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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Oct 08. 2024

바이킹의 배

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3화

[대문 사진] 바이킹들이 타고 다니던 배 모형


바이킹들의 배는 이 시대에 가장 성능이 뛰어난 범선들이 주를 이뤘습니다. 용맹한 바이킹들은 이처럼 성능 좋은 배들을 타고 다니며 바다 저 너머를 탐사하면서 풍요의 원천을 찾아 나섰을 뿐만 아니라 미지의 땅을 개척하고, 그들이 점령한 땅에는 그들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그들의 사회 체계를 뿌리내려갔죠.


바이킹들은 그들의 사회가 점차 비대해짐에 따라 새로운 땅에서의 물질적인 이익을 맛보자 이를 더욱 증대하기 위하여서는 제각기 분할되어 있는 세 나라를 한데 통합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국왕의 권위를 더욱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에 도달했습니다.


해상 무역에 있어서 이를 선점하려는 유럽제국의 파렴치한 만행을 겪었던 바이킹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한 종교적 체계와 정치 체계를 바로 세우는 일이 시급했고, 앞으로 2백 년 동안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지속적으로 탐험하면서 기회의 땅으로 여겨진 유럽대륙에 자신들의 사회를 건설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인식에 바탕을 둔 바이킹들의 유럽 침탈은 8세기말부터 본격화되었습니다. 793년 6월 8일 린디스파른느 수도원(영국의 북동쪽 해안가에 위치한 작은 섬에 성 쿠트베르트가 세운)이 드디어 바이킹들의 침공을 받아 쑥대밭이 됩니다. “이교도들이 이 땅에 침입하여 공포를 조장한 것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라고 알퀸은 6년의 세월이 흐른 후 기술하고 있죠. 또한 새로 겪은 경험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교도들의 선단이 아끼탠느 지방의 대서양 섬들에 들이닥치면서 수많은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다.”


프랑크 왕국에 처음 발을 디딘 첫 번째 시기 이후로 바이킹들은 한 세기가 저물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했음에도 여전히 프랑크 왕국을 ‘손으로 훑듯이’ 휩쓸고 다녔습니다. 대서양 연안과 망슈 해협을 쓸고 다니면서 섬들에 닻을 내린 바이킹들은 미처 이에 대처할 만큼 조직적이지 못한 모든 저항세력들을 제압하고 마침내 바다를 석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11년 오슬로 시가 노르망디에 기증한 오세베르크 바이킹들이 타고 다니던 배 모형. © 훼깡의 신대륙 어업 박물관.  크리스티앙 에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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