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31화
[대문 사진] 아공 ‘모래언덕(mielles)’
11세기 초에 처음으로 ‘노르망디(Normandie)’란 용어가 등장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뒤동 드 생 캉탱은 이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역사가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노르망디란 말은 ‘노르만족의 땅’이란 뜻이기도 하죠. 뒤동의 시대에 이미 이루어진 공작령으로 할양된 땅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어휘였습니다.
11세기 후반에 하사된 여러 장의 국왕의 문서나 칙서들에는 그들이 사용했던 어휘가 등장합니다. 1080년경 생 방드리유 수도사가 집필한 「뷜프랑의 기적들」을 보면 ‘노르망디’와 이웃한 지방들에 대한 명확한 경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이 경계는 기욤이 자신의 공작령을 방어하기 위해 도처 곳곳을 요새화하기 위해 공사를 벌였던 지역이기도 하죠.
세 번에 걸쳐 이루어진 노르망디에 대한 불하는 911년과 924년, 그리고 933년에 이루어졌습니다. 924년에 이어 933년에 양도된 땅들에 대해서는 흘로도야르의 「연대기」에 상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라울 국왕은 롤로에게 ‘르 망스와 바이외’를 우선적으로 양도했죠. 다시 말해, 이에무아가 폭동만 일으키지 않았다면, 르 맨느와 브쌩 지역을 하사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어 롤로가 사망한 뒤에도 라울은 그의 아들인 긴 검을 찬 기욤(기욤 롱그 에페)에게 땅을 불하합니다. “브르타뉴 인들의 땅이었던 강으로부터 바다에 이르는 지역”, 달리 이야기하자면, 코탕탱 지역과 이웃한 섬들 그리고 아브랑생 지역에 해당합니다. 그럼으로써 노르망디의 서쪽 경계가 확실하게 그어졌습니다. 뒤동은 꾸에농까지 경계가 이어졌다고 주장합니다.
아마도 루앙 성직자 관구의 변방에 해당했던 지역으로의 확장은 자주 발생한 프랑크 행정구역 획정에 따른 당연한 결과에 상응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주교들이 통치하던 수도의 역할을 생각해 볼 때, 그리 놀랄 일은 못됩니다.
그러나 933년에 노르망디는 공식적으로 경계 지어졌지만, 내부적으로 아무런 어려움 없이 한데 통합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롤로와 그의 후계자들은 브쌩 지역과 코탕탱 지역에 정착한 또 다른 스칸디나비아 인들과 충돌하면서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노르망디 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 전체에 대한 공작의 권한이 강화된 때는 10세기말 리샤르 1세 때의 일로 이때까지 스칸디나비아 인들의 노르망디 정착은 상당히 긴 기간 동안 이루어졌습니다.
중세 스칸디나비아 문헌들을 살펴보면, 노르망디란 말은 단지 일화의 소재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노르웨이어에서 노르망디란 말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스칸디나비아 인들의 노르망디 식민지화라는 인상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프랑크 문헌들에 등장하는 노르망디란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헐적으로 진행되어 온 고대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에 따르면, 노르망디 지역의 소유권 체계에 비추어 볼 때 노르망디 인들의 사투리나 지명에 따른 영향을 결코 도외시할 수 없다는 점만큼은 명백합니다.
롤로에게 할양된 땅은 이른바 ‘초토화된 지역’입니다. 적어도 간신히 쟁취한 땅이었던 것이죠. 연대기들이 한결같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를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 바이킹들을 과거의 노르망디와 단절하여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 차례 수도원들이 불타고 그곳을 굳건히 지키던 수도원 공동체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시골은 여전히 삶이 영위되는 지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도성 역시도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참해는 심각했지만, 또한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1] 1935년에 펴낸 L. 브로쏠레뜨와 M. 오주흐가 펴낸 『내 첫 번째 프랑스 역사책』에서 인용. 개인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