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바다

몽생미셸 가는 길 149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코르스 섬의 바스티아 앞바다. 멀리 나폴레옹이 유배를 간 엘바 섬이 보인다.



코르스 섬에서의 나흘
2013년 봄






쓸쓸한 섬을 다시 찾았다. 코르스(그들은 코르시카라 부른다)! 나폴레옹과 운명을 같이 한 섬, 황제의 동상과 함께 코르스 민족주의자 파스칼 파올리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는 섬, 제주도의 10배 크기이고 거제도의 25배 크기인 섬엔 2천 미터가 넘는 산봉우리들이 즐비하다. 연중 따사로운 지중해성 기후에 한겨울에 내린 눈이 늦봄까지 준령마다 쌓여있는 독특한 풍경을 자아내는 코르스 섬은 주민이 고작 32만 명, 아직도 나폴레옹의 후손이 아작시오 시의원으로 고향을 지키고 있는 이 땅은 행정구역상 북 코르스(2B)와 남 코르스(2A)로 나뉘어 있다. 북 코르스의 주도(州都)는 바스티아(Bastia), 남 코르스의 주도는 아작시오(Ajaccio)다.


Ajaccio 41.JPG 2013년 다시 찾은 아작시오(Ajaccio), 나폴레옹이 태어난 곳이다.


나폴레옹은 코르스 섬의 아작시오에서 1769년 8월 15일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8월 15일을 광복절로 기념하는 반면, 북한의 김일성은 8월 15일을 '태양절'이라 기념한 것이 이채롭기만 하다.


아버지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는 아들에게만큼은 엄격했다. 섬 대표로 베르사유 궁전에 거주하는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를 알현한 부친은 장남과 차남(아직 그 밑으로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이다)을 어떻게 키울지에 대해 너무도 분명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당시 출세할 수 있는 길은 신부 또는 군인이 되는 길이었다. 그런 연유로 장남 조제프는 프랑스 내륙에 위치한 오탱 신학교에, 차남인 나폴레옹은 10살의 나이에 역시 프랑스 내륙에 자리한 브뤼엔 군사학교에 입학시켰다.



나폴레옹이 얼마나 열심히 학업에 정진했는가는 그에 관한 기록이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고향인 코르스 섬을 늘 그리워했다. 파리에 있는 포병군사학교(에콜 밀리테르)를 마치고 부대 지휘관으로 배속된 이후에도 고향 코르스 섬을 다시 찾은 걸 보면 자신이 태어난 섬에 대한 향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케 해준다.


실제로 나폴레옹 시절에 코르스 섬은 막 제노바공국(지금은 이탈리아에 속한다)으로부터 프랑스령으로 편입되는 바람에 프랑스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게 서툴렀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 반감까지도 품고 있었다. 코르스 섬은 나폴레옹이 태어나기 1년 전인 1768년에 프랑스령이 되었다. 그때까지만해도 코르스 섬은 코르시카(Corsica)란 이름으로 불렸다.


Corse.JPG 아직도 코르스 주민들은 독립에의 의지가 강하다.


한때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에 대한 애착과 함께 찾아온 프랑스에 대한 환멸은 결국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다시 고향 땅으로 회귀하게 만들었다. 코르시카 독립군 대장으로 활동하던 파스칼 파올리를 찾아간 나폴레옹은 이 독립군 대장 또한 영국으로부터 자금을 받고 있는 ‘위선자’ 임을 깨닫는다.


20살이나 연상이었던 파올리는 사실 코르스의 진정한 독립군 대장이었지만, 나폴레옹에게 있어서는 최고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그의 존재가 별로 달가울 것이 없었다. 나폴레옹은 파스칼 파올리가 있는 코르트 마을에 잠시 기거하다가 아작시오로 돌아온 뒤, 파올리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칼비에서 극적으로 가족을 데리고 프랑스로 탈출한다. 그럼으로써 코르스 섬은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섬이 되고 말았다.


P2220157.JPG 아작시오 나폴레옹 광장의 기마상


코르스 섬을 처음 찾은 것은 까마득한 옛일. 그때까지만 해도 나폴레옹을 ‘영웅’이라 생각지 않던 시기였다. 그가 과연 근대사의 마지막 영웅일 수 있는가 회의하던 때이기도 했다. 영웅이란 모름지기 세계에 대한 진보적인 의식이 있는가란 의문에 나폴레옹은 전쟁광, 섬 촌놈, 평민으로서 황제가 된 쿠데타의 전형, 그리고 군인 등등 지금 생각해 보면 프랑스를 둘러싼 제국의 이해관계에 놓인 복잡다단한 폄하를 내 스스로 나폴레옹에게 부과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가 말했듯, 프랑스 대혁명의 진정한 아들이었고, 그가 강조했듯, 시민혁명의 진정한 실천자였음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다.



