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클레흐 쉬흐 엪트 조약

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26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생 클레흐 쉬흐 엪트 조약 현장


911년 여름이 한창이던 때 샤르트르를 공격한 바이킹들은 돌연 <생 클레흐 쉬흐 엪트 조약>이라 부른 협약에 조인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분명코 군사적으로 프랑크 왕국과 대적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점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기도 하지만, 프랑크 왕국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바이킹들의 위협 역시 그만큼 무시할 수 없었다는 점을 환기시켜주고 있습니다.





897년에 접어들면서 단순왕 샤를은 바이킹의 우두머리인 훈디(Hundi)와 협정을 맺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랭스의 훌끄 대주교가 이를 단호하게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대주교의 뒤를 이은 에르베 대법관은 그와 반대로 국왕의 지극히 화해적이고도 타협적인 태도를 환영해 마지않았죠. 또한 합의될 협약에 대해서도 전혀 반감을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남은 문제는 바이킹의 우두머리로 하여금 조약에 명시된 협약의 내용을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과 왕국의 고위성직자와 귀족들에게 항구적인 평화를 위한 영토의 일부를 바이킹들에게 양도한다는 각서를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단순왕 샤를은 이 같은 협약을 오랫동안 구상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9세기 내내 선대왕들(경건왕 루이, 로태흐 1세, 뚱보왕 샤를)이 여러 차례에 걸쳐 바이킹들에게 프리슬란트의 영토를 분할하여 불하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스칸디나비아 식민지였던 프리슬란트 군도가 아니라 뇌스트리였습니다. 이 둘은 전혀 성격이 달랐습니다. 뇌스트리는 프랑크 왕국의 문명에 의한 문화의 향상이 점진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었죠. 따라서 이러한 양도는 일시적이며 한정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롤로가 샤를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장면을 담은 석판화. 『작은 국립박물관』에서 인용. [1]


바이킹들이 어떤 목적으로 뇌스트리에 몰려왔는지는 롤로가 세느 강 저지대를 아무 저항 없이 휩쓸고 다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이킹들은 카롤링거 왕조의 사회 문화적 시스템을 친숙하게 받아들일 만큼 오랫동안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루앙의 대주교였을 것이라 짐작되는 기(Gui)는 롤로와 국왕 간을 우선적으로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뒤동은 이 시기에 루앙의 주교는 기가 아니라 그의 후계자인 프랑콩(Francon)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뒤동의 「노르망디 인들 이야기」는 이미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난 다음에 한 세기가 흐른 뒤에 씌어진 것이고, 911년의 <조약>을 명백하게 묘사한 거의 유일한 저술임에 틀림없지만, 몇몇 부분에 있어서는 더 오래된 문헌들에 기초하여 이야기를 개진해 나가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919년에 시작한 「연대기」에서 흘로도야르는 911년에 이루어진 조약에 대해 여러 차례 암시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948-952년경에 완성한 「랭스 교회의 역사」에서도 그러한 암시가 짙게 깔려있습니다.


생 제르맹 데 프레의 수도사들에게 하사할 것을 고려하여 작성된 단순왕 샤를의 918년 3월 14일 자 칙서에는 조약의 조항들에 대한 존중의 뜻이 표명되어 있기도 합니다.


뒤동은 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담판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습니다. 뒤동이 이야기하기를, 루앙의 대주교는 과연 국왕과 바이킹 우두머리 간의 협상을 능수능란하게 이끌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인물인가 하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대주교는 회담이 채 종결되기도 전에 3개월의 유예기간이 만료되는 사태에 직면하고 말았지 않았음에도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뇌스트리의 후작이었던 로베르야말로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이들의 차이점에 대해 십중팔구 잘 알고 있었던 관계로 이러한 차이점들마저 최대한 좁히려 노력한 인물이 로베르였지 않았을까 하는 결론을 내리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로베르가 지지했던 롤로를 협상자들이 신임할 수 있도록 그 자신이 분위기를 띄우면서 그가 추천한 인물을 천거하는데 유리한 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국왕과의 협상에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롤로가 이를 수락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10세기 때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생 클레흐 쉬흐 엪트 교회의 제단. [2]


또한 뒤동은 엪트 강가에 위치한 ‘생 클레흐’에서 이루어진 두 사람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생 클레흐는 파리와 루앙 간의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 로마 가도가 지나가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뒤동은 정확하게 언제였는지 시기는 밝히지 않고 있죠. 다만 911년 가을이라고만 짐작했습니다.


