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53화
[대문 사진] 활래즈의 긴 검을 찬 기욤(기욤 롱그 에페) 조각상
중세 사가들인 뒤동에게서나 기욤 드 쥬미에쥬에게서나 롤로의 아들에 대한 호칭을 찾아보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12세기 초에 기록된 「정복왕 기욤(Guillaume le Conquérant)의 출생에 관한 간결한 이야기」에 처음으로 등장할 따름입니다.
‘롱그 에페(Longue-Épée, ‘긴 검을 찬’이란 뜻)라 불린 기욤’은 오흐데리크 비탈과 로베르 바스가 그들의 저술에서 사용한 별칭이었습니다. 기독교도였던 어머니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기욤은 자신 또한 기독교에 열성적이었죠. 기욤 몸 속을 흐르는 피의 절반이 프랑크 혈통이었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수긍할 만한 일입니다. 기욤은 또한 부왕 롤로의 시대에는 이루지 못한 대 건축물에 대한 복원을 확고히 밀어붙일만한 대단한 열정을 지니기까지 했습니다.
기욤은 브르타뉴에 위치한 몇몇 도성들을 빼앗는 데 성공했습니다. 931년에 루아르에 정주하고 있던 바이킹들에 대항하여 브르타뉴 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이에 개입하여 폭도들을 진압하기도 했죠.
12세기 초에 위그 드 흘뢰리가 펴낸 「근래에 일어난 일들」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노르망디의 왕자 기욤은 그들의 영토에 침입한 적들을 지속적으로 척결해 나갔다. 그는 브르타뉴 인들의 가장 강력한 우두머리였던 베랑제르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또 다른 우두머리였던 알랭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강경한 대응 전략을 구사했다. 이로써 기욤은 또다시 거의 모든 브르타뉴 지역을 힘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기욤은 ‘브르타뉴 인들의 공작’이란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의 이름을 새긴 동전을 주조하기도 했습니다. 이때가 933년으로 기욤이 라울 국왕과 아주 가까울 때였죠.
흘로도야르는 기술하기를 “기욤은 국왕에게 자신을 노르망디 인들의 공작으로 지명해 줄 것과 바닷가 연안 지역에 속한 브르타뉴 땅을 자신에게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기욤이 요구한 땅은 코탕탱(주변의 섬들을 포함한)과 아브랑생이었습니다.
이 지역 브르타뉴 인들은 독립을 주장하면서 프랑크 봉건계급에 가까운 권력자에게 증오심을 표출했습니다. 특히 코탕탱의 바이킹들은 브쌩 지역의 바이킹들과 연계해 있었고 리울푸스의 명령에 따라 폭동을 일으킨 자들이었죠. 리울푸스는 리울프(Rioulf)라고 불린 이 인물은 스칸디나비아 어로는 헤르욜프르(Herjólfr)라 불린 인물이기도 합니다.
리울푸스는 그들의 영토가 릴 강에 이르는 지역에 까지 이른다고 주장하고 이 지역을 우선적으로 양도할 것과 함께 나중에는 세느 강 지역까지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폭동을 상세히 언급한 뒤동 드 생 캉탱조차도 리울프라는 작자가 어느 지역 태생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게다가 「루의 이야기」에서 로베르 바스조차 코탕탱의 백작이라는 둥 근거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흐데리크 비탈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는데, 「교회의 역사」에서 기욤을 가리켜 에브뢰의 리울프라고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리울프는 코탕탱 지역과 에브뢰에 정주한 인물이자 모두가 스칸디나비아 인들이었던 한 무리의 바이킹 세력을 이끌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는 프랑크 왕국과는 접촉하지 않았으나 기욤의 권력에 상응하는 강력한 권력을 쥐락펴락했던 인물입니다.
하필이면 기욤과 리울프의 권력의 교착점이 코탕탱 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뒤동은 폭동을 해결하게 된 요인을 다음과 같이 논리 정연하게 설명합니다. 우선 기욤은 합의를 마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굳이 프랑크 왕국의 도움을 구하러 달려가지 않아도 될 만큼 조언과 권고를 통해 베르나르 르 다누아와 보똥을 설득함으로써 반역도들을 제압할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후에 반역도들이 루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오늘날 격전지 풀밭(Pré-de-la-Bataille)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곳으로 궤주함으로써 폭동은 일단락되었죠.
