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의 수장 롤로와 아내 포파

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22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루앙 대성당 인근 공원에 있는 롤로의 조각상


가끔씩 롤로와 포파의 관계가 조작되고 날조되었다는 논란이 제기되면서 과연 이 두 사람이 ‘실제’ 부부였느냐 아니었느냐 라는 추론마저 일고 있습니다. 과연 두 사람은 실제 존재했던 인물들일까요? 그렇다면 그들은 어느 곳에서 온 사람들이었을까요? 노르망디 공작과 영국 왕을 계승했던 이들 또한 실제의 인물들이 맞을까요? 이 모든 의문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프랑크 왕국의 문헌들은 그와 같은 문제를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롤로의 이름은 918년 3월 14일 자의 단순왕 샤를의 칙서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이 수도원만 제외하고 우리는 롤로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왕국을 보호할 목적으로 세느 강이 흐르는 노르망디를 할양한다.”


흘로도야르가 쓴 「연대기」 역시 이보다 훨씬 명료하게 기술한 것은 아닙니다. 925년 위(Eu) 성채에 대한 암시가 깔려 있을 뿐입니다. “노르망디의 우두머리 롤로”라고 기술하면서 “루앙에 수천의 병사를 파병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전해오는 전설들은 서로가 양립하고 있습니다. 즉, 노르망디(la normande)를 덴마크 인인 롤로가 건설한 곳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북서지역(la norroise)이 노르웨이를 가리키는 것이냐 하는 논란이 그것입니다.



롤로는 덴마크 인?


노르망디에 관한 모든 문헌들은 뒤동(Dudon)과 관계가 있습니다. 965년경 태어난 뒤동은 생깡탱 교회 참사회소속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987년 베르망두아 백작에 의해 루앙으로 파견되었죠. 이후 리샤르 1세 때부터 대사로 활약했습니다. 리샤르 1세는 뒤동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샀습니다. 재능이 뛰어난 그는 죽기 전 2년간을 선조들의 역사를 집필하는데 바쳤습니다.


뒤동이 쓴 「노르망디인들 이야기(Histoire des Normands)」는 1015년에서 1026년까지 리샤르 1세를 계승한 리샤르 2세 공작 때 완성되었습니다. 뒤동은 리샤르2세가 다니던 교회의 본당신부이기도 했죠. 리샤르 1세와 형제였던 라울 디브리가 전적으로 제공한 글로 씌어진 문헌들이나 구전되어 오는 모든 자료들을 토대로 뒤동은 서사시의 형식으로, 모든 문체에 능통한 라틴어로, 무엇보다도 먼저 젊디 젊은 노르망디 왕국에 대한 찬사를 바치려 노력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그의 저서가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에 대해 반신반의했지만, 최근 몇 명의 역사학자들은 그의 저술을 재독한 뒤 상당히 가치가 높은 문헌임을 증명하기도 했습니다.


「노르망디 인들 이야기」에서 뒤동은 롤로에 대해 ‘다시(Dacie)’의 군사 우두머리의 아들[1]이었으며, 부유했고 힘셌고, 그의 죽음이 바이킹들에 대한 국왕의 적대적인 반감을 불러일으켰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뒤동의 뒤를 이은 모든 사료 편찬관들은 롤로를 덴마크 인으로 간주했죠. 대표적인 사람이 기욤 드 쥬미에쥬(Guillaume de Jumièges)인데, 그는 뒤동이 사용한 ‘다시’란 용어대신 ‘다스(Daces)’와 ‘다시(Dacie)’란 단어로 대체했습니다. 이는 ‘덴마크 인(Danois)’ 그리고 ‘덴마크(Danemark)’란 말에 상응하는 용어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수도사들이 기록한 것에 근거하여 확신을 갖고 롤로에 대한 인상을 바이킹의 이미지로 묘사했습니다.


오흐데리크 비탈(Ordéric Vital) 또한 호베르 꾸흐뜨외즈를 가리켜 정복왕 기욤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이라 지칭하면서 “우리의 선조들께서는 롤로와 함께 덴마크에서 왔습니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로베르 바스(Robert Wace)는 「루의 이야기(Roman de Rou)」를 통해 영웅의 행적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브누아 드 생트 모흐(Benoît de Sainte-Maure)는 「노르망디 공작들의 연대기(Chronique des ducs de Normandie)」를 통해 롤로에게 수 만 편의 송가를 헌정하기도 했죠.


가장 오래된 필사본 [2]


반면에 12세기 덴마크에서 씌어진 연대기 작가 삭소 그라마티쿠스의 저술 「덴마크 인들의 무훈시(Geste des Danois)」에는 롤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의 저술에는 노르망디를 식민지화했다는 어떠한 언급조차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3세기부터 뒤늦게나마 조금씩 몇몇 문헌에서 간결하게 롤로가 덴마크 인이라는 언급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리(Ry) 연대기」에서는 “롤로, 덴마크 인들의 우두머리”란 표현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죠.


뒤동은 롤로의 아버지 이름을 적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리쉐흐(Richer)는 10세기말에 「프랑스 역사(Histoire de France)」에서 롤로의 아버지 이름인 케틸(Ketill)을 카틸루스(Catillus)란 이름으로 변형시켜 부르고 있습니다.