이 시기는 국왕이 912년 초에 발생한 로렌 지역에 침입한 세력들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에 참가하기 전이었던 관계로, 또한 뒤동은 912년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롤로가 아직 세례를 받기 전이 이 시기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회담한 장소 역시 타당성 있는 근거에 바탕을 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회담 장소만큼은 분명합니다.


만남이 이루어진 날 거창한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왜냐면 뒤동의 이야기에 따르면, 롤로가 두 개의 새로운 요구조건을 들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롤로는 이미 그에게 할양된 황폐화된 땅들 말고도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영토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주어질 땅이 영원할 것임을 확약하고자 이 땅에 사는 모든 프랑크족들이 성물함에 손을 얹고 서약이 유효함을 맹세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로베르와 귀족들은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국왕을 납득시켰죠. 롤로는 그에게 제안된 플랑드르 지방을 거부하였습니다. 플랑드르는 늪지대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점령한 영토에 인접한 브르타뉴 지역은 받아들였죠. 물론 브르타뉴 전체가 롤로에게 할양된 것은 아닙니다.


918년에 씌어진 흘로도야르의 「연대기」가 언급한 바에 따르면, 오늘날 노르망디에 속한 코탕탱 지역과 아브랑생 지역은 867년에는 브르타뉴에 속해 있었습니다. 롤로는 이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죠. 다시 말해,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징수할 권한을 요구하고 나선 것입니다.


뒤동은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조약> 조인식에 대해서도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롤로를 단순왕 샤를이 앉아있는 곳으로 안내한 사람은 뇌스트리의 후작과 대주교였습니다.



롤로는



“국왕과의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지척에 자리 잡았다. 이는 국왕의 부왕이나 조부, 증조부 때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국왕은 공작이 된 롤로에게 자신의 딸 지젤(Gisèle)을 배필로 천거했다. 롤로는 이로써 엪트 강에서 바다에 이르는 땅과 자유지 그에 더해 브르타뉴까지 한데 아울러 모든 지역을 다스리는 공작으로 등극했다.”


뒤동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담까지 등장시킵니다. 그러나 기담은 두 사람 사이에 행해진 의식을 묘사한 것으로써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만일 롤로가 국왕이 앉은 곳으로부터 지척거리에 자리했다면 이는 롤로가 국왕에 예속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대단히 상징적인 사건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롤로는 무릎을 꿇고 국왕의 발에 입 맞추는 것을 거부했죠. 대신 그를 따르는 무리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렇게 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 작자는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국왕의 발을 잡았다. 그리고 입 맞추려고 국왕의 발을 잡아당기면서 일어서자 그만 국왕이 뒤로 나자빠졌다.” 이때 참석자들 사이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고, 이후에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훼르디낭 라핀이 그린 단순왕 샤를이 뒤로 넘어지는 장면을 담은 삽화. [3]


이어서 프랑크 인들이 준비한 성대한 서약식이 뒤따랐습니다. 프랑크 인들은 “귀족이 된 롤로가 자신들은 물론 왕국의 명예에 합당한 처사로 가톨릭 신자가 될 것을 요청했다. 이로써 롤로는 비록 제한된 지역이나마 자신이 점령한 땅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는 (조약에 명시된 지역이) 자자손손 대대로 유산으로 상속됨과 동시에 그 자신은 물론이고 후손들에 의해 경영될 것이란 점이 확실”해졌습니다.


단순왕 샤를과 롤로 사이에 이루어진 ‘생 클레흐 쉬흐 엪트 조약’은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요컨대 이 정치적 사건은 더 이상 연장될 수 없는 막바지에 이루어진 결정이었죠. 이로써 마침내 노르망디 공작령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생 클레흐 쉬흐 엪트 성 입구 통로. 옛날에 카롤링거 왕조 때 궁전이 있던 자리입니다.





[1] 이 석판화는 1845년 파리에서 Ch. 르타이유가 학구적인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상의 시청각 교재로 제작하였습니다. © 캉 노르망디 박물관.


[2] 생 클레흐 쉬흐 엪트 교회는 911년 조약이 체결된 장소입니다.


[3] 1932년 A. 애마르가 펴낸 『프랑스 역사』에서 인용. © 캉 노르망디 박물관.



매거진의 이전글롤로는 스칸디나비아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