나는 프랑스 대혁명의 진정한 아들이자
시민혁명의 진정한 실천자이다.
-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P2220156.JPG 프랑스 대혁명의 진정한 아들이자 시민혁명의 진정한 실천자라 스스로 평가했던 나폴레옹


코르스 섬은 나폴레옹이 태어나기 전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던 섬이었다. 제노바 공국 역시 섬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이탈리아로서도 사르디니아와 시칠리아가 있었기에 춥고 스산하면서 인구도 얼마 되지 않는 이 고산 섬에 대해서는 자연 관심이 멀었다. 하지만 프랑스로서는 지중해 연안기지에 필요한 등대와도 같은 섬을 필요로 했다. 더욱이 해상권을 영국이 쥐고 있던 상황에서 영국과 대적할 만한 해군 군사력과 함께 지중해를 감시할 만한 섬 기지를 필요로 했다. 프랑스는 이러한 사실을 미국독립전쟁을 겪으면서 절실히 깨달았다. 이때 이미 영국은 막강한 해군으로 북해에서 지브롤터에 이르는 해상권을 이미 거머쥔 상태였고, 이제 서서히 지중해로 시선을 돌리던 참이었다.


이러한 영국의 해상권 장악은 나폴레옹 시대에도 계속되어 나폴레옹의 이집트에서의 퇴각, 말타 포기, 엘바 섬에의 투옥 등 굵직한 사건과 함께 했다.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써 영국은 아시아를 식민지화하는데 더욱 효율적으로 대처했음은 물론, 인도를 쓰레기화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동인도 회사의 경영이었다.


후일 루이 나폴레옹이라 불리는 나폴레옹 3세가 등장하여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를 개통함으로써 프랑스가 지중해를 석권하기까지 코르스를 중심으로 한 해상권 다툼은 점입가경을 방불케 했다. 어찌 되었든 코르스에서 나폴레옹이 태어남으로써 지중해는 서서히 프랑스 화 되어갔다. 북아프리카 제국이 모두 프랑스에 편입되는 시기도 이때부터다.


Ile de Rousse 1.JPG 칼비(Calvi) 앞바다, 지중해 해상권을 놓고 유럽 제국은 항상 전쟁을 벌였다.


코르스 섬을 다시 찾은 날은 바람이 불기는 했지만, 햇살이 따사롭고 건조한 날씨였다. 파리 오흘리 공항을 출발한 에어 프랑스는 정시에 우리 네 사람을 지중해 섬 코르스 아작시오 공항에 내려놓았다. 비행기에서 내려 활주로를 통해 청사를 빠져나가는 우리 네 사람 눈에 비친 코르트 마을을 품고 있는 고산지대는 흰 눈을 뒤집어쓴 채였다. 내일, 우리는 저 산길을 넘어갈 참이었다. 파스칼 파올리의 영지인 코르트 마을을 향한 계획은 하루를 앞두고 있었다.


P2220151.JPG 아내를 마중한 아작시오의 환한 봄 햇살
화사한 봄 햇살에도 이튿날 향하게 될 코르트 마을은 여전히 험준한 준령에 가로막혀 있었다.


우리 네 사람은 우선 인터넷상으로 예약해 둔 아작시오 도심 한 복판에 위치한 <나폴레옹 호텔>로 찾아갔다. 나폴레옹이 태어난 섬을 여행한다 하니 호텔도 나폴레옹으로 정하는 것이 아무래도 그럴 듯해 보였다. 호텔은 겉모습은 그럴사했지만 별 두 개 2성급 호텔이어서 객실의 침구는 달랑 담요 한 장! 해도 너무 했다 싶었다. 프랑스 호텔들이 솜이불로 침구를 바꾼 지가 언젠데 나폴레옹 호텔은 아직도 근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지만 파리 인근의 퐁텐블로 성엘 가보라. 전쟁터에서의 나폴레옹의 막사가 진열되어 있는데, 황제는 야전침대에서 그 무수한 밤을 지새웠다.


사실 담요로 된 침구는 코르스 섬을 여행할 때 내내 따라다녔다. 먼지가 날리는 것은 고사하고서라도 과연 담요를 언제 드라이클리닝 했을까 궁금해지는 객실 수준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이기만 했다. 아무리 변화를 싫어하고 검소한 사회적 분위기로 에둘러 변명한다 해도 이건 너무 지나치다 싶은 경우였다. 21세기 성숙한 시민인 우리가 지금 전쟁터를 떠도는 것도 아니고, 그와 같은 혹심한 상황을 가정해야 할 의무도 없는데, 다음부턴 반드시 3성급 이상 호텔을 예약해야겠다는 후회뿐,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점심이 문제였다. 호텔에서 그런 상념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식당 문 닫을 시간이 임박해 오고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도심거리로 나섰다. 항구 쪽 포슈 광장에서 겨우 문을 연 식당을 발견하고는 때늦은 점심을 들었다. 첫날 처음으로 접한 음식이 생각보다 맘에 들었다. 시장이 반찬이란 말은 이런 때 딱 어울렸다.


Ajaccio 1.JPG
Ajaccio 9.JPG
종려나무가 있는 길가 식당에서의 휴식, 모처럼 몸이 원기를 되찾으면서 맘도 푸근해졌다.
Corse, Restaurant d'Ajaccio.JPG


식사를 마치고 식당 앞 항구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배회하다 꼬마열차 정류장을 발견하곤 우리 네 사람을 태우고 시가지를 누빌 꼬마열차를 한없이 기다린다. 날씨가 쌀쌀해서인지 꼬마열차는 좀처럼 나타날 줄을 모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운행정지! 순전히 날씨 탓이었다.



