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화가

몽생미셸 가는 길 148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인상파 화가들을 사로잡은 훼깡의 화네 곶


여행지에 가면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본다. 핸드폰부터 꺼내 들어 사진을 찍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아주 흔치 않게 홀로 떨어져 가만히 풍경을 바라보는 이가 있다. 일단 이 두 유형만 언급하자면, 사진부터 찍고자 하는 이는 고대하던 장소에 마침내 도착한 것을 자축이라도 하듯 꿈꾸던 풍경을 비로소 마주했노라 들뜬 감정이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홀로 떨어져 조용히 풍경을 응시하는 이는 ‘사연’ 많은 이임에 틀림없다. 한 사람은 여행을 즐기는 이라 한다면, 다른 한 사람은 여행을 통해 자신의 핍진한 인생을 어떻게든 풀어보려는 유형일 것이다.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근거 또한 없다.


꺄린느 쉬슈로(Carine Chichereau)는 문화예술에 초점을 맞춘 인터넷 잡지 <디아크리티크(Diacritik)>에서 루이즈 아베마(Louise Abbéma)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도중에 이런 일화를 들려준다.


“매년 여름, 루이즈 아베마는 훼캉 근처의 해변 휴양지인 레 쁘띠뜨 달르(Les Petites Dalles)에 갔고, 그곳에서 클로드 모네 등을 만났다. 그곳에 머물면서 그녀는 인상파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바다 풍경을 그렸다.”


루이즈 아베마(Louise Abbéma), 훼깡 바닷가 풍경


베르트 모리조가 그린 「훼깡 백사장에서」처럼 그녀가 그린 하늘빛은 잿빛에 가깝다. 물살은 백사장가까이에서 일렁이지만 먼바다는 잔잔한 분위기다. 어느 여름날 오후 루이즈 아베마는 훼깡의 등대 너머로 보이는 화네 곶(Le cap Fagnet)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인물이 전혀 등장하지 않으니 온전히 풍경화인 셈이다. 평온해 보이는 풍경이다. 마치 그녀의 평온한 삶을 이야기해 주는 듯하다.


루이즈 아베마는 자작의 딸로 태어나 연극배우이자 화가이며 조각가였던 사라 베르나르의 인물화를 그림으로써 여배우의 동성연애자(레즈비언)가 되었을 정도로 ‘사교계의 꽃’처럼 산 인물이다. 필력과는 전혀 무관하게 당대 잘 팔리는 그림 소재만 골라 그린 덕분에 단박에 예술계의 귀족들에게 주목 받은 인물이다. 나폴레옹 3세의 귀족적 아취와 우아함을 극단에까지 몰고 간 그의 화단의 이력은 마침내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수여받을 정도로 대단한 수완을 발휘했다.


루이즈 아베마(Louise Abbéma)가 그린 연극배우이자 화가, 조각가였던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당대 유행하던 꽃 그림, 일본 목판화의 영향을 받아 화단을 휩쓴 부채 그림 등 그녀는 대중적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는 소재만을 골라 그렸다. 당대 베스트셀러 화가였던 셈이다. 이에 대해 에두아르 마네의 전기작가 소피 쇼보(Sophie Chauveau)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준다.


“꽃가게에 상궤를 벗어날 정도로 돈을 물 쓰듯 하는 새로운 유행을 따라 하길 좋아하는 반은 활량인 사람들 덕분에 화초를 잘라 내다 파는 꽃 시장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그와 함께 자연 꽃의 상징을 다룬 말들도 생겨났다. 감히 뭐라 중얼거릴 수조차 없던 것에 꽃다발(부케)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꽃을 매개로 한 말들을 서로 주고받았다. 사유, 걱정, 초조 같은 말들마저 꽃에다 갖다 붙이기도 했다. 꽃의 언어를 발명해 낸 것이다. 예술가들에게도 뜻밖의 수확이었다. 화가 팡탱을 먹고살게 만든 것이 바로 이 수다쟁이 꽃들이었다.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복제화가였던 그가 꽃을 그리는 화가로서 유명해진 것이다. 그가 그린 꽃다발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만들었으며, 부인네들로 하여금 넋을 잃게 만들었고 꿀벌들을 찾아오게까지 만들었다! 꽃 이외에는 다른 건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회화에서 꽃을 빼면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특정한 인물들은 그들의 화신들로 대체되었다. 천국의 열매로 숭배의 대상이 된 체리들은 빅토린느[1]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화가가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담으려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지팡이, 레몬 혹은 고양이는 화가를 대신했다.” [2]


루이즈 아베마가 화폭에 담은 훼깡의 바닷가 풍경 역시 중산층 거실에 잘 어울릴 듯한 풍경화다. 그 시대에 어느 중산층이 까유보트 같은 화가의 그림을 벽에 걸어놓고 싶어하겠는가?


귀스타프 까유보트(Gustave Caillebotte), 나무 바닥 때 벗기는 이들(Les Rabotteurs), 1875,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그녀에 대한 평가가 어떨지라도 에두아르 마네까지도 따라 했던 꽃 그림, 벨기에 태생의 알프레드 스테방이 그렸던 ‘파리 여인’ 투의 그림에 대한 비판은 피해 갈 순 없다.


알프레드 스테방, 「파리 여인」, 1880. 화가는 나폴레옹 3세에 의한 제2제정 시기 붐을 이루던 이런 유형의 ‘파리 여인’을 다룬 그림만 그렸다.


