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2화
[대문 사진] LMM이란 서명이 적혀있는 <바이킹>을 다룬 어느 작가의 소묘. 코펜하겐 1898.
프랑스인들이 ‘바이킹(Viking)’이란 용어를 알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부터입니다. 이때까지 프랑스인들은 2세기 동안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북쪽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라틴어)로 중세에 즐겨 썼던 ‘노드마니(Nordmanni)’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렇지만 고대 스칸디나비아 인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바이킹(víkingar)’이라 불렀고, 이들은 ‘군사 원정(fara í vikingu)’을 위해 배에 승선하던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였습니다.
게다가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야만인들(barbares)’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농부들이었고 어부들이었으며 상인들이었고 전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떠도는 인간들이었지만 그러나 항상 마음 속에 품고 있던 국가, 즉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이라는 나라에 소속된 구성원이기를 바라던 이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사회는 가족 체계로 조직되었고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땅에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주로 농작물을 재배하거나 다른 그 어떤 재능보다도 뛰어난 해양 경제에 능한 사회를 이끌어나갔죠.
이에 더해 사회적이고도 정치적인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8세기경 인구의 갑작스러운 증가로 말미암아 당연히 이들은 살아갈 땅이 부족했습니다. 자연 셰틀랜드와 오크니 지역으로의 노르웨이 인들의 첫 이동이 발생하였습니다. 장자가 부모의 농토를 물려받는 전통도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노르웨이 왕조의 출현은 9세기 후반에 가능하였는데, 길고 밝은 빛을 띤 금발의 머리카락을 지닌 하랄드(Haraldr) 국왕의 권력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에 일부 엘리트 구성원들이 국왕의 권력에 반항하면서 전쟁을 일으킨 것과 때를 같이합니다. 이 반대세력들은 국왕 하랄드에 의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그리고 아이슬란드로 유형에 처해졌습니다.
덴마크는 오늘날 스웨덴 서쪽 지역 전체와 오슬로 피요르드(베스트홀드) 지역을 아우르며, 영향력을 확대해 갔습니다. 덴마크인들은 샤를마뉴가 작센 지역을 정복한 것에 대해 두려움에 떨었죠. 결국 770년 샤를마뉴는 프리슬란트까지 병합했습니다.
색슨 계 우두머리인 위두킨트는 777년 지그프리오르 왕과 전쟁을 벌이고 영토를 되찾았습니다. 프랑크족들은 색슨인들과의 결속을 다지는 과정에서 덴마크인들이 중립을 지킬 것을 여러 차례 요구하고 나섰죠. 구오프리오르가 국왕의 자리를 승계한 덴마크는 프랑크인들이 점점 자신들을 향해 칼을 겨누고 다가오는 것을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막아냈습니다.
810년에는 프리슬란트를 향해 닻을 올리고 국왕이 암살당하기 전까지는 프리슬란트를 정복했습니다. 814년 샤를마뉴 대제가 죽자 덴마크인들은 당시 프랑크 제국의 영토였던 대서양 연안을 침공하기 시작했죠. 이때부터 프랑크 제국의 북서쪽 해안은 바이킹들에 의한 약탈과 파괴가 일상화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프랑크족이 도망친 땅에 정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정복이 시작되기 전의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