그렇게 배회하기를 몇십 분. 그러다가 포기하곤 나폴레옹 생가로 발길을 돌린다.


좁은 골목길에 위치한 나폴레옹 생가는 기념관이 되었다.


한적한 골목길에 위치한 생가는 3층짜리 석조건물이고 골목길 이름은 나폴레옹의 어머니 이름을 딴 레티시아, 조그마한 정원이 나있는 생가는 꽤 많은 방문객로 술렁이면서 그렇잖아도 좁은 통로가 복잡하다는 인상마저 풍겼다. 생가이자 기념관 초입에서부터 나폴레옹, 그는 확실히 유럽 근대사의 영웅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거실과 대기실, 침실 그리고 황제 때 만찬장으로 쓰인 연회실 등, 3층짜리 건물에는 제법 기품마저 묻어나고 가구 또한 그때를 증언해 주기에 충분한 소품들로 가득 찼다. 이제는 기념관으로 변한 황제의 생가는 이 도시만큼, 이 섬만큼 많은 방문객들이 품어내는 열기로 생기마저 도는 듯해 보였다.


코르스 섬 아작시오 마을 레티시아 거리에 위치한 나폴레옹 생가 겸 기념관 내부 전시실.


나폴레옹 생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52세의 나이로 위궤양으로 숨진 황제의 데드 마스크였다. 데드 마스크란 말 그대로 죽은 자의 얼굴을 석고로 떠서 청동으로 제작한 것을 가리키는데 황제의 굳게 다문 입술이 죽음의 그림자로 가득했다. 무엇이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증언해 줄 것인가? 그게 바로 데드 마스크였다!


코르스 섬 나폴레옹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는 황제 나폴레옹의 데드 마스크


포병 군사학교를 졸업한 뒤, 프랑스 후방 방위군 사령부 포병 지휘관을 거쳐 코르시카 섬 독립군 지휘관, 반란죄로 도망쳐 다시 프랑스 부대로의 복귀, 그때부터 부대에 배송되어 오던 신문들을 정독한 끝에 당시 제1통령이던 바레스의 정부인 조세핀을 찾아가 그녀에게 운명을 의탁, 그녀로 하여금 프랑스 조정을 움직이게 한 덕분에 이집트 원정군 총사령관을 시작으로 마랭고 전투에서의 대승, 이탈리아를 거머쥔 나폴레옹은 1796년에 과부였던 조세핀과 결혼, 35세이던 1804년 12월 12일 교황 비오 7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프랑스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고는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는 것이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황제의 명에 따라 당시 최고의 역사화가 루이 다비드는 <황제 대관식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 및 베르사유 궁전 소장.


황제는 그 아득한 첫날밤, 군복 한 벌 밖에 없던 나폴레옹을 품어줌으로써 ‘영광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조세핀이 고마워 그때 그녀에게 한 약속, “어느 날 내 그대의 머리 위에 영광의 관을 씌워주마.”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황후에게 씌워줄 황후의 관을 들고 서있는 것이다. 세상은 어느 누구의 말처럼 아이러니이기도 하지만, 어느 누구의 말처럼 운명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Détail de l'empereur.jpg 황제 나폴레옹이 황후 조세핀에게 씌어줄 황후의 관을 들고 있는 모습(부분). 자크-루이 다비드는 화가로서의 삶의 정점에서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 그림을 2점이나 그렸다.


이날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은 자크-루이 다비드라는 한 화가에 의해 섬세하게 화폭으로 옮겨져 루브르 박물관에 걸렸다. 당시 황제는 서른다섯, 황후는 그보다 여섯 살이 많은 마흔한 살이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합스부르크가의 본거지를 점령하고자 울름으로 향한다. 1805년에 파리 루브르 앞에 세워지는 까루젤 문은 나폴레옹이 전투에서 승리했음을 입증해 준다. 1806년 드디어 나폴레옹 군대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 바로 인근의 접경지대인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러시아 군대와 연합한 합스부르크가의 30만 대군을 격파함으로써 진정한 유럽의 평화를 목전에 두게 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또 다시 파리 샹젤리제 대로에 개선문을 세울 것을 지시하고, 남은 것은 러시아뿐, 이로써 나폴레옹은 명실상부한 유럽의 황제가 된다.


사진 왼쪽은 1805년에 나폴레옹에 의해 착공된 까루젤 개선문이고 오른쪽 사진은 1806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30년 뒤인 1836년에 완성한 샹젤리제 개선문이다.


아작시오 주교좌성당인 성모승천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l’Assomption)을 지나 시청 앞 광장으로 들어서자 나폴레옹 기마상이 우뚝 서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섬마을 태생에서 유럽의 황제가 된 이력을 상징하듯 월계관이 씌워져 있다.



우리 네 사람은 좀 더 가까이에서 바다를 보기 위해 아작시오 북쪽 해안을 따라 등대까지 나아갔다. 코르스 산 유일한 맥주인 피에트라(Pietra)가 늦은 점심의 취기를 되살려준 덕분에 바닷가까지 서게 만들었다.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오히려 파도가 나를 향해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무언가 이야기하는 듯한 거친 바람소리는 웅웅거리듯 귓전을 스치고, 이때 처음으로 지중해가 남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는 지중해를 온화하고 우아한 여성쯤으로 여겨온 것이 사실이다.


