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17화
[대문 사진] 노르망디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께흐끄빌의 생 제르맹 교회.
코탕탱 북쪽 지역(pagi)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행정구역 분할 체계상의 지명들은 상당수가 바위로 된 갑(岬)에 붙은 이름들일 경우 바이킹들이 거주했던 연안의 지명들과 똑같은 용어들을 차용했습니다.
1027년 리샤르 3세가 자신의 젊은 아내인 호베르 르 피외이의 딸 아델을 위해 설정한 과부 상속 유산 법을 살펴보면, 세 개의 행정구역 명이 등장합니다.
아가(Haga), 사흔느(Sarnes) 그리고 엘제흐(Helgeres ; 엘젠느(Helgenes)로 읽어야 합니다)가 그것입니다. 이 가운데 앞의 두 지명은 라 아그(la Hague ; 노르망디어로 갑을 뜻하는 haka)와 라 새흐(la Saire ; 노르망디 어로 갑, 곶을 뜻하는 네스(nes), 갚(cap), 그리고 사라(Sara), 새흐(Saire))라는 것이 분명하죠.
이 용어들은 그들 각기 고유한 지명들로 지칭되기 이전에는 아그와 새흐의 갑이나 곶을 뜻하는 말과 같은 어원을 지녔습니다. 엘젠느(Helgenes ; 엘지(Helgi) 또는 헬지(helgi), 생(saint)이란 인명과 같은 형태)란 지명도 흘라망빌의 곶에 부합하는 구역 명과 관계가 깊습니다.
아그의 서쪽 지명이자 에꺌그랭 만에 있는 작은 언덕 기슭에 위치해 있는 르 탱글랑(Le Tingland ; 구역(locale), 땅(land), 대지(terre)와 같은 뜻을 지닌 스칸디나비아 어로 딩(Þing))이란 지명 역시 바이킹들이 그들의 공동체의 관심사항을 논의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모였던 장소에 해당하는 딩(Þing)이란 말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노르웨이 바이킹들에 의해 식민지가 된 영국 북서쪽 지방 컴벌랜드(Cumberland) 에는 핑글랜드(Fingland)(1279년에 팅글랜드(Thingland)라 공식적으로 명명된)란 지명이 나오는데, 이 또한 두 단어의 유사성이 확인됩니다.
게다가 아그 지역에서 1263년에 ‘로제리우스 위스꺄이유(Rogerius Huscaille)’란 인명과 1274년 흘로뜨망빌 근처에 발리 위스꺄이(Vallis Huscalli)란 지명이 등장하는데, 이 두 단어는 스칸디나비아 어로 후스카알(húskarl), 즉 왕자(hirŏ)의 개인 경호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사람 이름에서 파생했습니다.
1062년에 사생아(정복왕) 기욤(윌리엄)은 예외적이게도 ‘부아빌의 오그(la hogue de Boiville)’ 야외에서 개최된 모임에 참석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이 말은 오늘날 보몽 아그(Beaumont-Hague) 지구에 위치한 비빌(Biville) 언덕을 가리킵니다. 이 밖에도 바이킹들이 연속적으로 코탕탱 북쪽에 미친 영향력에 대한 수많은 증거를 예시하는 징후들이 발견됩니다.
코탕탱의 스칸디나비아 인들은 오랫동안 루앙 당국에 자신들의 존재를 숨겨왔습니다. 또한 오랜 기간 동안 이교도로 살아왔죠. 비록 그들 가운데 개종을 한 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그들의 선조들이 믿었던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로 회귀했습니다. 이 지역의 프랑크 왕국의 백성들조차 10세기에는 본당 신자로서의 삶을 영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죠.
11세기 초반까지 이 지역에는 성직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도 작용했습니다. 실상 바이킹들이 생로를 포위 공격함에 따라 징세 요구가 점증했던 889-890년경에 신앙 공동체로부터의 탈출은 일반화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생 마흐꾸프 수도사들은 수도원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리스타 주교가 살해당한 꾸탕스 교구 신자들은 그들의 신앙마저 내던져버렸습니다. 너그러운 로베르(로베르 르 마니피크) 공작이 스리지 라 포레(Cerisy la Forêt) 수도원을 설립한 1032년까지는 공작령 서쪽 지역은 수도원이 중심이었다는 어떠한 근거도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단, 예외가 있었다면 바로 몽생미셸입니다. 루앙에 거주하던 꾸탕스의 주교 로베르가 자신의 교구에 속한 몽생미셸로 되돌아온 것이 1049년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1000년이 시작된 이후 이틀레드 왕이 노르망디를 공격하고자 원정군을 조직한 것이나 영국군이 상륙지점으로 헤빌르와 생 바스트 라 우그 사이에 위치한 발 드 새흐를 선택한 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리샤르 2세는 영국을 공격한 바이킹들에게 코탕탱 지역을 내주었기 때문입니다.
[1] 께흐끄빌이라는 지명은 바이킹들이 사용하던 ‘케르카빌라(Kerkavilla)’란 말에서 기원했습니다. 천주교회(성당)에 속한 농가를 가리키는 케르카빌라란 단어는 12세기 문서에도 등장합니다. 장 르노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