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로는 노르웨이 인이었나?

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23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노르웨이의 알레순트 시에 있는 롤로의 조각상과 기념비


노르웨이에서 발견되는 롤로에 관한 이야기들은 모두 글로 씌어진 것들이며 후에 기술된 것들입니다. 이 가운데에 가장 이른 시기에 씌어진 것이 13세기 초에 나온 아이슬란드 사가(Saga)[1]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1100년 1125년 사이에 이미 아이슬란드에서 편집한 「식민지 건설에 관한 장부」가 나왔습니다. 이 문헌에는 건각자 흐롤프르(Göngu-Hrólfr)가 뫼레 지방의 노르웨이 인 왕자(jarl) 뢰근발드르의 아들(노르망디를 정복한)로 나옵니다.


하지만 12세기 초반 에아리 도흐질쏜이 편집한 「아이슬란드 인들의 명부」에서는 어디에도 노르망디와의 관계를 추론해 볼만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홀라우그르(Hrollaugr)가 아이슬란드에 정착한 뢰근발드르의 아들이라고만 나옵니다.


루앙과 엘뵈프 사이 세느 강가에서 발견된 바이킹의 검(9세기 후반). 요한 데슬란드 사진. © 루앙 고대박물관.


가장 오래된 사가인 1190년경에 씌어진 「오크니 군도 사람들의 전설」에도 건각자 흐홀프르 이름이 등장합니다.


“뢰근발드르(Rögnvaldr) 왕자는 나라를 굴복시키고 아름다운 머리를 한 하랄드르를 데리고 왔다. 하랄드르는 왕자에게 뫼레와 롬스달을 바쳤다. 왕자는 흐롤프르 네흐야의 딸인 하근힐드르를 아내로 삼았다. 그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노르망디를 정복한 흐롤프르(Hrólfr)다.”


사가는 또한 뢰근발드르 왕자가 또 다른 아이들을 나았는데, 왕세자가 아닌 다른 여자들 사이에서 흐롤오우그르와 어린 아이나르를 나았다고 전합니다. 나이 어린 아들은 토르프 아이나르(하층민)란 이름으로 불렸죠. 이 아이는 훗날 오크니 군도의 왕자가 되어 그에 관한 이야기가 사가에까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아주 짤막한 이야기에 속합니다.


롤로가 태어난 곳으로 추정되는 알레순트(Ālesund) 남쪽 지스크(Giske) 섬. 1890년경 페데르 지스크 유화. 개인 소장.
지스크 섬의 작은 항구와 12세기 때 지어진 교회. 엘리아스 H. 지스크 사진.


롤로를 지칭하는 또 다른 인명은 「아름다운 머리를 한 하랄드르 사가」에도 등장합니다. 사가는 1230년경 스노리 스투흐룰손이 편집한 「국왕의 사가」에 해당합니다. 여기에 건각자 흐롤프르의 영웅담이 몇 구절 등장하는데, 스노리는 사실 발틱 해에서 돌아온 바이킹 원정대의 귀환을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사가에 따르면, 흐롤프르는 단숨에 바이크(Vik)가 되었습니다. 흐롤프르의 이 점이 하랄드르 국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죠. 그래서 국왕은 흐롤프르를 노르웨이에서 어떠한 행동을 하는 것도 금지했습니다.


흐롤프르는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했죠. 흐롤프르 어머니인 힐드르는 지극정성으로 국왕과 자신의 아들을 중재했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스노리는 고대 스칸디나비아의 시인의 시구로 힐드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흐롤프르는 어느 날 홀연히 헤브리디즈 군도로 배를 타고 떠납니다. 그는 이곳을 출발하여 다시 뇌스트리를 침략합니다.


스노리 손을 거친 또 다른 ‘국왕의 사가’ 「생 올라프르 사가」는 건각자 흐롤프르의 존재를 부각시킵니다.


“흐롤프르를 계승한 루앙의 왕자들은 오랫동안 노르웨이 우두머리들의 양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서로 존중했다. 그들은 서로 대단히 공경하였고, 항상 노르웨이 인들의 가장 좋은 친구들이었다.”


스노리는 사가에서 명확하게 노르망디 공작들과 노르웨이 국왕 간의 유대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14세기에 씌어진 「건각자 흐롤프르 사가」에도 흐롤프르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민간 전설’에 기초한 것으로써 사가에 등장하는 영웅은 흐롤프르와 어떠한 공통점도 없습니다.


사가에는 흐롤프르가 국왕 링제리크와 왕비 아사 사이에서 난 스튜흘로우그르의 아들이라고만 나옵니다. 고고학자들은 오세베르크에서 건져낸 배 안에서 시신을 발견했는데, 아마도 이 시신이 주인공일 것이라고 믿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무훈담은 대부분이 노르망디와는 거리가 먼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펼쳐진 지역(러시아)에서 벌어진 일들을 적은 것에 불과합니다.


루앙 시가 노르웨이의 알레순트 시에 기증한 루앙에 있는 롤로의 조각상을 복제한 청동 조각상과 기념비. 카리나 클레이바 사진.


