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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Dec 26. 2024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

몽생미셸 가는 길 213화

[대문 사진] 100개의 종탑과 함께 하는 바스-노르망디의 주도 캉(Caen)


칼리스 고가교(Le viaduct de Calix)가 보이면 캉(Caen)이다. 다리 아래로는 <바다에 이르는 캉 운하(Le canal de Caen à la mer)>가 깊이 흐르고 있다.


다리 너머에 천 년의 고도가 기다리고 있다.


파리에서 2시간 반을 달려 칼리스 고가교에 이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캉이란 천 년의 고도가 다리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만큼이나 캉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다리 때문이다. 세느 강 다리를 건너면 파리이듯이, <바다에 이르는 캉 운하>를 가로지르는 칼리스 고가교를 건너면 천 년의 고도,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 캉(Caen)이 나타난다.


이 길을 달린 지도 어언 수년이 지났다. 프랑스에 살면서 노르망디를 여행하면서 수없이 지나친 캉이지만, 감회가 새롭다. 늘 아내의 손을 잡고 캉의 거리를 누비리라 작정했지만 단순한 여행조차도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쉬운 일이 아닌 건 누구나 살면서 겪는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캉을 여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2차 세계대전 때 제일 많이 연합군의 포화에 풍비박산이 난 도시가 당시 독일군의 사령부가 주둔해 있던 캉이었기에 그랬나 싶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마치 리용처럼 너무나도 오랜 역사를 품은 도시였던 관계로 함부로 답사를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자동차로 두 시간 반이면 당도하는 곳이 캉이건만 파리에서 그렇게 멀리 느낀 거리감은 역사적으로 그리 만만한 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점 역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듯하다. 하지만 심정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캉을 내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끌어안고 살았던 것 같다.


천 년 전의 성곽 도시가 궁금하여 수없이 캉을 찾아갔고 마침내 아내의 내조에 힘입어 반드시 이 도시를 본격적으로 탐사하리라 작정한 염원이 결실을 맺은 건 2019년 유월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드디어 아내의 손을 잡고 캉의 구시가지에 답사의 첫발을 내디뎠다.



1058년
캉이 수도가 되다.



캉은 젊은 공작이 가장 강력한 노르망디 공국을 세운 곳이다. 하지만 처음 이 도시를 건설한 사람은 기욤 공작이 아니었다. 이미 7세기부터 여러 개의 작은 촌락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1025년 문헌에 따르면, 카팀(Cathim)이라 불린 시골마을이 있었고, 울느(Oulne ; 오흔느(Orne) 강을 가리킴) 이편저편으로 ‘교회들과 포도밭, 목초지, 물레방아, 시장, 시장 사용세와 포구 그리고 온갖 부속물들’이 존재했다. 교회들만 해도 리샤르 2세의 지원으로 생테티엔느 교회, 생소베흐 교회, 생조르쥬 교회, 생질르 교회 그리고 생미셀드보셀르 교회 등 이미 그 시대에 수많은 교회들이 줄줄이 들어서서 많은 사람들이 캉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프랑스 국왕 앙리 1세 시절인 1057년 기욤은 노르망디를 오가면서 캉 같은 곳에 튼튼한 요새가 없다는 걸 늘 아쉬워했다. 만일 이곳에 요새가 있다면 코탕탱과 브쌩 지역 그리고 가까이에 자리한 바닷가에 대한 감시가 훨씬 용이로울 수도 있겠다고 젊은 공작은 판단했다.


이 같은 생각이 지형적으로 툭 튀어나온 돌출부에 해당하는 캉의 경사면에 성을 짓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또한 성 주변으로는 방책을 둘러치고 이를 위해 돌로 된 벽을 쌓는 것이 아주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작은 마을이 지형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 1058년 드디어 궁전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영원히 머무를 거처로써의 궁전은 의미가 없었다. 왜냐면 기욤은 이곳저곳에 거처를 정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캉, 루앙, 본느빌 모두가 기욤이 거처로 정한 곳이었다.


캉의 옛 지도. 1575년에 제작된 지도는 “캉을 한눈에 다 볼 수 있게 제작된 진짜 팸플릿”과 같은 지도라 할 수 있다.



기욤 성채



기욤이 처음 지었던 성은 오늘날 캉에서 독보적인 모습을 띤 건축물로 정평이 난 성의 모양새와는 다르다. 5헥타르에 달하는 면적에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와 같은 성채가 들어섰다. 프랑스에서도 그 시대에 지어진 이와 같은 견고한 성벽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11세기에 공작의 거처와 본당 구실을 했던 생조르쥬 교회와 몇 개의 부속건물들이 이 요새와도 같은 성 안에 들어섰다. 도성 안 도시는 확장을 거듭했고 도시를 빙 두르는 기다란 장벽이 세워졌다. 이어서 성소뵈흐 성당과 생피에르 성당이 들어섰다. 이 기다란 장벽은 공작이 세운 도시(Bourg-le-Duc)의 경계를 이루고, 공작이 세운 도시는 훗날 국왕도시로 변모한다. 나중에 성벽 안에 두 개의 수도원이 들어섰는데, 이 수도원들은 부르(Bourg) 수도원과 수녀원으로 이어진다.


도시 북쪽에서 바라본 캉 성채의 모습을 담은 석판화.


장벽은 앙리 보클레흐가 처음 쌓았고 필립 오귀스트가 보강공사를 했다. 망루(donjon)는 아쉽게도 프랑스 대혁명 때 파괴되었다.


정문은 북쪽에 나있는데, 실제 사용되고 있는 문과는 정반대였다. 기욤의 아들인 앙리 보클레흐는 높이 30미터의 망루를 세웠다. 그리고 그 옆에 바둑판 모양의 건물을 지었는데, 이곳은 집무실이자 화려한 거실 또한 재판소와 같이 여러 용도로 쓰이던 건물이었다. 노르망디 공작의 권위가 추락한 뒤인 1204년 필립 오귀스트 프랑스 국왕은 망루 보강공사를 하고 성 내부를 한 바퀴 도는 둘레에 동서남북 각 방향으로 4개의 망루를 설치했다. [1]


캉(Caen) 성채. 안뜰로 통하는 문 좌측 외벽은 프랑스 국왕 필립 오귀스트가 세웠다. © OREP.


공작 궁전 유적(11세기)과 12세기 때 지어진 바둑판 모양의 건물. 공작 궁전은 공작 가족들이 거주하는 공간과 성당 그리고 궁정으로 꾸며졌다. © OREP.


성벽은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번 수리되었으며, 지정학적 조건을 그대로 따른 아주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 OREP.






[1] 미셀 우흐께 / 질르 피바흐 / 장-프랑수아 세이에흐 공저, 『정복왕 기욤』, 오렢(OREP) 출판사, 파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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