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51화
[대문 사진] 긴 검을 찬 기욤(Guillaume Longue-Épée) [1]
뒤동 드 생 캉탱은 롤로를 가리켜 ‘노르망디 공작’이란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로베르 공작’(세례명에서 비롯한)이라 부르기도 했죠. 게다가 리샤르 2세 치하에서는 리샤르 2세를 가리켜 진정한 의미에서 공작의 작위를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문서나 문헌들에서는 한결같이 리샤르 1세와 마찬가지로 리샤르 2세에 대해 ‘루앙의 백작’이란 칭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간혹 서로 합의를 이루고 정한 듯한 ‘후작’이란 호칭도 보입니다. 이는 그들이 영토를 수호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프랑크 왕국의 역사가들이 이어나간 롤로와 그의 아들 긴 검을 찬 기욤(기욤 롱그 에페) 연대기에서 불려지고 있는 이들에 대한 호칭을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노르망디’는 분명 공작령이기 전에는 ‘백작령’이었기 때문이죠.
단순왕 샤를로부터 롤로에게로 영토에 대한 이양이 이루어지는 동안 이따금씩 노르망디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조명한 동시대 문헌들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롤로의 세례는 그의 수도가 된 루앙에서의 종교적 삶을 소생시켜야 하는 막중한 의무를 띠고 있었던 것이죠.
대주교와 함께 롤로의 자문관이 된 뒤동은 정치와 종교에 대한 자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뒤동은 프랑크 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프랑크 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롤로의 협력자가 되면서부터 세속에 속한 교회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줌과 동시에 지역 주민들과의 화해를 시도했습니다.
뒤동은 루앙의 대주교의 도움을 받아 루앙 대성당과 생투앙의 수도원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자 노력했죠. 이러한 노력은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10세기 내내 이곳에서는 수사본들이 필사되고 제작될 수 있었던 요인이 그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롤로의 아들이었던 긴 검을 찬 기욤(기욤 롱그 에페) 시대에는 쥬미에쥬 수도원을 재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쥬미에쥬의 성 베드로 성당이 복원되었으며, 몽생미셸의 교회 참사회원들에게는 아브랑생의 영지들이 하사되었습니다.
노르망디의 주교좌에 주교들이 모두 채워지기까지는 적어도 세기말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일단 리지외, 세 그리고 아브랑슈는 리샤르 1세 때 주교좌가 정상으로 자리 잡았고 꾸탕스의 주교좌는 1049년이 되어서야 마침내 주교가 임명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코탕탱 지역은 통제 불능의 상태에서 바이킹들의 정주가 이루어지고 이로 말미암아 기독교도들의 이탈이 가속화되었죠. 시골의 작은 교회들은 그렇게까지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할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지만, 바이킹들의 계속되는 침공은 성직자의 이탈을 불러일으켜 점점 힘든 상황에 직면하게 만들었습니다. 실상 교회가 다시 그곳에 뿌리를 내리는 것조차 불확실해져 갔습니다.
수도원의 재건은 점차적으로 서서히 이루어졌습니다. 교회 유산에 대한 복원과 복구는 롤로 때 그 초안이 마련되어 아들 긴 검을 찬 기욤이 이어가다 정복왕 기욤 때 완성되었습니다.
몇몇 수도원들은 그와 같이 자신들이 원래 소유하고 있던 땅들을 되돌려달라고 간청했죠. 수도사들이 수도원에 다시 복귀한 것도 그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리샤르 1세는 생 방드리유 수도원을 우선적으로 도왔으며, 966년에는 몽생미셸을 방문했습니다. 훼깡에 교회 참사회원들의 정결한 공동체를 재건한 리샤르 1세는 또한 노르망디의 모든 귀족구성원들에게 교회의 재산과 재물에 대한 원상복구와 이를 강력히 시행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1] 긴 검을 찬 기욤(Guillaume Longue-Épée), 13세기, © 쥬미에쥬 수도원 사진.
[2] © 덴마크 스콜 뮤지엄(Skolemuse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