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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Dec 24. 2024

바라빌

몽생미셸 가는 길 212화

[대문 사진] 바라빌 들판에 서있는 기욤(윌리엄) 전승비


캉으로 향한 도상 꺄부르 인근엔 바라빌(Varaville)이란 작은 마을이 있다. 꺄부르로부터 20킬로 남짓 떨어져 있는 마을은 인구 수도 많지 않고 바닷가에 면한 마을이지만, 주민들은 오히려 인근의 12,500 헥타르에 달하는 광대한 습지에서 농업과 낙농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더 많은 동네다.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던 벨 에포크에 파리지엥들이 여름휴가를 즐길 목적으로 조성된 백사장엔 공허하게 물살만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인기척마저 끊긴 모래톱에 물새들이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풍경이 고즈넉하게 다가오는 해안은 이름하여 꼬뜨 드 흘뢰흐(Côte de fleur), ‘꽃 피는 해안’이라 불리는 곳이다. 그러나 바다는 이제 그만! 습지로 향한다. 거기엔 비껴가기엔 너무 안타까운 기념비 하나가 외로이 바람을 맞고 있다.


바라빌 마을이 역사서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천 년 전으로 이른바 기욤의 시대부터다. 1050년부터 60년까지 노르망디 공국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극한 기욤은 프랑크 왕국과의 국경을 맞댄 싸움에서 노르망디 곳곳에서 전투를 치렀다. 프랑크 왕국의 단순왕 샤를과 바이킹의 우두머리 롤로가 <생 클레흐 쉬흐 엪트 조약>을 체결한 뒤 150년이 되어가는 시점이다.


상호불가침 조약에 따라 노르망디 지역을 할양받은 롤로는 마침내 노르망디에 정착한 바이킹들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고 루앙의 백작 작위를 받음으로써 프랑크 왕국과는 군신관계에 따른 평화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었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롤로는 자신이 파괴한 기독교 문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6대째 기욤(영국을 정복한 탓으로 윌리엄이라 불린다)은 마침내 ‘사생아’라는 별명 아닌 누명을 뒤집어쓴 채 권력을 쟁취하기에 이르는데, 선대가 이룩한 찬란한 기독교 문명의 재건에 박차를 가하기 위하여 더 많은 수도원을 짓고 공국의 수도를 루앙에서 캉으로 옮기기까지 한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과의 국경 다툼이 일상화되고 이에 공국의 수도가 위협받게 된 걸 직감한 기욤은 프랑크 왕국과 노르망디 공국 간의 국경을 공고히 하기 위해 처절한 전투를 벌이는데 그게 바로 바라빌 전투다. 이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의 앙리 1세를 무찌르고 프랑크 왕국과의 국경을 오흔느 강 저 너머로 후퇴시킨 기욤은 명실공히 든든한 노르망디 공국을 견고하게 완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공은 결국 앞으로 영국 정벌이라는 시금석으로 작용하였다. 이 바라빌 전투에서의 패배로 말미암아 앙리 1세는 더 이상 노르망디 공국을 넘나 볼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사가들은 바라빌 전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프랑스 국왕 앙리 1세는 노르망디와 앙쥬에 속한 가신들 사이의 정치적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어느 한쪽이 너무 우월하면 다른 한쪽이 국왕에 대해 너무 편협해지고, 국왕은 그 약한 쪽을 지켜줘야 함은 물론, 상황에 따라 정치적 태도를 수정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노르망디 인들의 힘은 더 강화되어 가는 추세였다. 이를 불안하게 지켜보던 군주는 드디어 1054년 노르망디를 침공함으로써 둘 사이의 동맹을 깨버렸다.


