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54화
[대문 사진] 훼깡 대성당 정면을 장식하고 있는 리샤르 1세 조각상
국왕 루이 4세 우트르메르(Louis d’Outremer)는 서둘러 루앙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는 어린 리샤르를 알아보았죠. ‘두려움을 모르는 리샤르(Richard sans Peur)’란 이름은 한참 후에 붙여진 호칭입니다.
루이 4세는 고인에 대한 추모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리샤르를 교육시킨다는 구실을 핑계 삼아 아이를 거의 감금하다시피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이외에서 달려온 이 무시 못할 가신이 선택한 노르망디를 위그 르 그랑 역시 탐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943년이 되자 루이 4세와 위그 르 그랑 두 사람은 스칸디나비아의 엘리트 앞에서 노르망디에 우연히 상륙한 새로운 바이킹들의 무리를 두고 서로 으르렁거립니다. 흘로도야르는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공작 위그는 노르망디 인들과 잔혹한 전투를 벌였다. 이교도들은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노르망디를 다시 이교주의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기독교도들이 노르망디에서 그들의 발에 밟혀 살육을 당하였다. 노르망디 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은 도망치는 도리밖에는 다른 방책이 없었다.
많은 노르망디 인들이 에브뢰이 도성으로 모여들어 도성 안에 사는 노르망디 기독교도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국왕 루이는 루앙을 접수했다. 노르망디 인이었던 투르무트(Turmoud)는 이교도들의 선량한 의식에 참석해 우상숭배로 돌아섰다. 그는 기욤의 아들과 이를 지켜보던 다른 이들에게까지 이교도 제식을 강요하였다. 그는 기욤의 아들을 이교도 국왕이었던 세트릭과 함께 함정에 빠뜨렸다. 그러나 국왕은 그와 전투를 치른 끝에 그를 살해하였다.”
세트릭(Sétric)은 아마도 노르웨이나 헤브리디즈 군도에서 온 노르웨이 인이었을 것입니다. ‘세트리쿠스(Setricus)’라 불리는 이 작자는 다른 말로 지그트리그(Sigtryggr)라 불리기도 합니다.
그는 덴마크(danoi)의 왕이었거나 윌란 반도 남쪽에 위치한 헤더비 인근의 두 개의 거석 위에 룬 문자로 새겨져 있는 그의 어머니 아스흐리오르(Ásfriðr)를 통해 유추해 보건대 적어도 그와 비슷한 권력을 지닌 인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그는 국왕이었던 부친을 승계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투르무트(‘투르모두스(Turmodus)’ 스칸디나비아 어로 Þormóðr라 불린다)는 그와 동맹관계였습니다. 옛날에 노르망디에 정착한 우두머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 작자는 갑자기 숫자가 불어난 오로지 스칸디나비아 인들로 구성된 집단 가운데에서 서열상 맨 꼭대기에 자리한 인물입니다.
세트릭이라고 불렸던 지그트리그(Sigtryggr)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선단을 이끌고 세느 강을 거슬러 올라왔습니다. 리세르가 들려주기를 국왕은 적군을 전멸시키다시피 했죠. 9천의 바이킹들을 오직 8백의 군사로 무찔렀으니 이 용감한 프랑크 군대는 적군을 1명당 10명씩 상대한 셈입니다.
프랑크 국왕 자신도 도르모드르(Þormóðr)가 찌르는 칼에 부상을 당했습니다. 국왕은 검으로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갈대숲으로 도망치던 지그트리그 역시 사냥창에 찔려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승리가 더욱 빛났던 이유는 프랑크 국왕들이 한 번도 수중에 넣어보지 못한 노르망디를 루이 우트르메르가 단 칼에 확보했다는 데 있습니다.
국왕은 위그 르 그랑에게 명하기를 에브뢰이 도성을 복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에흘루앵에게는 기욤 롱그 에페의 죽음을 멋지게 복수한 점을 높이 샀습니다. 에흘루앵에 대해 흘로도야르는 덧붙이기를, “에흘루앵은 아흐눌과 전투를 치렀다. 아흐눌은 노르망디의 왕자였던 기욤을 살해할 것을 지시한 작자였다. 에흘루앵은 아흐눌의 손들을 잘라 루앙으로 보냈다.”
이후에 에흘루앵은 기욤 롱그 에페의 아들 리샤르를 자신의 궁전이 있는 라옹으로 데리고 와서는 이 표현이 정확하다면 너무 지나칠 정도로 정성을 다해 그를 보살펴 주었습니다.
오직 노르망디의 사료 편찬 관들만이 이야기한 바이지만, 리샤르는 오스몽 (Osmond)이란 젊은 여인과 동행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젊은 여인은 리샤르가 위그 르 그랑의 지원을 받아 도망칠 때, 탈주를 도와준 여인입니다.
리샤르는 축제 분위기에 한껏 들떠있는 루앙으로 귀환하여 맘껏 자유를 만끽했습니다. 국왕과 공작이 노르망디를 분할하는 조정안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자 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죠. 위그가 아무런 공도 들이지 않고 손쉽게 브쌩 지역과 에브르생을 컨트롤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루이는 루무아와 코 지역을 접수하자마자 루앙에서 강한 반발에 봉착했습니다. 기욤 드 쥬미에쥬의 설명에 따르면, 루이는 루앙의 행정관인 라울 라 투르트를 신임했습니다. 그러나 이 프랑크 귀족은 뒤동의 이야기에 따르면 권력을 남용한 자였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까지 아주 인색한 인물이었죠.
[1] 앞면에는 십자가 무늬와 함께 기욤(WIILEMUS)이라 적혀있고 뒷면에는 역시 십자가 무늬와 함께 루앙의 왕자(ROTOMAGUS)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쟈끌린느 삐레 르미에르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