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56화
[대문 사진] 활래즈의 리샤르 2세 조각상
리샤르 1세를 계승한 아들 리샤르 2세는 마침내 노르망디를 프랑스 왕국에 통합시켰습니다. 리샤르 2세는 훗날 선량한 리샤르로 불린 인물입니다. 그는 프랑스 왕이었던 경건왕 로베르(Robert le Pieux)와의 우정을 과시했을 뿐만 아니라 양국 간의 동맹을 유지한 인물이었습니다.
경건왕 로베르 역시 부친을 계승한 인물이었죠. 리샤르는 프랑크 국왕으로부터 여러 차례 되풀이하여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값지고도 귀중한 도움은 곧 현실이 되었고 마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작령을 경제적으로 튼튼하게 뒷받침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죠. 그럼으로써 어려웠던 시기에 특이하게도 평화가 구현되는 예외적인 일까지 발생합니다.
그러나 치하 말기에는 이상한 일도 벌어졌습니다. 내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던 북유럽과의 관계를 끊어버린 채 남쪽으로 눈을 돌린 탓이죠. 남쪽에 존재하고 있는 가능성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 그 주요한 원인이었습니다. 공작령은 그럼으로써 스칸디나비아에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영국과의 정치적 관계를 고려해 보면 이해 못 할 바도 아닙니다. 차라리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실상 영국 왕 이틀리드는 늘 덴마크 왕 바르브 후르슈에서 태어난 스바인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고, 리샤르 2세는 이러한 혼란이 앵글로 색슨 인들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1000년 들어 노르망디 인들은 과거 리샤르 1세 때 맺은 협약에도 불구하고 덴마크의 바이킹들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바이킹들은 켄트에서 노략질한 것을 루앙으로 가져왔던 것이죠. 이틀리드는 반격하기 위해 코탕탱을 침공할 군단을 꾸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르 발 드 새흐에 상륙했습니다. 물밀 듯 밀어닥쳤지만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리샤르 2세는 협약을 다시 체결하고 그의 누이인 엠마를 이틀리드와 결혼시킵니다. 1002년의 일이었죠. 이해 11월 13일 그의 왕국에서는 덴마크 주민들을 학살하는 참극이 빚어졌습니다.
또 하나 특기할 점은 리샤르 2세가 1003년 루앙에서 덴마크의 왕 스바인을 열렬히 환대하고 영접하였다는 점입니다. 바르브 후르슈 태생의 스바인은 영국에 복수하기 위한 거대한 작전을 펼쳤죠. 그러나 그는 노르망디와 영국 왕조 간의 새로운 동맹관계를 예리하게 파악하지 못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마찬가지로 리샤르 2세 역시 1009년 덴마크 인들의 침공으로 영국이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틀리드를 도와 덴마크와 싸우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1013년부터 루앙에 아내와 두 자식 알프레드와 에드워드를 데리고 망명 온 이틀리드를 따뜻하게 영접했죠. 두 명의 아들 가운데 막내인 에드워드는 훗날 영국의 고백 왕 에드워드로 왕좌에 오릅니다.
같은 해 리샤르 2세는 훗날 성인의 자리에 오르며 노르웨이 국왕이 되는 올라흐르(Óláfr)를 영접합니다. 올라흐르는 돌과 게랑드를 침공하고 스페인에까지 대규모의 바이킹 선단을 파견한 인물이었죠.
기욤 드 쥬미에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올라흐르는 루앙에서 겨울을 날 때 로베르 대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스노리 스튜흘루손이 펴낸 「올라흐르 성인의 전설」에서는 루앙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이틀리드 아들들은 영국과 덴마크 간의 우호를 위해 올라흐르와 동맹을 체결했다고 나옵니다.
하지만 그들은 덴마크 세력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뒤 루앙으로 복귀한 것이죠. 그들은 리샤르의 아들들과 우정을 나누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리샤르의 아들들 모두 훗날 공작이 되었습니다.
노르망디는 스칸디나비아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더 이상의 관계를 맺지 않았습니다. 스바인의 아들 크누트(Knútr) 르 그랑이 영국을 점령하면서부터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