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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로의 아내 포파

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24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바이외 시청사 앞에 자리한 포파 조각상


노르망디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롤로의 동반자는 포파(Poppa)란 여인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러나 이는 긴 검을 찬 기욤(기욤 롱그 에페)의 어머니가 그렇다는 뜻입니다. 기욤의 부친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입니다. 롤로의 아내 포파는 프랑크족이었을까요? 아니면 ‘바다 건너’ 저 너머에서 온 여인이었을까요?


뒤동 드 생 캉탱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롤로가 바이외를 점령했을 때 그녀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롤로는 889년경에 바이외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죠. 생 로(Saint-Lô)를 공격할 참이었기 때문입니다. 롤로는 생 로 도성을 약탈하고 수많은 포로들을 붙잡은 뒤, “포파란 이름의 한 젊은 여인”을 대동하고 나타났습니다.


“이 눈부신 옷차림으로 곱게 꾸미고, 화려한 가문 출신이며, 대단히 건장한 베랑제흐 왕자의 딸인 그녀와 그는 결혼을 통하여 하나가 되었다.”


여기서 언급된 베랑제흐는 뒤동이 잘못 기술한 것입니다. 만일 892년의 일이 정확하다면 베랑제흐는 이때 뇌스트리의 군대를 지휘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뒤동이 이야기한 사람은 아마도 931년 긴 검을 찬 기욤(기욤 롱그 에페)과 협상한 인물인 베랑제흐 드 렌 백작의 할아버지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베랑제흐는 바이킹들에 대항하여 브르타뉴 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브르타뉴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바이외 시청사 앞에 자리한 포파 조각상과 시청사 현관에 붙어있는 기념비.


기욤 드 쥬미에쥬가 저술한 「노르망디 공작들의 무훈시」는 포파가 롤로의 동거녀였음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롤로는 마을에서 포파란 이름의 매우 고상한 처녀를 알고 지냈는데, 그녀는 명문가문의 베랑제흐의 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롤로는 덴마크 식으로 그녀와 결혼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기욤이란 아들이 태어났고 제흐로크라는 이름을 가진 예쁜 딸이 생겼다.”


로베르 바스에 따르면, 「루의 이야기」에서 기술하기를 스칸디나비아 관습에 비추어 보건대 동거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포파 또한 너무 어리지 않았을까 하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롤로가 포파와의 결혼을 뒤로 미루었겠느냐고 반문하기까지 하죠.


“그녀는 아직 여인네다운 가슴을 갖추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젖가슴마저 빈약하기만 했다.”


브누아 드 생트 모흐는 반대로 그들의 사랑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롤로가 그녀를 보자마자 부드러운 사랑이

용솟음치는 걸 느꼈다네. 전혀 놀랄 만한 일도 아니지.”


“그의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네.

그녀를 본 순간 그는 한눈에 그녀에게 반했다네.”


그렇지만 롤로는 그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브누아는 말을 잇고 있습니다. 왜냐면 롤로는 단순왕 샤를의 딸인 지젤과 혼인하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젤은 아이를 낳지 못한 채 죽고 말죠. 그러자 롤로는 교회에서 포파와 결혼식을 올립니다.


「쥬미에쥬 연대기」에서는 지젤이 죽자 롤로는 “상리스의 백작인 기의 딸인 포파를 아내로 삼았다. 그녀는 베르나르의 누이이기도했다. 롤로와 포파는 기욤을 낳았다”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기 드 상리스는 에르베르 1세 드 베르망두아의 누이와 결혼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뒤동이 이야기한 바를 완전히 뒤엎는 것이죠. 포파는 전혀 같은 가계가 아닙니다. 그녀는 911년 조약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롤로와 결혼했을 따름입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결혼을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죠.


게다가 긴 검을 찬 기욤이 리울프르가 폭동을 일으키자 자신의 ‘삼촌’인 베르나르 드 상리스를 돌보고자 요청하고 나섰다는 것이 뒤동이 이야기하는 바라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이 말에 수긍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12세기에 로베르 드 토리니가 자문한 여인이 포파이고, 그녀는 바이외의 백작 베랑제흐의 딸이거나 혹은 상리스의 백작 베랑제의 조카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세 번째 문헌이 등장합니다. 이 문헌은 10세기에 노르망디에서 씌어진 것입니다. 롤로의 아들이 죽은 다음 얼마 있다거나 롤로의 딸이 아끼탠느와 푸아투의 백작부인이 되어 이 지역을 통치할 때이거나 간에, 943년경에 씌어진 「긴 검을 찬 기욤(Guillaume Longue-Épée)의 암살에 대한 애가(哀歌)」는 다른 문헌들과 극단적으로 대비를 이룹니다. 뒤동은 이 애가를 알고 있었음이 확실합니다. 적어도 뒤동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만큼은 분명합니다. 두 번째 시구에서는 기욤에 대한 과장으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기욤은


“저 바다 너머에서 태어났다.

이교도의 과오를 고집했던 아버지와

온유한 종교에 순종한 어머니 사이에서.”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롤로가 노르웨이 사람이라고 설명한 노르웨이의 문헌을 상기시켜 줍니다. 「아이슬란드 식민지인들에 관한 명부」는 노르웨이 인인 비요흔이라 불린 소작인의 손자 헬기라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비오란 국왕과 건각자 흐롤프르의 딸인 카올린(Kaðlín) 사이에서 난 딸인 니오브요르그(Niðbjőrg)를 납치했다.”


롤로는 노르웨이에서 추방됩니다. 그리고 아일랜드에서 해적질을 일삼죠. 그곳에서 롤로는 또한 여자들을 겁탈했을 것입니다. 그는 함께 살 여자로 켈트 족 여인이자 기독교도인 젊은 여자를 골랐겠죠. 아이슬란드 문헌에는 정확한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그녀는 카올린(Kaðlín)이라는 아일랜드에 사는 켈트 족 이름인 세례명을 지닌 처녀였습니다. 이 처녀는 바로 헤브리디즈 군도의 국왕 비오란과 결혼했던 여자입니다. 그들 사이에서는 딸 니오브요르그(Niðbjőrg)가 태어났는데, 딸은 바이킹 해적들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이 젊은 여인이 포파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건각자 흐롤프르는 바로 뇌스트리로 왔기 때문이죠. 흐롤프르는 부성애에 사로잡혀 아들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아들이 훗날 긴 검을 찬 기욤(기욤 롱그 에페)입니다.


이 같은 논지는 롤로가 노르웨이 인이라는 설을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노르웨이인들은 아일랜드 해상을 수시로 오갔습니다. 해역에서 덴마크 인들 역시 해적질을 일삼았다고 문헌은 전해줍니다.


만일 롤로가 덴마크 인이고 그의 아들이 기독교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저 바다 건너에서 태어났다면, 포파는 앵글로 색슨(또는 앵글로 덴마크) 계통의 여인이어야만 합니다. 놀랍게도 노르망디 역사학자들은 한 목소리로 롤로가 영국에 체재할 당시의 롤로와 영국 왕 아틀스탄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긴 검을 찬 기욤은 그 자신이 앵글로 색슨 왕조와 특권층 관계에 놓이기를 시도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리우프가 폭동을 일으키자 롤로는 임신한 ‘아내’를 훼깡에 데려왔다고 뒤동은 주장하기싸지 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훼깡에 정주했다고 덧붙입니다. 이는 그녀가 영국을 떠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폭동이 승리로 귀결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망명을 택해야만 했던 이유로 말미암은 것이죠.






[1] 조각상은 에밀 데꼬흐슈몽가 1988년에 제작한 것입니다. 사진 앙투안 베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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