노르웨이 어로 씌어진 문헌들은 대개가 다 롤로가 뇌스트리에까지 종횡무진한 것에 대해서만큼은 어떠한 믿을 만한 구석도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1200년경에 노르웨이어와 라틴어로 씌어진 「노르웨이 역사」는 ‘강력한’ 로근발두스(Rognwaldus)의 가문이 이끄는 노르웨이 바이킹들이 오크니 군도를 정복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문헌에 등장하는 또 다른 언어로 씌어진 동일인물이 바로 로둘푸스(Rodulfus)인데 – 그의 동료들이 ‘곤구홀프르(Gongurolfr)’라 부른 – 그가 바로 루앙을 침략한 인물에 해당합니다. 세느 강 굽이에 15척의 배들을 숨겨둔 바이킹들은 넓게 땅을 파고 들어앉아 나뭇가지와 풀들로 위장한 채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망친 바이킹들을 악착같이 추적해간 주민들은 모두 구덩이 안으로 굴러 떨어지고 참혹하게 살해당하고 말았죠. 자! 이렇게 되어 마침내 “그는 노르망디를 정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스칸디나비아 문헌에서 프랑크 왕국에서 벌어진 롤로의 군대가 벌인 행적을 상세하게 다뤘다는 거의 유일한 문헌입니다. 여기서 흐롤프르(Hrólfr)를 라틴어로 베껴 쓰다 보니 로둘푸스(Rodulfus)가 된 것이죠. 이는 웨일즈 어로 씌어진 문헌, 즉 1137년 웨일즈의 왕 그뤼피드가 사망한 뒤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펴낸 「시난에서의 그뤼피드의 삶」에서도 똑같이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르웨이 국왕 ‘하랄드 하르하지르’의 형제인 ‘로둘프(Rodulf)’는 국왕을 아일랜드로 데려가기도 하며 그와 함께 선단을 구성하여 훗날 노르망디를 침공하기에 이릅니다.


노르웨이의 전설은 872년 하프르스피요로드 전투를 승리로 이끈 하랄드 국왕이 단일대오를 형성하여 통치하였음을 들려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죠. 전투는 적어도 10년 뒤에나 벌어졌고, 이 시기에 흐롤프르는 뇌스트리에 상륙할 수도 없었으며, 세기가 바뀌어야 만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뒤동 드 생 캉탱이나 아이슬란드 중세 작가들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어떠한 신뢰할 만한 기록도 존재한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롤로는 과연 이미 탄탄한 왕국이 건설된 유럽 대륙의 변방에 속하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것일까? 확실히 말해두지만 두 전설 역시 신뢰할 만한 어떠한 근거도 없습니다.


먼저 첫 번째의 경우 뒤동은 노르망디 공작들의 성공을 이야기함으로써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구전되는 일화들을 적당히 섞어 마치 실제 있었던 사건처럼 꾸몄습니다. 그러나 뒤동의 저술은 모든 전설들을 취합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이란 형식 속에 감춰져 있는 역사적 실체를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요컨대 뒤동은 롤로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확실한 근거를 갖추고 그를 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롤로의 손자나 증손자들에 관한 정보를 이용하고 있는 경우 역시 같은 경우에 속합니다.


두 번째 경우에 있어서는 노르망디를 정복했다는 상세한 설명도 없이 그에 대해 사가들이 모두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다는 점은 미심쩍기까지 하죠. 그 많은 사가들이 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건각자 흐롤프르의 행적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이 오직 단 한 줄로 “그는 노르망디를 정복했다”라고 표현한 것은 흐롤프르의 공적을 축소하려는 의도로밖에 해석될 수 있는 요소가 다분합니다.


더해서 그에게 이상한 별명까지 갖다 붙인 것은 해괴망측한 일이기까지 합니다. 적어도 노르망디에서 롤로가 이상한 가명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롤로가 ‘제흐로크(Gerloc)’란 딸이 있었다는 노르망디 구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기욤 드 쥬미에쥬가 언급한 것입니다. 그녀는 세례를 받은 뒤에는 아델이란 이름으로 불렸죠. 제흐로크란 이름은 명백하게 노르웨이 어로 ‘게흘라우그(Geirlaug)’란 이름을 고쳐 쓴 경우에 해당합니다.


이렇듯 오랫동안 노르웨이 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이름을 고집했다는 점에서 롤로 역시 노르웨이 인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바이킹 시대의 이름(이 이름은 14세기부터 일반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습니다)이 오직 그와 같은 유일한 단 하나만의 증거에 의해 롤로를 노르웨이 인이라 판단할 것이 아니라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즉, 제흐로크란 이름은 덴마크어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죠. 이 이름은 덴마크 어 ‘게흘로그(Gerløgh)’란 이름과 형태가 똑같습니다(13세기 문헌에 등장하는). 스웨덴의 룬 문자에서도 똑같은 형태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다시 말해 이 이름은 스칸디나비아 전역에 널리 퍼진 이름이었던 셈입니다. 따라서 롤로 역시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에서도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1912년 7월 루앙 시가 두 번째로 화르고 시(다코타 북쪽)에 기증한 루앙에 있는 롤로의 조각상을 복제한 청동 조각상 제막식.




[1] 사가(Saga)란 중세 북구 문학의 장르로써 전설, 영웅담을 뜻하는 용어.


[2] 기념엽서. 1912. © 지방 연구 학회. NDSU 도서관. 화르고.






롤로가 태어난 곳으로 추정되는 노르웨이 알레순트 시 지스크 섬의 오늘날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