회화가 문학작품처럼 유행을 좇아 소재주의에 빠진다면 어떤 결과에 이를까? 루이즈 아베마의 그림들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거의 대개가 소실되었다. 그러나 장례식에 어느 유명인사도 참석하지 않았던 귀스타프 쿠르베의 죽음 이후로 화가가 남긴 작품은 오롯이 오르세 미술관에 걸리는 영광을 안았다. 이 차이는 뭘 의미하는 걸까?


루이즈 아베마처럼 동시대에 클로드 모네도 훼깡 앞바다를 풍경화로 남겼다.


Claude Monet, Fécamp, bord de mer, 1881 (MuMa).jpeg 클로드 모네, 훼깡 앞바다 풍경, 1881, 르 아브르 현대 미술관 소장.


1881년 모네가 훼깡 앞바다를 찾아와 그린 것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마치 모네의 전반기 인생을 이야기해 주는 듯해 가슴을 저미게 만든다.


모네는 아내 동시외가 죽은 뒤로 파리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지베르니로 이사 온다. 농가를 월세 내 파리에서 살 때 도움 받은 미술품 중개상이었던 오쉐데 부인과 그녀에게 딸린 4남매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지베르니에서 시작한 것이다. 엪트 강이 세느 강과 합류하는 이곳은 평소 ‘물’이 좋아 물살에 비친 물그림자를 넋을 잃고 바라보던 모네에게는 그림 그리기 최적의 장소였다.


모네는 지베르니에 살면서 노르망디와 브르타뉴 바닷가를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린다. 노르망디에서는 일군의 화가들과 함께 하는데, 어려운 살림살이를 하던 이때 귀족처럼, 실제 예술계의 귀족으로 살고 있는 루이즈 아베마와 함께 훼깡 바닷가를 찾은 듯하다. 루이즈 아베마가 모네를 챙겨주지 않았을까? 아직까지 애송이 티를 벗지 못하고 있던 모네에게서 그녀는 어떤 예술가의 진면목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거꾸로 그녀는 그의 필력을 탐냈을지도 모르겠다.


루이즈 아베마의 그림에서는 어떤 예술가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 이런 분위기를 즐기는 이들 가운데에는 ‘변태’가 많다. 반면 모네의 풍경화에서는 어떤 꿈틀거리는 ‘예술적 힘’을 느낀다. 그게 궁핍한 삶으로부터 격렬하게 솟구치는 예술적 충동이든, 쉼 없이 솟아나는 예술적 재능에 힘입은 에너지든, 아니면 절체절명의 삶 가운데 이어지는 예술적 실패에 따른 최후의 마지막 몸부림이든 모네의 그림에서는 그와 같은 힘이 느껴진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여행자의 모습인데 조용한 찻집에 앉아 혼자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생각에 잠긴 듯한 포즈를 취하는 중년부인과는 달리, 바람 부는 바닷가에 서서 가슴팍으로 쏟아지는 비바람을 맞으며 지난한 삶을 떠올리며 펑펑 우는 한 젊은 화가의 뼈저린 ‘슬픔’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모네는 아직 성공한 화가가 아니다. 이에 비해 루이즈 아베마(나는 그녀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끊임없이 분열하는 아메바가 자꾸만 떠오른다)는 그 시대에 대단히 성공한 여성화가다. 모네는 성공하려고 발버둥 치는 아직은 애송이다. 루이즈 아베마는 자신의 호화 거실에서 사교계의 인물들을 모아놓고 우아하게 만찬을 즐길 정도로 ‘성공한(?)’ 화가였다. 예술적 평가를 차치하고서라도 이 두 사람에게 불어오는 바람의 세기와 결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풍경은 거짓이 없다. 풍경화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모네는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바라보는 화가의 눈에 비친 사물만이 진실하다.” 인상주의 이론으로 자리 잡은 모네의 이 단언이 앞으로 인상주의 회화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척도가 된다는 점은 굳이 되풀이할 이유가 없다.



풍경을 바라보는 화가 역시 거짓이 없다.
다만, 작품은 작가의 수준을 말해 준다.



미술사는 이제까지 진보를 거듭해 왔는데, 거기에는 이런 작가에 대한 냉혹한 판단이 기준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미술사는 거꾸로 저 원시시대의 벽화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거기 배심원석에는 플라톤이 냉혹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고, 마르셀 푸르스트가 흘깃거리고 있고, 당대의 시인이자 미술비평가였던 샤를 보들레르가 참석해 있고, 21세기 전 세계에서 인터넷상에 쓰잘데 없는 글을 올리는 사이비 평론가들도 자리해 있다. 그러나 다행한 일은 여기에서 벌어지는 예술품 감정은 보석 감정같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모네는 자신의 풍경화에 단지 사실적 풍경만을 그려 넣지 않았다. 거기에는 폭발하는 예술에의 힘, 그 에너지가 담겨있다. 그의 삶과 예술을 되짚어 보고 싶은 이 밤 비바람이 치는 호텔방에서 홀연히 예술가의 영혼이 이끄는 바닷가에 서고 싶은 마음이 그런 이유 때문이다.






[1]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Olympia)」의 실제 인물.


[2] 소피 쇼보,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Manet Le secret)』, 갈리마르(Gallimard), 파리, 2014, 177-178쪽.



이전 07화그림 속 백사장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