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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샤르 1세 그 두 번째 이야기

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55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활래즈(Falaise)의 리샤르 1세 조각상


945년에 노르망디에 중대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스칸디나비아 인들의 우두머리인 하랄드(Haraldr)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랄드란 작자의 인물 됨됨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죠. 흘로도야르가 묘사하기를, “애그롤드(Haigrold), 노르만족인 이 작자는 바이외를 공격한 인물”이었다고 전합니다.


그는 바이킹의 우두머리로 브쌩에 정주하고 있었습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918년에 덴마크 인들로 구성된 한 무리의 전사들이 도르케틸(Þorketill)의 명령에 따라 망슈 해협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그곳 연안 지역에 실질적으로 정주하였죠. 다른 바이킹들 역시 바다를 건너 정착을 시도한 곳이 노르망디였습니다. 그리고 보통 공작의 권위에 복종하고 명령과 결정에 따라 그들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었습니다.


11세기 때의 바이외(Bayeux)


노르만족들의 관습은 덴마크 국왕 ‘해롤드(Harold)’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뒤동의 설명에 따르면, 리샤르의 충신들은 해롤드와 연대하고자 덴마크에까지 갈 정도였죠. 해롤드는 열정적으로 노르망디에 개입하고자 했습니다.


기욤 드 쥬미에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베르나르 르 다누아가 코탕탱에서 해롤드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코탕탱 지역은 그의 아들 ‘수에농(스바인이라고도 불리는)’이 약탈을 자행하던 곳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기욤의 허락 하에 그곳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정복왕 기욤의 태생에 관한 짧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순수한 마음에서 덴마크 국왕(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있습니다)을 중재하고자 나섰던 것이죠.


그렇지만 여기서 거론되는 인물은 파란 이빨이란 별명이 붙은 하랄드 (Haraldr)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940년경에 그의 아버지 고름(Gormr)을 계승한 인물입니다. 「덴마크 인들의 공국」에서 보면 삭소 그라마티쿠스는 이상하게도 노르망디 서쪽에서 벌어진 하랄드의 원정대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회색 모피를 입은 하랄드임이 분명합니다. 만일 롤로가 사가에 등장하는 건각자 흐롤프(Hrólfr)가 맞다면, 하랄드는 리샤르의 먼 친척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러나 그는 960년에 노르웨이 왕은 아니었습니다. 스노리 스투흘루손이 그에게 바친 사가에 따르면, 원정에 관한 이야기는 그 이상 더는 찾아볼 수가 없죠.


루이 우트르메르는 늘 위그 르 그랑 –개입하지 않도록 조심하겠다는 조건으로 –에 호소하지 않고도 하랄드의 막강한 군대에 과감히 맞설 만큼 재빠르게 응수할 수 있었을까요? 뒤동이 길게 묘사한 루이와 하랄드 간의 전투는 7월에 발생했습니다. 디브 강이 바다에 합류하는 염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크 군대는 크게 패했습니다.


흘로도야르는 간명하게 묘사하기를, “국왕은 전투할 장소로 지정된 곳에 소수의 인원만 데리고 나타났다. 반면 해그롤드는 엄청난 군사들을 대동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국왕을 따르는 군사들은 공격을 받고 거의 모두가 살해되었다.”


프랑크 국왕은 도망쳤지만 마핌내 포로로 붙잡혔습니다. 결국 위그가 주선한 베르나르 르 다누아 간에 회담이 열렸죠. 국왕은 노르망디에서의 리샤르의 권위가 어떠한 지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런 다음 포로들을 교환하기로 합의를 보고 풀려났죠. 이 포로들 가운데에는 그의 아들 중 한 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듬해가 되어 루이는 처남이었던 용감한 오똥 드 제르마니의 도움을 받아 루앙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노르망디 인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루앙을 공략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동원된 병력을 철수시켰죠. 그러자 위그 르 그랑이 나서서 국왕의 실책을 문책하고 나섰습니다. 이는 노르망디 백작과 맺은 동맹관계의 유리한 입장을 스스로 저해하는 처사였습니다.


루이는 954년 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어린 아들 로태흐가 루이를 승계했죠. 2년이 흐른 뒤 위그 르 그랑은 죽어가면서 리샤르에게 자신의 딸인 엠마(Emma)와 결혼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녀는 훗날 프랑크 왕국의 국왕의 자리에 오르는 위그 카페의 누이가 될 팔자였습니다.


리샤르는 그녀와 960년경에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젊은 나이에 아이도 낳지 못하고 죽고 말았죠. 리샤르는 하는 수 없이 고노르(Gonnor)와 결혼했습니다. 고노르는 덴마크의 선조 이름에서 비롯한 이름이어서 군보르(Gunnvör)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리샤르의 동거녀들 가운데 한 명이었죠. 리샤르와의 사이에서 5남매를 둔 어머니이기도 했습니다. 장남 리샤르 2세는 아버지 리샤르 1세를 계승하여 공작이 되었고 막내 로베르는 루앙의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세 딸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엠마라는 딸은 훗날 영국의 왕비가 되었죠.


리샤르는 블루아 백작인 티보 르 트리쇠흐와 사소한 일로 다툼을 벌였습니다. 블루아 백작은 기욤 롱그 에페가 살해되고 난 뒤 과부가 된 여인과 결혼한 인물립니다. 브르타뉴를 염두에 둔 그들의 경쟁심이 갈등의 원인이었죠.


리샤르는 루아르에까지 병력을 파견하여 블루아 백작을 감시했습니다. 960년 리샤르가 고용한 용병들인 바이킹들을 태운 선단이 명령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낭트와 그 부근이 쑥대밭이 되었죠.


훼깡의 고귀한 삼위일체 성당 정문에 자리 잡은 리샤르 1세의 조각상.


961년 국왕 로태르가 진두지휘하는 프랑크 군대가 블루아 백작 티보와 연합하여 바이킹들을 공격하는 바람에 느닷없이 에브뢰이가 함락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국왕은 블루아 도성을 되찾았습니다. 이듬해 국왕 로태흐는 루앙 근처에까지 침입했습니다. 노르망디 인들은 죽을힘을 다해 이를 막아냈죠.


리샤르가 고용한 바이킹들은 963년 브르타뉴 연안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965년에는 그들의 선단이 세느 강을 거슬러 올라가 죄호쓰까지 침공했죠. 바이킹들이 쑥대밭으로 만든 죄호쓰를 두고 티보의 영지냐 아니면 국왕의 영지냐를 놓고 서로 다투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로태흐는 마침내 갈등을 봉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이미 노르망디에서 리샤르의 권위를 충분히 실감했던 터였기에 티보가 점령한 에브뢰이는 당연히 리샤르에게 되돌려져야 마땅한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리샤르는 그의 백작령이 평화와 번영을 구가할 수 있도록 힘썼습니다. 이를 위하여 그는 30년간을 꿋꿋하게 밀고 나갔죠. 대외적으로는 987년에 국왕의 자리에 오른 위그 카페(Hugues Capet)와 동맹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991년에는 영국 왕 이틀리드(Ethelred)와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집요하게 영국 땅을 휩쓸고 다니며 약탈을 일삼았던 최후의 바이킹들이 절대 발을 딛지 못하도록 자신의 영토 내에 있는 모든 항구를 봉쇄하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 스칸디나비아와도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해 나갔죠.


리샤르는 996년에 숨을 거뒀습니다. 같은 해에 위그 카페도 운명했습니다. 그리고 리샤르는 훼깡의 삼위일체 성당에 안장되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새로 지으려고 바라마지 않던 교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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