아작시오 바닷가에 홀로 서 있는 망루를 후려치는 바람은 거세다 못해 뼈끝까지 전해오는 시린 한기마저 품고 있었다.
Ajaccio 47.JPG 아무리 봄이라지만 바닷가에 서니 찬바람에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다.


파도는 거세고 바람도 세찼다. 등대처럼 바람을 맞기에는 인간은 너무 미약했다. 서둘러 해지기 전에 아작시오 도심으로 돌아온 네 사람은 짧은 저녁을 간단히 마치고 나폴레옹 숙소에서 긴 밤을 맞이했다. 그렇듯 내일은 코르트(Corte) 마을로 넘어가야 했다, 저 험한 산길을 타고.


아작시오에서 코르트로 향한 길, 아름답고도 험준한 산길을 넘어가야만이 코르트에 닿는다.


이튿날 요란한 모닝콜 소리에 잠을 깬 우리는 서둘러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허름한 숙소를 나서서 짧으면서도 긴 여정에 나섰다. 오늘 중에 코르트를 거쳐 칼비(Calvi)까지 가야만 했다. 그래야만이 3박 4일의 코르스 완주가 끝났다. 약간의 조바심이 아침 식사마저 서두르게 만들었다.


한번 넘어가 본 적이 있는 아작시오-코르트 간의 협곡은 이제 익숙한 길이 되었다. 생각보다 현대자동차가 생산한 산타페가 힘을 발휘했다. 예전엔 프랑스의 프조 레저용 차량을 이용했으나 렌터카 회사서 이제는 한국 산 레저용 차량을 대여해주니 한국 산 차를 빌려 타고 코르스의 산길을 넘을 수 있구나 감회마저 일었다.


Corse 35-2008.JPG 산골 마을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간단한 요기를 했다.


안개 때문에 산을 오를 때는 잘 보이질 않던 풍광이 산을 넘을 때는 청명한 봄 날씨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태를 드러냈다. 산길을 넘는 동안 한 사람은 힐링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높고 험준한 고산에서 사는 것은 외롭고 위험한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언젠간 그 생각도 바뀌리라. 조그마한 산마을을 수첩에 담던 것이 생각나 아스라한 2008년의 봄 풍경을 떠올려 보았다.



파리에 살면서 좀처럼 산을 볼 일이 없어 코르스 섬 풍광은 다른 어느 곳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마음을 사로잡아갔다. 코르스는 코르스다운 기품을 지니고 있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우리네 산천이 산과 바다가 함께 어우러져 있어 아름답듯이 코르스 역시도 산과 바다의 아름다운 어울림에 그 매력이 있었다.


아작시오에서 코르트까지는 3시간 남짓, 그래도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관계로 제시간에 코르트 마을에 도착했다. 아차 했으면 점심마저 제대로 굶을 뻔한 질주, 마을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가니 조각상 파스칼 파올리가 제일 먼저 우리 일행을 마중했다. 역시 코르트는 그의 동상과 함께 해야 제격이었다.


독수리 둥지처럼 들어앉은 코르트 마을. 독립군 대장 파스칼 파올리의 동상과 좁디 좁은 골목길 풍경. 동양인의 부탁에 순순히 응해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해준 코르트 주민들.


나폴레옹도 한때 코르트에 둥지를 틀었다. 코르트 마을에는 그의 가족들이 머문 집이 여직껏 남아있다. 언덕 위 양지바른 곳에 들어선 피자집에서 간단히 점심을 드는 동안 맞은편 온화한 산등성이를 바라본다. 독립투쟁의 진원지이자 그들의 보호막이었던 산악 움푹 꺼진 곳에 파올리의 독립군 부대 사령부가 자리하고 있다. 이런 생각을 비집고 참 요상하게 생긴 피자집 칼이 시야를 자극한다. 정말이지 피자를 자르는 칼이 재밌게 생겼다. 그래서 다시 사진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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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가족이 머물던 건물이 아직도 남아있는 코르트 마을엔 유난히 칼 제조 공방이 많다. 재밋게 생긴 피자 자르는 칼. 이 칼 역시 마을 공방에서 제작한 칼인 게 분명하다.


파스칼 파올리의 코르트 마을을 마저 돌아본 뒤 계속 산길을 타고 드디어 코르스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칼비(Calvi)에 당도했다. 오늘 하룻동안 코르스의 진풍경을 다 구경한 셈이다. 처음으로 찾은 칼비는 누구의 말처럼 매혹적이었다. 지난번에는 이곳을 찾지 못했었는데, 이번에는 반드시 찾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결국 칼비에까지 발을 들여놓게 만들었다.


