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백사장 풍경

몽생미셸 가는 길 147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베르트 모리조의 <훼깡 백사장에서>


인상주의란 용어는 클로드 모네가 그린 대단히 인상적인 그림 「일출, 해 뜨는 인상」에서 시작되었다. 인상파, 인상주의란 용어가 고착되기 이전에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 그룹 또는 작품’을 일컫는 말로 인상파 화가들 사이에서 통용되었다. 용어가 암시해 주듯 마네, 모네, 드가, 르누아르 등 인상주의를 선도한 화가들은 실내보다는 야외에서 그림 그리는 걸 더 즐겨 했다. 써늘하고 답답한 실내보다는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야외에서 그림 그리는 일이 그들 맘에 더 와닿았던 것이다.


나폴레옹 3세의 파리 도시 정비에 따른 공사장 소음, 분진과 함께 갑자기 도시로 밀려들어온 인구 유입에 따른 혼란은 그림 그리는 일에만 전념하고 싶었던 화가들에게는 치명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더군다나 파리 재정비로 인해 갑자기 상승한 임대료 또한 화가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그들을 파리 바깥으로 내몬 제일 큰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파리 인근 세느 강가 이곳저곳에 아틀리에를 짓고 한데 모여 그림 그리는 일에 매달렸다.


야외에서 그리는 그림이 많다 보니 그림도 한층 밝아졌다. 그림의 주제 역시 한결 가벼워졌다. 묵직한 신화나 종교, 역사와 문학의 주제는 그럼으로써 점차로 소멸되어 갔다. 그림 속 주인공 역시 이러한 묵직한 주제에 어울리는 신이나 성서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성직자들 또는 신화 속 영웅들이나 전제군주들 혹은 귀족들로부터 벗어나 이제는 일상에서 흔히 마주하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로 바뀌어갔다. 심지어 ‘거리의 여인’까지도 그림 속 주인공으로 자리 잡았다.


그 시대에 생면부지인 화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속옷까지 벗어던지고 모델을 설 여자는 드물었다. 거리에서 몸 파는 여인들까지 그림 속 주인공이 되는 세상이다 보니 19세기 회화는 미술사적으로 가장 천박한 예술 장르로 전락할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 경계선상에 위치한 작품이 바로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Olympia)」(1863,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라 할 수 있다.


1863, Olympia.jpg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Olympia)」, 1863, 파리 오르세 미술관.


한편으로 인상주의 화풍과 더불어 비천한 예술가 취급을 받던 19세기 회화에 예술적 논리를 부여한 여성화가가 있었는데, 전통 아카데미 회화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선 것은 물론, 에두아르 마네와 함께 인상주의를 견인하면서 아방가르드 예술을 표방한 여성화가인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가 바로 그 화가였다.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베르트 모리조


인상주의 개막을 알린 베르트 모리조에 관한 전기는 인상주의 미술사에 관한 책들마다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그 넓이와 깊이가 심란한 수준에까지 이르러 굳이 여기에서까지 그녀의 내밀한 사생활을 꺼내들면서 시시콜콜 언급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더군다나 다시 파헤칠 그녀에 관한 이야깃거리도 남아 있지 않은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 들 수밖에 없는 것은 훼깡 바닷가를 찾아온 마당에 혹시나 이 해안을 그린 화가가 있을까? 있다면 그 화가는 어떤 연유로 훼깡의 앞바다를 그렸을까? 나아가 왜 그 같은 그림을 그려야만 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그런 연유로 언뜻 떠오른 인물이 베르트 모리조였고 그녀가 그린 훼깡 <백사장> 그림였기 때문이다.


베르트 모리조는 2024년 정월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파리 16구에 소재한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Musée Marmottan Monet)에서 그녀에 관한 특별전이 열릴 만큼 인상주의 회화에서 차지하는 그녀의 위상은 좀 유별나다고 할 것이다.


나는 호텔방에서 이 여성화가를 잠깐 궁구해봤다. 그리고 훼깡 앞바다를 화폭에 담은 화가의 「훼깡 백사장에서(Sur la Plage de Fécamp)」(1874)라는 작품을 눈여겨 들여다보면서 이 인물에 대한 궁금증을 더해갔다.


베르트 모리조의 <훼깡 백사장에서>, 1884, 산타 바바라 미술관(Santa Barbara Museum of Art) 소장.


일단 그녀의 그림을 평면적으로 본다면, 탁 트인 크림 빛 바다에 배 몇 척이 떠있고 오른쪽 끝단에 등대가 서 있는 항구가 보인다. 훼깡 항구가 틀림없다. 흰 포말을 일으키는 잔잔한 파도는 흰빛으로 타오르는 백사장 모래알들을 집어삼키고 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곳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인물들이 위치하고 있는데, 약간 오른쪽 화면으로 쏠려있다. 검은 옷에다 역시 햇볕을 가리기 위해 검은 망사로 된 베일을 쓴 여인은 모자 쓴 아이의 손을 잡으며 멀어져 가는 두 여인을 따라가려는 아이를 말리고 있는 모습이다.