앙리 1세의 인장


국왕의 군대는 두 개로 나뉘어 후방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하나는 그의 형제인 위드가 맡았다. 위드는 브래 지역을 향해 이동했다. 또 하나의 군대는 국왕이 제오프루아 마르텔과 함께 진두지휘했다. 국왕은 아브르와 에브뢰 백작이 있는 남쪽을 공격했다. 두 군대는 루앙에서 합류할 예정이었다. 루앙은 그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도시였다. 그러므로 앙리는 기욤의 군대를 여러 갈래로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밤에 모흐트메흐를 지나고 나서야 프랑스 군대는 알아차렸다. 노르망디 군대가 침략자들인 프랑스 군대를 마치 술 취한 사람들처럼 얼빠진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노르망디 군대는 프랑스 군대가 주둔해 있는 요새를 둥글게 에워싸면서 불을 질렀다. 앙리 1세는 결국 후퇴하고 말았다.


기욤에게 두 번씩이나 붙잡힌 패자 앙리 1세는 카페 왕조의 몰락을 걱정해야만 했다.



바라빌 전투



1057년 프랑스 국왕과 앙쥬 백작은 기욤에 대항해 동맹을 새로 맺었다.


오늘날 오흔느 지방에 속하는 북쪽 이에무아에 도착한 프랑코-양쥬뱅 군대는 이미 르브쌩을 초토화한 뒤였다. 이에 비해 기욤의 군대는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이웃한 농부들이 가세하여 훨씬 많아 보였다. 선봉에 선 기욤은 정면으로 치고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프랑스 군대가 지나갈 수밖에 없는 유일한 길이 난 바방 숲에 매복해 있던 기욤의 군대는 프랑스 군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적군을 찾아 나선 프랑스 국왕은 회군을 결정했고 캉으로 되돌아왔다. 이전의 마을들처럼 캉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또한 앙리가 캉으로 오기 위해 로마가도를 따라 진군해서 베누빌의 모래톱을 통해 오흔느 강을 건넜는지에 대해서도 불확실하다. 그는 군대 선두에서 동쪽을 향해 진군했다. 그리고 기욤이 매복해 있는 숲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당도했다. 이처럼 강력한 군대는 디브 만을 향해 진군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디브 만은 썰물이 지면 깊이가 낮아져 충분히 건널 수 있는 곳이다. 여기에 길이 하나 나있는데, 오늘날에도 바라빌 둑이라 부르는 둑길이 바로 그것이다. 나무로 된 다리나 썰물 때 모래톱은 디브 강을 건너기에 충분했지만, 수원이 해안에 가까운 관계로 매번 조류가 밀려들어와 강물이 역류하면서 물살이 격렬하게 일렁이는 곳이다.


따라서 그 시대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에 견주어 물의 흐름을 비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물이 빠져나가는 시간은 몇 시간 안 되지만, 반대로 거대한 바닷물이 차올라 트로안에서 디브까지 그리고 베흐빌에서 브뤼꾸흐까지 짠 바닷물이 층층이 차오르는 것은 순식간이다. 세월이 흘러 이 늪지대는 트로안의 수사들의 공로로 배수 간척지가 되었다.


프랑코-앙쥬뱅 군대가 합류했을 때는 이미 국왕은 디브 강을 건넌 뒤였다. 공작은 공격명령을 내렸고 적군의 배후를 공격했다. 프랑스 보병들은 공황상태에 빠졌으며, 디브 강을 건너려는 자들은 노획물에 짓눌려 강을 건너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국왕이 이끄는 많은 수의 병사가 강을 건너다 익사했다. 또한 많은 수의 병사가 포로로 붙잡혔다. 바스부르(Bassebourg) 언덕에서 앙리 1세는 그의 군대가 궤멸되는 것을 망연히 지켜봐야만 했다. 브뤼꾸흐(Brucourt) 영토 내에 속한 바스부르는 지형이 제일 높은 곳으로써 망루까지의 높이가 129미터에 달했다.


바라빌(Varaville) 전투 유적, 칼바도스(Calvados) 지방. 바스부르(Bassebourg)의 고지대로 말미암아 디브(Dives) 늪지대가 다른 곳보다 높아 보인다.