Calvi 6.JPG 칼비(Calvi)의 시타델(요새) 너머로 아득히 자동차로 넘어온 험준한 산들이 물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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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황석영 선생은 가까이 시타델(요새)를 배경으로, 아내는 아득히 멀어진 산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시타델(요새)를 한 바퀴 돌아보면서 이곳이 나폴레옹이 야반도주하기 전까지 머물던 곳임을 확인하고는(칼비에는 실제 나폴레옹이 머문 집이 남아있다), 다시 항구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나폴레옹은 이곳에서 마지막 밤을 지새웠다. 황제가 되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 짧은 밤은 공포와 불안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 찬 고뇌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Calvi 15.JPG 나폴레옹이 야반도주한 칼비 시타델(요새) 벼랑에 홀로 바닷바람을 맞고 있는 나무 한 그루.


이런 칼비에서 나는 참으로 근사한 레스토랑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아내를 포함한 일행을 안내했다. 칼비 인근의 일 루싸(Ile Roussa)! 코르시카 말로 ‘다갈색 섬’이란 뜻이다. 이곳 역시 어촌이지만, 해물을 먹고 싶은 욕구가 지나오는 길에 이 조그만 마을까지 기억 속에 되살려주었다.


우리 네 사람은 성게 전식에 코르스 인근의 지중해에서 건져 올린 아주 큰 크기의 메루 생선요리를 주방장 추천으로 맛보게 되었다. 미식가이기도 한 황석영 선생은 아주 흡족한 얼굴로 “뭐 먹을 것이 마땅찮은 곳이라 하더니, 아주 훌륭한 먹거리가 있는 동네야. 코르스는…….”하면서 상탄해 마지않는다.


나 역시 지난번 음식에 대한 악몽을 잊고 이 깊은 코르스의 향과 맛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아주 훌륭한 저녁식사였다. 우리 네 사람 모두 코르스에 온 것을 잘했다 서로 칭찬하기에 바쁜 순간, 그것도 이런 자그마한 어촌에 이렇게 훌륭한 식당이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특별한 저녁 식사가 코르스에서의 감동을 배가시켜 준 순간이기도 했고, 모처럼 긴장을 풀고 긴 잠을 잘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저녁 한 끼가 가져다준 감동은 이처럼 엄청나고 여운마저 남겼다.


나는 그날 밤 저녁을 들기 전 보았던 바다를 노트에 담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밤길엔 황석영 선생의 북한 방문기 뒷이야기가 이어졌다. 황 선생께서는 간혹 노래도 불렀다. 저녁의 취흥에 기분이 좋아졌다는 뜻이리라. 내일 아침이면 이 길 위에서 김기덕, 홍상수에 관한 이야기가 쏟아지리라.


황 선생께서는 입담이 대단한 분이시다. 그래서 장시간의 주행에도 전혀 피곤하지가 않다. 말주변이 없는 사람들과 놀러 다니려면 될 수 있으면 이동거리를 짧게 잡아야 한다. 말주변이 없는 사람은 잠자리와 음식 타박만 하기 일쑤다. 여행하다 보면 사람 성격이 금방 드러나게 마련이고 피곤한 성격의 소유자하고 여행하다 보면 여행자체가 곤혹스럽다. 지옥이 따로 없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주변이 없는 사람들이다. 대화로써 얼마나 여행을 재밌게 이끌어 갈 수가 있는가? 나는 여행하면서 늘 생각에 빠진다. 여행은 인간을 자신도 모르게 자각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드디어 3일째가 되었다. 코르스 섬이 이제 제대로 보이는 듯하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숙소 바로 근처의 암산꼭대기에 올랐다. 멀리 2천 미터가 넘는 영봉들이 줄지어 병풍처럼 둘러쳐진 아래로 칼비 요새가 둥지를 틀고 앉았다. 이 풍경 또한 일품이었다.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풍광을 수첩에 담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풍경은 빼어난 풍경이지만, 어제 수첩에 담은 한적한 바닷가 풍경은 아무 보잘것없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 대비가 선명히 기억 속에 되살아나면서 화려함과 소박함,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진솔한 풍경일지에 대한 의문이 일었다. 그렇긴 해도 오늘 마음은 이 둘 모두를 향하고 있었다. 기실 여행은 이처럼 어느 풍경이나 다 마음에 두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여행지에서 우리 모두가 한껏 들뜨는 이유는 마음의 화판이 이미 마련되어 있기에 그곳에 어떠한 풍경을 담아도 되기 때문이다.


밤 주행과는 달리 아침 주행은 냉철한 비판의식을 곁들인 담화로 구성되었다. 드디어 한국 영화계에 날 선 비판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서사가 없는 문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요즘 쏟아져 나오는 문학작품이나 영화에 서사가 없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은 아침 주행을 조금은 지치게 만들었다.


여행의 담화는 재밌는 대화만 있는 게 아니다. 날 선 시각으로 현실을 직시하면서 비판하는 이야기도 있을 수 있다. 나폴레옹 역시 역사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부분이 있는 것처럼, 여행의 담화란 날 것, 푹 삭힌 것 할 것 없이 모두 입에 올리는데 묘미가 있다. 코르스는 이처럼 여행의 묘미까지도 되살려낸 좋은 여행지로 남을 것이다.


3일째 운전대를 차지하고 차를 칼비에서 바스티아 쪽으로 몬다. 북서에서 북동으로 향하고 있다. 북 코르스의 주도인 바스티아는 아작시오와 함께 코르스를 대표하는 도시다. 인구도 밀집해 있고 그런 기대로 찾아가는 곳이다. 그러나 솔직히 바스티아 역시 내 생애에 처음 찾는 여행지였다.