연대기는 폭동의 전말에 대해서 소상히 들려주지 않을뿐더러 뒤동은 습관적으로 날짜까지도 빠뜨렸습니다. 다만 이런 이야기만 전해오고 있을 뿐입니다. 요컨대 전투가 끝난 저녁에 “기욤은 전투에서 귀환하였다. 이 말 탄 기사는 훼깡에 도착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아들이 태어난 것이 전투에서 승리한 것보다 더 큰 행복이라 여겼다.” 이는 자신의 친부인 롤로가 저 세상으로 떠난 932년경에 발생한 리울프의 폭동으로 인해 942년까지 근 10년간을 질질 끌어온 반역도들과의 싸움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이어서 그 기쁨은 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흐데리크 비탈은 좀 더 이후에 이 같은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935년 에르베르 드 베르망두아와 위그 르 그랑에게 약속한 사항을 지키기 위해 기욤은 자신의 누이를 푸아티에의 백작 기욤 테트 에투프와 혼인시킵니다. 또한 리에갸르드의 손에는 위베르의 딸을 쥐어주었죠. 후사가 없던 이들의 결혼은 정치적인 상황을 최대한 고려한 처사였습니다.
더구나 기욤의 동거녀는 기욤 드 쥬미에쥬가 언급했듯이 ‘스프로타(Sprota)’라는 여인이었습니다. 흘로야도르의 말을 빌면, 그녀는 브르타뉴 태생이었습니다. 뒤동은 그녀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고 난 자식이라 해서 그 자식이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이듬해 라울 국왕이 사망하자 고위성직자들은 영국에 추방당한 단순왕 샤를의 아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샤를의 아들 루이 4세 우트르메르(Louis IV d’Outremer)는 라옹에서 국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기욤은 940년 새로이 국왕의 자리에 오른 루이 4세에게 다시 충성을 서약하고는 예전에 부친이었던 롤로에게 불하했던 땅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루이 4세의 아들 로태흐의 대부가 되겠다는 의사까지도 밝혔습니다.
기욤 롱그 에페의 성공은 왕국의 특권층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했지만, 기욤은 한층 고차원적으로 왕국에서의 자신의 영향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결국 기욤은 프랑크 국왕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938년 플랑드르의 백작이었던 아흐눌은 몽트뢰이 항구를 접수합니다. 깡슈에 위치한 이 항구는 원래 에흘루앵의 백작령에 속한 영지였습니다. 노르망디로 망명한 에흘루앵은 기욤의 도움을 받아서 도성을 건설하였죠. 그러나 아흐눌은 복수심에 불타던 중이었습니다.
942년 12월 17일 아흐눌은 기욤을 자신의 군대가 매복한 함정으로 끌어들였습니다. 피크뀌니와 가까운 솜므 섬에서 발생한 기욤에 대한 암살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집니다. 뒤동 드 생 캉탱은 그때의 사건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기욤이 강 지천을 건너갈 때였다. 악마의 네 아들들이었던 앙리, 발종, 로베르, 리둘프 이 네 사람은 큰 소리로 기욤을 부르고는 그들의 주군이 기욤에게 가장 큰 관심사항에 대한 비밀을 털어놓겠다고 말한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기욤은 작은 배를 타고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기욤이 탄 배가 섬 기슭에 닿자마자 4명의 작자들이(오! 애달프도다!) 달려들어 아무 죄 없는 왕자를 살해하였다. 기욤은 수심이 깊어 자신의 병사들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을 수가 없었다. 기욤을 돕기 위해 그를 찾아 나선 병사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잔인한 살인자들이 극비리에 너무도 경건하기만 했던 영웅의 시신까지 유기한 채 도주한 뒤였다.”
노르망디 인들은 그들의 백작을 성자이자 순교자로 여기고는 통곡했습니다. 시신은 열쇠로 채워진 관 안에 고이 모셔졌죠. 평소 종교적 축일 때마다 모습을 보이던 그에 대한 기억을 회상시키듯 고인이 된 기욤은 수도사의 복장을 단정히 차려입은 형상으로 관 뚜껑을 장식했습니다.
그런 뒤에 부왕 롤로가 잠들어 있는 루앙 대성당 안에 안장되었습니다. 노르망디 인들은 바이외에 있는 기욤의 아들을 찾아 사람을 보냈습니다. 기욤의 뒤를 이어 루앙 백작을 승계할 인물은 그러나 너무도 나이 어린아이였죠.
[1] 앞면에는 브르타뉴 인들의 공작 기욤(WILEIM DUX BRI(TONUM))이 적혀있고, 뒷면에는 십자가 문양과 함께 무적의 인물이란 글귀가 새겨있다. © 쟈끌린느 삐레 르미에르 사진.
[2] R. 텔리에 동판화. 1843년 쥘 자냉이 펴낸 『이야기로 읽는 노르망디』에서 인용. 개인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