원장으로 부임해 재직하다가, 1066년 드디어 기욤이 영국을 정복한 뒤에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다.


베켈루앵 수도원이 캔터베리 성당과 영성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음을 입증해 주는 니콜라 종탑 현판. 캔터베리 대주교 란에 랑프랑크의 이름이 맨 먼저 등장한다.


랑프랑크는 1059년에 베크 수도원에 성직자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스콜라 철학이 융성해진 것은 이 시기와 관련이 깊다.


스콜라(Scola)란 말은 말 그대로 ‘학교(School)’를 가리키는데, 수도원의 성직자를 위한 교육기관을 가리키는 말과 다름 아니다. 여기서 논의되던 신을 중심으로 한 사상이 스콜라 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스콜라 철학의 형성에 랑프랑프가 세운 성직자 교육기관이 중요한 몫을 해낸 것과 병행하여 수도원 또한 급성장하면서 그 명성 또한 날로 높아만 갔다. 이곳에서 배출한 걸출한 인물들을 열거해 보면, 이브 드 샤르트르와 앞으로 교황이 될 알렉상드르 2세, 그리고 랑프랑에 이어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는 앙셀므(안셀무스) 등이다.


병행하여 그는 교부들의 필사본들에 주해를 달거나 이를 제작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랑프랑크는 시편에 주석을 달았으며, 아우구스투스의 『신의 국가』나 욥 드 그레고리 르 그랑의 『윤리서』를 해석하기도 했다.


1049년 랑프랑크는 성체성사(성찬식)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가 베랑제르 드 투르에 반박하기를 그리스도의 현신은 오로지 순수하게 상징적인 것일 뿐이란 점이었다.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는 일(la transubstantiation)을 규정하는 믿음의 기초가 이때 확립되었는데, 랑프랑크 역시 이를 지지하고 나섰다.


랑프랑크는 빵과 포도주의 외양(specise)만 갖고는 그것의 본질과 내용을 규정하기 어렵지만, 빵과 포도주를 축성(la consécration)함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환되는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학파에 속한 최초의 중세 교부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063년 앞으로 정복왕이라 불릴 기욤 공작은 캉에 소재한 생테티엔 수도원의 초대원장으로 랑프랑크를 지명했다. 생테티엔 수도원은 공작의 발의로 설립된 것으로써, 이로써 캉은 노르망디에서 정치적으로 두 번째로 위상이 높은 도시가 되었다.


랑프랑크는 새로운 수도원을 짓고 수도원의 재정수입을 늘릴 것을 구상했다. 그는 베크(Bec)에서처럼 성직자 교육기관인 수도원 학교를 설립했다. 베크에서 에흘루앵과 함께 제정했던 관습들을 생테티엔느 수도원에도 그대로 적용했던 것이다.


1066년 정복왕 기욤이 영국 국왕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영국 교회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1070년 기욤은 성직매매의 이유로 윈체스터 참사회를 통해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스티강을 퇴위시키고 대신 랑프랑크를 그 자리에 앉혔다. 1070년 8월 15일의 일이었다. 대주교 취임식은 8월 29일에 거행되었는데, 1071년 자신의 제자였던 교황 알렉상드르 2세로부터 팔륨(교황이나 대주교가 어깨에 걸치는 양털로 짠 흰 천)을 하사 받았다.


랑프랑크의 캔터베리 대주교직 임명은 이에 맞서 영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캔터베리 대주교직을 놓고 요크 대주교와의 경쟁에서 기욤의 왕자들과 교황의 권위가 서로 맞선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라 더 뜻깊을 수밖에 없었다.


노르망디와 영국을 다스리던 기욤을 보좌하면서 영국 교회를 이끌어가던 랑프랑크는 1089년 5월 28일 영국의 캔터베리에서 임종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인으로 축성되었고 추앙받았다. 그의 축일은 그가 영면한 날과 같은 5월 28일이다.[1]






[1] 김영철, 『안셀무스』, 살림출판사, 2006, 서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