나는 단지 이곳을 다큐로만 보아왔다. 어느 볼거리가 있는지, 어떤 뮤지엄이 있는지, 어디에 맛있는 음식을 파는 식당이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코르스 섬 남단에 자리한 보니파시오(Bonifatio)였기에 바스티아는 그저 지나치면서 잠깐 들르는, 점심을 먹기 위해 일부러 찾아가는 곳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바스티아는 그러한 여행자에게 어울리지 않게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나는 감동했다. 그래 아작시오만이 코르스라고 생각한 편견을 여지없이 무너뜨린 이 매혹적인 풍광을 뭐라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멀리로 나폴레옹이 유배를 간 엘바(Elba) 섬이 보이고, 점점 시가지로 진입하면서 시야에 가득 들어차는 요새화된 구시가지가 어떤 곳일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단언하건대 바스티아 구시가지 언덕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은 지중해 어느 도시에서 바라보는 감동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으리라는 점, 나폴레옹의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을 아는 여행자로서 저 멀리 떠있는 섬까지도 가슴 한 구석에 쓸어 담을 수 있다는 점에서 바스티아는 코르스의 또 다른 매력을 품고 있는 곳이 틀림없어 보였다.


때 맞춰 점심을 들고 시타델에 들어서자 눈부신 황토 빛 요새가 시야를 가로막고 나선다. 요새 한 복판에 들어서자 푸르디푸른 바다 역시 발치 언덕아래에서 철썩인다. 오랜만에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에 바쁘다. 그러면서 한켠 발코니 식당을 바라보고는 혹여 저곳에 기름진 정어리 요리가 전식으로 나오지 않을까 궁금해 한다.


북 코르스의 주도인 바스티아 시타델에서 바라다본 풍경.
Bastia 11.JPG 발코니 식당에서 소박한 점심을 들고 있는 두 사내.
Bastia 10.JPG 이리저리 행여나 놓칠 까봐 열심히 사진 찍고 있는 남편을 기꺼이 기다려줄 듯한 포즈를 취한 아내.


바닷가에 오니 오직 비릿한 생선을 향한 미감만 발달하는 것 같다. 석쇠로 구운 정어리는 레몬즙만 있으면 최상의 맛이다. 그 비릿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정어리는 겨울철에 먹어야 제 맛이지만, 참치의 먹이사슬로 자리 잡은 어종인 탓에 어디 어느 곳에서 맘대로 먹을 수 있어야 말이지 개탄만 한다. 그놈의 통조림 탓이다. 수확량의 대부분을 통조림으로 가공하다 보니 이 부패하기 쉬운 생선조차 맛보기가 여간 수월치가 않다.


맛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맛있는 정어리를 맛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정어리 잡이의 본거지인 프랑스 남단 콜리우르(Colliour)와 일 드 헤(Ile de Ré)에서 맛본 정어리는 인생 최고의 맛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아내와 함께 지상 최고인 듯한 정어리를 맛봤다.


점심을 그렇게 즐기다 보니 콜리우르가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했다. 여행은 맛있게 먹고 맛있게 즐기는 데 있었다. 커피에도 향이 있고 맛이 있고 기품이 있는데, 하물며 요리에 기품이 없다는 것은 여행이 그만큼 시들해졌다는 의미와도 같다. 그러나 바스티아는 그런 나를 달랜다. 꼭 여행지에서 최상의 맛을 느끼란 법은 없다고.


Sardine.jpeg 맛있게 구워져 식탁에 오른 기름 진 정어리


바스티아를 출발한 차량은 곧게 뻗은 국도를 쉬지 않고 달린다. 오랫동안 길 위에서 본 풍경이지만, 내륙과는 달리 이곳은 바닷가에 닿아서인지 마을들이 모두 낮은 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스페인 할 것 없이 높은 언덕꼭대기에 마을이 들어선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만큼 외적의 침입도 적었을 것이고 섬이 지닌 풍요로움 때문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코르스 역시 수없이 다른 외국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가? 지중해 섬들이 그러하듯 코르스 역시 풍요로움으로 말미암아 수탈과 강점의 역사를 지니게 된 것은 아닌가? 오늘날에도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려는 분위기는 여전한 걸 보면 하나의 독립국가로 거듭난다면 코르스는 더 풍요로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더욱 서방세계의 간섭을 피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으리라. 오랫동안 식민지를 경영해 온 프랑스가 과연 코르스를 포기할 수 있을까? 이 에메랄드 같은 섬을? 도대체 국가주의란 무엇인가? 21세기에 와서 다시 이슈가 되고 있는 이 내셔널리즘의 종착지는 과연 어디란 말인가?


분명한 건 코르스는 코르시카임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독립해야 하고 그들의 언어 또한 되살려내야 한다. 그들은 이탈리아인도 아니고 프랑스인도 아니다. 단지 이해관계를 통해 그렇게 되었을 따름이다. 그들에게는 고유한 언어가 있고 고유한 문화와 전통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나폴레옹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자동차는 어느새 보니파시오 인근의 한적한 바닷가에 이른다. 빌라를 방불케 하는 주택들이 산등성이에 걸터앉아 있는 풍경이 참으로 근사해 보인다. 이런 곳이라면 한 달쯤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을 것 같기만 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를 하면서 식탐을 자극해도 될 것만 같은 동네 바닷가 풍경.