아들인 롤로와 롤로의 형제인 귀림(Gurim)(이 또한 고름(Gorm)을 변형시킨 경우입니다)은 국왕인 아버지에게 반역을 꾀하고 그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귀림은 살해되었고 롤로는 도망쳤습니다. 롤로와 귀림은 셸란 섬에 위치한 아마도 확스(Faxe)가 틀림없는 ‘화스쥬(Fasge)’에서 포위 공격을 당했다고 브누아 드 생트 모흐는 들려줍니다. 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아주 뒤늦게 12세기말이 되어서야 씌어졌습니다.


확스(Faxe) 만 초입에 해당하는 스테븐스(Stevns) 단애. 개인 소장 사진.
20세기 초 ‘확스(Faxe)의 장날 풍경’ [3]


스카니임에 틀림없는 스칸자를 도망친 롤로는 바로 영국으로 배를 타고 도피했습니다. 그곳에서 롤로는 전투를 개시했죠. 그런 뒤에 알스테무스 왕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여기서 알스테무스는 아마도 871년부터 899년까지 국왕의 자리에 있었던 알프레드 르 그랑과 같은 인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스테무스 왕은 924년에 국왕의 자리에 오른 아틀스탄과 혼동하지 않았을까 짐작되기도 합니다. 아틀스탄이란 인물은 세례를 받은 뒤 알프레드 국왕으로부터 아텔스탄이란 이름을 얻은 덴마크의 또 다른 우두머리였습니다.


다시 말해 88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죠. 롤로는 얼마간의 영국 전사들을 끌어 모은 뒤 프리슬란트로의 긴 원정을 시도합니다. 특이하게도 발슈렌 섬을 휩쓴 뒤 에스꼬 강 연안은 내버려 둔 채 세느 강 하구에 도착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뒤동이 롤로의 ‘다시’로부터 뇌스트리까지의 편력기를 그리기 위해 여러 다양한 참고문헌을 참조했다는 점입니다. 또한 이 편력기에서 내내 롤로란 인물을 아주 ‘괜찮은’ 바이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알스팅구스 / 하슈타인은 아주 ‘나쁜 인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즉, 롤로는 노르망디를 더욱 발전시키고 또한 노르망디 공작들의 계보의 맨 윗줄에 놓이기에 충분한 탁월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죠. 결국 뒤동은 그렇듯 롤로를 역사적 인물로 창조한 셈입니다.


롤로가 덴마크의 확스에서 출생했음을 알리는 기념비. 폴 브론둥 사진.


뒤동이 롤로가 뇌스트리에 도착한 시기를 876년이라 한 것은 참으로 인색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때 롤로가 뇌스트리에 도착한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생 베흐탱 연대기」에도 롤로가 ‘노르망디인들(Normands)’로 구성된 선단을 이끌고 세느 강에 도착한 시기를 876년 9월 16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더 정확한 연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쥬미에쥬 연대기」에서 조차 유일하게 “롤로가 무리를 이끌고 노르망디에 도착한 때는 11월 17일이었다.”라고만 언급하고 있죠.


이는 12세기말에 루앙에서 제작한 기초문헌들(11세기말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현존하지 않습니다)을 재편집하면서 아주 뒤늦게 그 시기를 언급한 것입니다. 게다가 뒤동이 기술한 기독교적 표현에 자리한 내포적 의미를 띤 표현들을 너무 자주 차용하고 있는 것도 눈에 거슬립니다.


예를 들어 롤로가 배에서 신중하게 운반해 온 아멜트뤼드 성녀의 유골함을 생 바스트 교회(쥬미에쥬에서 가까운)에 기탁했을 때를 묘사하기 위한 표현으로 ‘신성한 메시지들’이라든가 ‘예언적 꿈들’ 또는 ‘경건함으로 가득 찬 믿기 어려운 순간’ 등 표현상의 지나친 비약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쯤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바이킹들의 행적을 늘 화려한 미사여구로 채색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파리에 대한 침공으로부터 바이외나 에브뢰에 대한 점령, 심지어는 알스테무스 국왕을 구출하기 위해 영국으로 날아가는 장면 등, 이 모든 것이 시기적으로 가능치 않은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만일 뒤동이 자신의 입장에서 자유자재로 초기문헌 자료들을 이용하고 이를 정당화한 것이라면, 망슈 해협을 사이에 두고 두 연안 사이에 바이킹들이 건설한 왕국의 우두머리로 롤로를 내세운 것이 틀림없으며, 이를 위해 영웅으로 각색한 인물에 화려한 군사적 이력을 덧붙이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로 채색했으리라 짐작될 뿐입니다.


1870년경 폴 시몬 크리스티안젠이 그린「노르망디에 상륙하는 롤로의 선단」, © 오르후스 미술관, 오르후스.


끝으로 뒤동은 롤로를 부르고뉴에 끌어들이기도 했습니다. 롤로가 부르고뉴를 침공한 시기를 898년이라 명백하게 적시하기까지 했죠. 부르고뉴 지역에 이어 롤로는 옥세르를 침략하고자 시도했으며, 샤르트르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기도 합니다. 「생 피에르 드 베즈 연대기」는 롤로가 실패하였다는 것까지도 상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대의 문헌들 가운데에는 롤로를 이처럼 언급한 어떠한 문헌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1] 이는 롤로가 덴마크와 관련이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2] 뒤동 드 생 캉탱이 기록한 글과 함께 기욤 드 쥬미에쥬의 기록 또한 같은 쪽에 실려 있습니다(11-12세기). © 루앙 시립도서관.


[3] 1920년경에 클로젠과 닐슨이 촬영한 사진집 『덴마크 땅』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개인 소장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