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91화
[대문 사진] 꼬드벡 앙 꼬 마을 쪽에서 바라본 브로톤느 대교의 아침 풍경.
쥬미에쥬에서 베켈루엥으로 가기 위해서는 세느 강을 다시 건너가야 한다.
인상파 화가들은 파리에서부터 대서양에 이르는 세느 강을 따라 여행하면서 강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심지어는 세느 강 지류에 해당하는 우아즈 강변이나 엪트 강변까지도 영원불변의 풍경화로 담아냈다.
강변의 풍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다. 그 점이 내가 인상파 화가들의 풍경화에 매료된 이유 가운데 하나다. 세느 강변을 여행하면서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떠올리며 “아! 저 풍경을 그린 것이구나.” 감탄하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화가들은 풍경을 화폭에 담음으로써 화가가 처음 발견한 인상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겠지만, 세느 강변은 그제나 저제나 마치 불변하지 않을 풍경인 것처럼 21세기에도 변함없이 나그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예술 또한 영원함을 담아내는 그릇일 수 있는가는 차치하고라도 예술가는 그 처음의 인상을 화폭에 담아냄으로써 예술의 영원함을 굳건히 지켜내려 했던 것은 아닐까?
세느 강의 다리를 건넌다. 위레 지방과 꼬 지역을 연결하는 브로톤느 대교는 날렵한 현수교로 1977년에 완공되었다. 탕카흐빌 대교 그리고 노르망디 대교에 이어 세 번째로 세느 강 하구의 양안을 연결하는 현수교다.
센 마리팀에서 꼬 지역으로 들어서자마자 브로톤느 대교를 건너고 다시 위레 지방으로 방향을 튼 목적지는 이미 정해졌다. 벡엘루앵!
르 베켈루앵(Le Bec Hellouin)은 브리온느 인근의 한 자그마한 수도원 마을이다. 수사들을 포함하여 주민수가 3백 명도 채 안 되는 마을은 그러나 천 년의 영고성쇠를 견디어 온 중세마을 가운데 으뜸이다.
베켈루앵이란 마을이름이 암시해 주듯, 질베르 드 브리온느 백작의 기사였던 은수자 에흘루앵(Herluin)이 1035년경에 이곳에 수도원을 창건하였는데, 마을을 가로지르는 베크(Bec)라는 시냇물에서 유래한 베크 노트르담 수도원이 그에 해당한다.
베크란 단어는 ‘새의 부리’를 뜻하는 말로 아마도 수도원이 산골짜기 새 부리 형상을 한 부지에 세워진 탓이거나, 또는 하천을 가리키는 말에서 마을이름이 유래했을 수도 있다. 엘루앵은 당연히 수도원을 창건한 에흘루앵에서 연유한다.
이곳이 일찍부터 영성의 중심지가 된 것은 이탈리아 인 성직자 랑프랑크(Lanfranc)가 수도원에 초빙되면서부터다.
랑프랑크는 벡 수도원에 성직자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이곳에서 11세기 12세기에 걸쳐 수많은 걸출한 성직자들을 배출했다. 노르망디 공작이자 영국왕이기도 한 기욤의 자문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기욤이 세운 캉의 생테티엔(성 스테파노) 수도원장을 비롯하여 캔터베리 대주교를 거쳐 영국의 수좌대주교(Primat)가 되면서 영국과 노르망디를 아우르는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이때가 베크 수도원이 성직자 교육기관으로 유럽 제일의 수준을 자랑하던 시기였다.
베크 노트르담 수도원은 1059년에 또 다른 이탈리아 성직자 앙셀므(안셀무스)가 초빙되면서 종교적 사유(신학)와 철학의 분야에서 최절정의 시기를 구가하였다. 이 시기가 벡 수도원이 서유럽에서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던 시기였다.
수도원이 명성을 얻게 된 것은 허나 14세기까지였을 뿐이다. 백년전쟁에 이어 성직자 가운데 선출이 아닌 국왕이 지명한 평신도 출신의 수도원장이 임명되면서 수도원은 황폐화되기에 이르렀다.
수도원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은 17세기 모리스트(생 모흐 수도회 수도사)들이 수도원 건물을 개축하면서부터였다. 모리스트들은 수도원 건물을 다시 지었을 뿐만 아니라 신학을 연구하고 수련을 쌓아갔다.
1792년 대혁명 이후로 수도원은 군대병영으로 사용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수도원 건물들은 모두 병영으로 개조되었으며, 군대에서 필요한 말들을 보충하는 마구간으로 전락했다.
1948년에 이르러서야 수도원은 영적인 성소로써 거듭나면서 동시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에 이르렀다. 바티칸 제2차 공의회가 천명한 기독교 교파 통합 운동(Oecumémisme) 성소로 수도원은 다시 도약했다. 그럼으로써 로마 가톨릭에 기반을 둔 베켈루앵 수도원은 영국 성공회 성당인 캔터베리 교회와 결연을 맺기에 이르렀다.
1976년에 그라몽 수도원장은 아뷔 고쉬 성지에 수도원을 창건하고 수사들을 파견했다. 1990년 수도원은 다시 수도원과 수녀원으로 갈라섰다.
2000년 이후로 수도원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는데, 오래된 수도원 건물을 개축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젊은이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받아드려 자원봉사자들로 하여금 수도원 건설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2017년 새로운 수도원 기숙사를 설립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