보니파시오를 향해 가는 길에 잠시 들른 바닷가 백사장. 너무도 한적하여 역시 코르시카답다는 느낌이 확 끼쳐오는 바다.


한적한 바닷가 인적도 드문 카페에 들어가 에스프레소 한 잔과 물 한 병을 시킨다. 백사장엔 아직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은 없지만, 공기는 따뜻하고 시원하기까지 하다. 이게 바로 바닷가만의 특징이다. 햇살은 뜨겁지만 바닷바람은 차가운 해양성기후.


에스프레소 한 모금이 다시 길 위로 들어서게 만든다. 얼마 가지 않아 보니파시오를 가리키는 교통 표지판이 나타나니 반갑기까지 하다. 드디어 이번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인 보니파시오에 도착한 탓이리라.



이번에 만큼은 시타델(요새) 안쪽에 숙소를 잡았다. 지난번에는 구도심에서 묵지를 못하고 한밤중 산길을 달려 다시 아작시오로 돌아갔다. 그때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보니파시오에 도착함으로써 남은 길은 사르텐느(Sartène)를 거쳐 아작시오로 돌아가는 여정만 남은 셈이다.


이로써 코르스 섬을 중앙까지 포함하여 차량으로 완전일주를 끝내게 된다. 자축하는 마음으로 다시 에스프레소 커피 한 잔! 그리고 복권 한 장! 복권이 당첨되면 섬에 별장 하나쯤 지을 수도 있으리라. 염소 치즈도 괜찮고 멧돼지 요리도 괜찮으니 여기서 1년의 한 달쯤은 머물 수 있을 것이다. 내 염원은 아직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 내 꿈이 너무 현실적이면서 자본에의 꿈만을 쫓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 네 사람은 시타델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작정했다. 숙소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공동묘지까지 참으로 오랜만의 산책길이 나있었다. 그렇듯 이번 코르스 섬 여행의 묘미는 머무는 도시마다 2시간가량의 산책에 있었다. 아작시오를 제외하고는 모두 요새처럼 마을이 들어앉아 있어 산책하기에도 좋고 골목길 풍경도 맘에 들었다. 더군다나 다 나름의 아름다움을 은닉한 곳이어서 더 좋았다. 그 숨은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기쁨, 그래서 다시 찾은 코르스이긴 하나 예감은 내내 행복할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보니파시오 구도심은 천 길 낭떠러지 위에 펼쳐진다.


보니파시오는 한 때 나폴레옹이 지휘본부를 꾸렸던 곳이다. 나폴레옹은 이곳에서 저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에게는 아직 용맹스러운 군대도 참모도 없었다. 말이 코르스 독립군 제2부대장이지 지위는 말 그대로 오합지졸의 병사 책임자에 불과했다. 나이도 어린 나폴레옹에겐 아직 여자마저 없었다.


그는 매일 바다만 바라보았을 터였다. 밀려오는 파도의 소용돌이에 자신의 미래와 희망을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오직 그것만을 생각했다. 그 꿈이 허망하고 미약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나폴레옹은 이 척박하고도 한적한 해안마을에서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며 다시 자신을 가다듬었을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한때 코르시카 독립군 제2 부대장이었던 내력을 일러주는 돌판.


10살의 나이에 입학한 브뤼엔 군사학교, 파리의 포병학교 생도시절과 옥세르 후방을 담당하던 프랑스 2군 사령부의 말단 지휘관 시절을 떠올리면서, 또한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홀로 된 어머니와 자신을 포함한 8남매의 식솔들을 책임질 까마득한 생존의 문제까지도 생각해 봤을 것이다. 형 조제프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고 있었을 따름이고, 어린 동생들은 모두 나폴레옹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절박한 상황이 그의 의지를 꺾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뜨거운 열기로 촉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보니파시오에서는 안 된다. 이탈리아와 경계를 이룬 이곳 초소에서 경계를 보며 세월을 탕진할 수만은 없다. 그는 어느 날 홀연히 아작시오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이제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파올리의 군대에 대항하는 아작시오 프랑스 반란군 지휘관이 된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태어난 코르스의 영원한 숙적이 되는 나폴레옹, 그러나 그는 이로써 참다운 프랑스 대혁명의 아들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의 기대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자신에의, 자신을 위한 길을 걸어간다. 그는 이 길이야말로 진정 프랑스를 위한 길이고, 코르스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다. 곁에는 오직 엄격한 어머니와 사랑스러운 누이동생 폴린이 함께 했다.


황 선생과 함께 걸어간 보니파시오 단애 끝엔 해변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공동묘지로 나있는 산책로는 코르스에 대한 생각을 최종정리해 준 길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코르스나 나폴레옹 할 것 없이 뒤죽박죽 여직껏 머릿속에서 정리를 못한 채 였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끼어드는 정체성에 관한 자기 회의가 예리한 비수처럼 복잡한 머릿속을 비집고 찔러댔다. 솔직히 근대사의 영웅과 코르스 섬의 자연 풍경과 함께 그때까지도 나는 존재의 공허한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던 탓이었다.


