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토 확장

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27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롤로와 단순왕 샤를


롤로에게 할양된 영토는 어디까지 확장되었을까요? 뒤동은 이에 대해 설명하기를 처음에 기획한 바로는 ‘앙델르(Andelle)에서 바다에 이르는’ 지역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앙델르는 바이킹에 의해 점령된 프랑크 왕국과의 실질적으로 경계를 이루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롤로가 실제로 할양받은 땅은 “엪트 강으로부터 바다에 이르는” 지역이었죠.


뒤동은 이에 대해 더 이상의 어떠한 설명도 없습니다. 세느 강과 합류하는 엪트 하천은 앙델르 상류에서 30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엪트 하천은 벡쌍 지역을 둘로 가르는, 대단히 전략상 중요한 경계를 이루면서 브레슬을 거쳐 북쪽으로 길게 뻗어 나간 강입니다.


흘로도야르의 「연대기」는 동쪽 경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확실한 주장을 펼칩니다.


923년 라울 국왕은 “엪트 강을 거슬러 올라가 지상에 병력을 투입했다. 이곳은 최근에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노르망디 인들에게 주어진 땅이었다. 그들이 믿음에 열심이었던 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925년 아흐눌 드 흘랑드르와 함께 에르베 드 베르망두아는 브레슬 하구에 위치한 위(Eu)의 노르망디 요새를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점령합니다. “노르망디 인들의 우두머리였던 롤로는 이곳에 루앙에 있던 수천의 군사를 급파했다.”


흘로도야르는 「랭스 교회의 역사」에서 언급하기를 “전투 후에 호베르 백작은 샤르트르에서 노르망디 인들에게 몇몇 연안 지역을 넘겨주었다. 노르망디 인들이 거의 파괴하다시피 한 루앙과 이에 소속된 또 다른 지역 또한 노르망디 인들에게 양도되고, 노르망디 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일 것을 수락했다.”


바이킹들이 세느 강 양안에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은 이상 바닷가에 위치한 꼬(Caux) 지역과 탈루(Talou) 지역 역시 자연 루앙 주교좌 지역에 포함될 처지였습니다. 즉, 바닷가 연안지역(pagi)마저 루앙에 통합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동쪽 경계에 관한 가장 늦은 시기에 작성된 문헌은 – 정확하게 기술한 거의 유일한 문헌이라 할 수 있는 – 918년 3월 이전에는 라 크루아 생 뢰흐루아 수도원이었던 생 제르맹 데 프레 수도사들에게 하사한 단순왕 샤를의 칙서입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이 수도원만을 예외로 삼아 세느 강에 정주한 노르망디 인에게 생 제르맹 데 프레 수도원이 소유한 땅을 양도하는 바다.” 이 수도원 땅들은 오늘날 위레 지방 이쪽저쪽 모두를 바라보는 위치에 있는 갸이용 일대를 가리키는 지역으로써 노르망디와 경계의 각을 이루는 곳입니다. 마드리 지역을 갈라놓았던 자연스러운 경계는 아브르에서 길게 이어져있었죠. 그러나 우리는 남쪽 경계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습니다.


노르망디를 할양한다는 내용이 담긴 카롤링거 왕조의 최초의 문서(918). [1]


서쪽 경계에 대해서는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뒤동은 오로지 “엪트 강으로부터 바다에 이르는”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이 지역은 확실히 롤로에게 할양된 땅임을 밝히고 있죠. 그 너머는 브르타뉴가 시작되는 관계로 이 지점에서 노르망디의 경계가 그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브르타뉴는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했던 것일까요? 아브랑생 지역은 867년에 살로몽에게 불하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론상으로 비르(Vire)가 아니었을까 추측할 뿐입니다.


996년에 리쉐흐에 씌어진 「프랑스 역사」에서는 이에 대해 추가적으로 부연설명하고 있습니다.


“골루아 족의 수장들은 수차례 논의를 거친 뒤에 변방을 왕실의 기부라는 명목 하에 이 작자에게 줄 것을 결정하였다. 요컨대 기독교도들의 신앙심이 충만한 지역에서 그들이 우상숭배를 단념한다는 확실한 조건하에 이뤄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지상이나 해상에서나 어느 곳을 막론하고 프랑스 국왕들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조건이 붙은 것이었다. 변방의 수도는 루앙이었다. 이외에도 그들의 통치 지배 영역은 아래의 6개 도성들을 포함한다. 바이외, 아브랑슈, 에브리외, 세, 꾸탕스, 리지외. 이곳은 그들이 오랫동안 해적질을 일삼았던 곳들이다.”


이 같은 리쉐흐의 말을 종합해 보면 노르망디는 전적으로 원래부터 존재했던 곳이란 생각이 듭니다. 더군다나 뒤동의 「노르망디 인들 이야기」에서는 영토 확장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찾아볼 수 없지만, 924년과 933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흘로도야르의 「연대기」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두드러져 눈길을 끕니다. 게다가 흘로도야르의 「연대기」에는 롤로가 세례 받은 이후로 ‘영지에 세워진’ 중요하다 싶은 교회들 모두를 대주교에게 요구했다는 것과 루앙을 비롯하여 바이외, 에브리외, 뿐만 아니라 몽생미셸 대성당들이 롤로에게 기증되었다는 사실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뒤동은 더 나아가 루이 우트르메흐(Louis d’Outremer) 왕에게까지 참견을 합니다. “노르망디는 점점 유일한 주군 한 사람만의 보호로부터 멀어져 갔다. 게다가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 나누어진다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다. 왜냐면 롤로가 덴마크(Dacie) 경계 밖으로 추방당한 이상 그는 덴마크의 전 지역을 정복해야 하고, 어느 누구도 이를 나눠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덴마크 사람들(Daces)은 오직 한 명의 주군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게 되었다.”


실상 롤로에게 할양된 영토 가운데 서쪽 경계를 확실히 경계 지은 것은 아무 곳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상상할 뿐입니다. 서쪽 경계가 릴(la Risel) 강과 지류들, 즉 샤랑톤느(la Charentonne)나 아마도 뚜끄(la Touques), 더해 디브(la Dives) 강이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입니다.


흘로도야르에 따르면, 924년에 불하된 브쌩 지역의 리외뱅과 경계를 이루는 디브 강이 아닐까 하고 추정될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국왕과 롤로 사이에 일치를 본 것은 바이킹들이 정주하고 있는 세느 강 하구와 브르타뉴 경계에 해당하는 지역에 대한 소유권이었습니다. 이 땅은 롤로에게 주어졌고 그럼으로써 ‘왕국의 안전’이 보장되었던 것이죠.


<롤로와 단순왕 샤를>, R. 텔리에의 동판화. [2]






[1] 문서에는 단순왕 샤를의 인장이 찍혀있습니다. 생 제르맹 데 프레 수도원 소장품. © 국립 고문서박물관 역사 기록물실.


[2] 1843년에 펴낸 쥘 자냉의 『이야기로 읽는 노르망디』에서 인용.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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