멀리 있는 다른 여자아이는 검은 옷을 입은 여인으로부터 떨어지려는 아이를 향해 다가온다. 단언컨대 여기서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화가 자신이다. 화가는 자신이 주인공인 그림을 그린 것이다. 초상화가 아닌 풍경화를 빌려 화가 자신의 속내를 밝힌 것이다. 화가는 왜 그랬을까?


이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 이것이 바로 인상주의 화풍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을 생각하고 이해할 구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그림, 그저 바라보고 느끼면 되는 그림, 그림에 대한 호불호 또한 온전히 감상자의 몫일 따름인 그림, 그러나 그림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그려 넣은 이 여성화가의 의도는 인상파 화가들과는 사뭇 차원이 다르다. 다시 한번 화가는 화가 자신의 내면 풍경을 바닷가 풍경에 병치시켰다. 화가의 지난한 삶을 알지 못하고는 그림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이 그림이 마네(Manet)라 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르트 모리조의 작품이란 건 확실하다. 베르트 모리조는 이미 이런 유형의 그림을 이전에 여러 차례 그린 바 있다. 그리고 1874년 여름 풍경을 담은 이 그림 속 마네란 서명은 베르트가 그림을 완성한 해 이전인 1874년 12월 22일에 그녀의 친정집이 있는 파리 인근 파시(Passy) 은총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 마네 가(家)의 둘째 아들 외젠과 결혼식을 올린 이후이기에 그녀에게 성씨 하나가 더 따라붙게 된 탓이다.


바로 그녀가 그토록 죽는 날까지 평생 매달렸던 ‘마네’! 그래서 그녀는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마네란 서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체 에두아르와 베르트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 길고 긴 이야기를 그림 한 점이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우선 눈에 띄는 특징은 첫째, 회화의 구성이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과 닮았다는 점이다. 에두아르 마네의 「백사장에서(Sur la plage)」와 베르트 모리조 마네의 「훼깡 백사장에서(Sur la plage de Fécamp)」는 작품명은 물론이고 구도와 화가의 서명까지도 꼭 빼닮았다.


두 번째로는 그림 속의 여인이 입은 옷 색깔이다. 두 해전에 베르트 모리조는 「발코니에 서 있는 여인과 아이(Femme et enfant au balcon)」 (1872)에서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을 그린 바 있다. 이해에 에두아르 마네는 ‘검은 옷을 입은 베르트 모리조’를 여러 점 그렸다. 대체 베르트 모리조는 왜 마네의 서명까지 흉내 내가며 마네가 그린 바닷가 풍경을 자신도 그리고 싶어 했던 것일까?


왼쪽은 베르트 모리조가 그린 <훼깡 백사장에서>이고, 오른쪽 그림은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르 뚜께 백사장에서>이다.


이 석연치 않게 서로 뒤섞인 두 화가의 작품들을 하나씩 떼어놓고 봐도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결국 두 화가의 은밀한 사생활을 들여다보지 않고는 너무도 닮은 그림들 속에 감춰진 이야기가 영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하지 않을 수 없는 건 베르트 모리조의 삶과 예술은 어떤 의미이어야만 하는가다. 왜 마네는 아내 수잔 린호프(Suzanne Leenhoff)와 호적에 올리지 못한 아들 레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베르트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집적거렸을까 하는 것과 대체 베르트 모리조는 유부남인 마네를 향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무덤 속까지 가져갔을까 하는 점이다.


이 진부하기까지 한 이야기가 인상주의 대표적 화가들의 작품이 함유한 속내라니 한심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꼭 그럴까? 마네가 없었다면 베르트 모리조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마네와의 애증 관계가 둘의 경쟁관계로 발전했다고 볼 순 없을까?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과 까미유 클로델은 그럼 어떻게 이해해야 좋다는 말인가?


베르트 모리조가 「훼깡 백사장에서」에서라는 그림을 그린 건 1874년 여름의 일이다. 이미 한 해 전인 1873년에 에두아르 마네는 르 뚜께 여름 바닷가 풍경을 담은 「백사장에서」를 완성했다. 베르트 모리조는 마네의 아틀리에에 있는 이 그림을 처절한 심정으로 번번이 지켜봐야 했을 것이다. 마네의 아틀리에에서 포즈를 취할 때마다 그림 속 등장인물이 자신이 아닌 마네의 부인 네덜란드 태생의 성악가 출신의 수잔이란 사실까지도 인지해야 했던 것이다.