흐르는 시간은 나를 편안케 해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게 더 초조감을, 궁핍함과 함께 불안감을 가중시키기만 했다. 나는 내일 파리로 돌아갈 것이고 그곳에서 또 몇 년간을 보낼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쯤 나폴레옹과 코르스 만의 숙제를 풀 수 있을 것인가? 왜 지금 나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제쳐두고 영웅과 역사와 코르스에 매달려 있는가? 이건 내 인생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지닌 또 다른 과제란 말인가?


우리는 수없이 새로운 숙제에 시달린다. 결론지을 수 없이 많은 삶의 과제가 쉼 없이 밀려 온다. 그같은 엄청난 양으로 쌓인 인생과제에 묻혀 우리의 인생마저도 사그라진다. 고흐에게 정신과 의사 가셰가 말했듯, 단순하게 사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보니파시오의 산책로에서 물끄러미 황 선생을 바라본다. 내 인생의 진정한 스승이라 생각했던 시인 구상 선생보다는 젊게 보이는 황 선생은 그런 나를 흘긋 쳐다본다. 얘가 왜 이러나 싶은 모양이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참으로 오랜만에 주어진 이 고요한 순간에 나는 깨달아간다. 견진 대부였던 구상 선생과도 그랬다. 지금에도 나는 나만의 생각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나는 황 선생과 함께 우선 따뜻한 저녁을 들고자 서둘렀다. 그런 나를 20년간 지켜봐 준 아내가 말없이 따라왔다.


셀카, "이 사진 어따 쓰려고?" 황 선생께서 빙긋이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이런 고요를 깬 건 레스토랑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낸 저녁 식당. 처음 보니파시오에 발을 디뎠을 때 항구 안쪽이 보이는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이제까지 숨 막히게 달려온 코르스를 다시 바라보고자 한 염원에서였다. 그러나 저녁 식당만큼은 바다 쪽에 유리창이 나 있는 식당을 원했다. 이제까지의 여정을 나름 정리해보고자 작심한 탓이었다.


그리 이른 시각이 아닌데도 유일하게 문을 연 레스토랑, 테라스란 말이 반가워 찾아든 저녁 식당.


지중해(地中海)! 내륙에 둘러싸인 섬, 고독한 섬, 그러나 쓸쓸하지만 않은 섬, 내 사십 대의 영혼을 묶어두었던 섬, 그리고 다시 찾은 섬.


코르스 섬 보니파시오 마을에서 바라본 지중해.


나폴레옹은 이 섬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섬을 떠났다가 자신의 의지로 다시 섬에 돌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땐 프랑스 반란군 지휘관이 되어 섬에 거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섬을 떠났다가 황제가 되어 또 다시 돌아왔다.


조세핀은 마르티니크 섬 출신이다. 그녀는 다시는 자신이 태어난 섬을 찾지 않았다. 조세핀은 이후 줄곧 파리를 지켰다. 그리고는 파리 인근의 말메종(Malmaison)에서 죽었다.


Malmaison.JPG


나폴레옹은 황제가 된 뒤에도 코르스를 찾았다가 전쟁터를 누빈 끝에 모스크바 원정에서 패배하여 엘바 섬에 갇힌 후에 백일천하, 그러다 워털루 전투를 마지막으로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형에 처해지는 바람에 결국 다시는 고향 땅에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Waterloo.JPG 워털루(Waterloo) 전적지 기념비. 브뤼셀 가는 도중에 찍은 핸드폰에 남은 유일한 사진.


세네갈 인근의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52살의 나이로 위궤양으로 숨지는 황제 나폴레옹, 그는 엘바 섬에서 이미 황후의 사망소식을 접한 상태였다.


영원한 황후는 파리를 끝까지 지켰다. 섬에서 태어난 황제만이 섬을 떠돌다 섬에서 죽었다. 이 인생 여정을 강제 규정한 것은 영국이란 섬, 제국의 황제에 대한 배려였던가, 아니면 섬마을 출생에 불과한 그에 대한 사망선고와도 같은 해석 때문인가? 역사의 아이러니는 계속된다. 해석의 차이도 기묘하다. 주변 국가들과의 역학관계에 의해서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도 들쭉날쭉 제각기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그리고 역사, 문학, 미술 할 것 없이 모두 당시에 이 영웅에게 집중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점에 주목한다. 나폴레옹은 서양에서 예수 다음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고 회자되는 인물이다.


나는 내일 이 섬을 떠난다. 다시 보니파시오를 떠나 사르텐느에서 파스칼 파올리를 만날 것이다. 그곳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겠지. 점심은 아작시오 차이니스 레스토랑에서, 그리고는 공항으로 달려가 빌린 차량을 반납하고 낮술에 취해 공항 벤치에 앉아 3박 4일간의 여정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에너지는 아직 소진되진 않았다. 나는 다시 파리로 귀환할 것이다. 돌아가는 것이다, 떠나온 곳으로. 그곳에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다. 그렇다면 이 여행은 끝난 것이 아니라 반환점에 불과한 것인가? 인생은 아직도 여행 중인가?


Bonifatio 1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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