1059년 마침내 기욤과 앙리는 바라빌 전투에서 생포된 포로들을 풀어주고자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1060년에 연달아 두 개의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로써 상황이 급변했다. 이 해 8월에 앙리 1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아들 필립은 이제 겨우 여덟 살이었다. 숙부인 보두앵 5세에게 섭정을 맡겼는데, 보두앵은 플랑드르의 백작이자 기욤의 장인이었다. 이로써 프랑스와 노르망디 사이가 좁혀진 것만큼은 명백하다.


같은 해 11월 제오프루아가 사망했다. 제오프루아의 사망이야말로 노르망디 인들이 환영해 마지않았다. 그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또 다른 제오프루아가 후계자가 되었는데, 같은 이름을 가진 후계자는 선대의 조카이고 바르뷔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었으며, 신중한 인물이자 평화의 수호자이기도 했다.”[1]


바라빌 전투를 기념하는 비석. 1057년 3월 22일 이곳에서 노르망디 공작은 프랑스 왕을 무찔렀다.


들판에 홀로 외롭게 서있는 기욤 전승비를 뒤로 하고 들판을 달리다 보니 드넓게 펼쳐진 습지가 나타난다. 습지는 12,500 헥타르에 달하고 중세시대 때 수도사들에 의해 조성된 운하는 현대와 와서 이 습지에서 노르망디 최초로 낙농업이 시작되었다는 걸 다시 한번 되새겨준다. 속은 노랗고 겉은 허연 말랑말랑한 꺄망베흐(Camembert) 치즈는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캉(Caen)을 향해 13번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고속도로 우측으로 드넓은 늪지대가 나타난다. 이 늪지대가 바로 최초로 노르망디 산 꺄망베흐 치즈가 태어난 목초지이다.


역사서는 945년 그리고 1944년 : 바라빌(Varaville)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디브 습지는 장빌에서 디브 그리고 메흐빌에서 브뤼꾸흐까지 이어져있다.


“10세기에 로베르 르 포르의 계승 문제를 두고 로베르 파와 카롤링거 파 사이에 노골적인 경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노르망디는 두 강력한 인물들에 의해 분할되었는데, 서약에 따라 우트르메르의 국왕 루이 4세는 루앙과 노르망디 동쪽을 차지하고 프랑스 공작이었던 위그는 바이외와 노르망디 서쪽을 차지했다.


945년 루이는 덴마크 왕 해랄드와 대항하기 위해 당 블르(Dent Bleue)에 개입했다. 이곳은 위그에게 귀속된 땅이었다. 그는 바라빌 늪지대에 속한 꼬흐봉 전투에 참가했지만 포로가 되었다. 덴마크 왕의 이름은 영어로 블루투스(Bluetooth)였는데, 오늘날 무선 인터넷 용어인 이 이름은 HB라는 이니셜로 더 상징적인 것이 되었다. 이는 룬 문자(Harald Bleutooth) 알파벳에서 비롯한 것이다.


루이의 공작령을 거머쥐려 한 시도는 좌초되고, 개입하지 않은 위그는 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 공작과 마주 면한 노르망디 종속지는 943년에서 945년 리샤르1세가 미성년이었던 어려운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더해 노르망디 공작의 비약적인 상승 또한 프랑스 공작들과 카롤링거 국왕들 간의 두 대단한 가문들 사이의 노골적인 경쟁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1944년 6월 5일에서 6일로 넘어가는 밤 동안 600명의 낙하산 부대 요원들이 물에 빠져 익사했거나 실종된 곳 역시 이곳이다. 이때 단지 150명의 군인만이 메흐빌 전투에 합류할 수 있었다. 메흘빌 전투는 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 가운데 몽고메리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이 공격을 감행한 전투였다.”[2]






[1] 미셀 우흐께 / 질르 피바흐 / 장-프랑수아 세이에흐 공저, 『정복왕 기욤』, 오렢(OREP) 출판사, 파리.


[2]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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