1870-1871년 두 해에 걸쳐 프로이센과 프랑스 간에 벌어진 보불 전쟁에서 만신창이가 된 마네의 삶과 예술은 아내 수잔과 동생 귀스타프와 함께 떠난 모처럼의 휴식시간에조차 모든 게 덧없다는 식으로 덧씌워졌지만, 베르트 모리조는 그렇지 않았다. 마네보다 더 큰 상처를 안고 산 여인일 수밖에 없었다.


마네는 삶도 예술도 만신창이가 된 마당에 어떤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고심했을 것이다. 그래야 재기할 수 있고 다시 스포트라이트도 받을 수 있으며, 그림도 팔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논란의 한 중심에 다시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꾸 뚱뚱해져만 가는 아내의 모습에 더해 전쟁 통에 정치가로서의 길마저 불확실해진 막내 귀스타프의 모습이 영 맘에 차지 않았던 탓이리라. 이 와중에 마네는 정말 하잘것없는 애증관계에 매달렸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전쟁 통에 베르트 모리조는 에두아르 마네의 아이를 유산했다. 먹을 것이 없어 빈사상태에서 상한 음식을 먹고 사경을 헤매던 여인은 한 화가에 대한 애정이 애증으로 바뀌는 것을 스스로 직감했다. 애틋한 감정이 남아있을 리 없는 여인은 자신이 한때 사랑한 남자, 경쟁상대인 남자에 대한 복수극을 꿈꾼다. 이 부질없는 감정의 소모가 두 화가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 본연의 예술의 터닝 포인트가 된 건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되겠다.


보불 전쟁이 끝나고 베르트 모리조를 집중적으로 화폭에 담는 마네는 여름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바닷가를 찾아가는데, 1874년 여름 하필이면 베르트 모리조도 외젠 마네(에두아르 마네의 동생)와 함께 바닷가를 찾았다. 그녀가 굳이 바닷가에서 여름을 보내고자 한 의도는 어떠한 전기에도 나오지 않는다. 베르트 모리조는 1873년에 피서지에서 마네가 완성한 그림 속 여인 수잔을 잊지 않고 있었을 따름이다. “내가 저 여자를 대신해야 하는데…….” 이 예민한 여자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1874년 여름 훼깡에서 그녀는 그림을 그린다. 화가 자신이 백사장에 앉아있는 누가 봐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그해 겨울 12월 22일에 그녀는 에두아르의 동생 외젠과 결혼식을 올린다. 남편이 41살 노총각인 건 문제가 안 된다. 그리고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완성한 그림에다가 마네(Manet)란 서명을 적어 넣는다. 이건 누가 봐도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그림처럼 보인다. 그녀가 의도한 바다! 이 두 화가의 그림을 비교해 봐야 어떤 그림이 베르트 모리조가 그린 그림이란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닮았다.


그림 속의 아이들은 언니 에드마가 낳은 아이들이다. 아이들 곁에서 모리조는 무엇을 떠올렸을까? 자신의 몸속에 에두아르 마네의 아이를 임신했을 때 제발 수잔과 이혼하기를 학수고대했던 자신을 떠올렸을까? 전쟁 통에 아이를 유산하고 말았을 때 아이를 잃은 슬픔보다 결코 이어갈 수 없는 애정의 파국을 떠올렸을까? 이 그림을 시작으로 그녀는 그리는 그림마다 마네라고 서명을 한다. 필체까지 똑같이! 그리고 마네가 죽은 뒤에도 저승까지 마네를 따라간다. 어떻게? 파리 파시(Passy) 공동묘지 가족묘엔 그렇듯 에두아르 마네와 수잔 린호프는 물론 베르트 모리조가 함께 잠들어있다.


파리 파시(Passy) 공동묘지 마네 가의 가족묘에는 에두아르 마네와 수잔 린호프는 물론 베르트 모리조까지 함께 잠들어있다.


파리 파시(Passy) 공동묘지 마네 가의 가족묘에는 에두아르 마네와 수잔 린호프는 물론 베르트 모리조까지 함께 잠들어있다.


마네와 함께 수잔 린호프(Suzanne Leenhoff)가 묻힌 마네 가의 가족묘에 어떻게 베르트 모리조가 합장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베르트 모리조 역시 마네란 성씨를 지녔기 때문이다. 이게 프랑스다! 어찌 되었든 이로써 베르트 모리조는 이승에서 못다 한 설욕을 저승에서까지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아니면, 이승에서 못다 한 사랑을 저승에서나마 나누고자 한 한 여인의 집념이라 해야 하나?


이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슬픈 여성화가의 삶과 예술이 한 폭의 백사장 풍경을 다룬 그림 속에 오롯이 담겨있다. 그림 속에 아이들이 즐겁게 뛰놀고 있음에도 바닷가 풍경이 씁쓸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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