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211화
[대문 사진] 꺄부르 해안
‘꽃 피는 해안(Côte de fleur)’ 해안선을 따라 꺄부르(Cabourg)까지 왔다. 남아 있는 해안 마을은 바라빌(Varaville), 그러나 이제는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 캉으로 향해야 할 때다. 백사장으로부터 동쪽 멀리 해안선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지나온 곳들이다. 해안가의 그 많은 마을들, 해안을 따라 뻗어 나간 길을 숨 가쁘게 달려온 것이리라. 무얼 찾고자 했는지, 무얼 얻고자 했는지 생각은 지향이 없고 순간 여행은 공허한 떠돎이 된다.
꺄부르까지 온 것은 천 년 전의 역사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마르셀 프루스트라는 프랑스 작가 한 사람 때문이었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내게는 생소한 여행일 따름이다. 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나선 잠시의 떠돎이 이곳까지 흘러들게 만들었다. 그 정처 없음의 하룻밤과 이틀 낮이 다하는 동안 아무리 스스로를 위로해 봐도 신발 속에 박혀 좀처럼 털어지지 않는 모래알들처럼 여행은 다시 천 년 동안의 서사에의 답사이기를 끈질기게 채근 댄다.
다시 길을 떠나야 할 때다. 꺄부르에서의 하룻밤 유희와도 같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나선 발걸음마저 돌려야 할 시간이다. 문학에 대한 반사적 시신경은 레미니선스의 도움을 빌어 잃어버린 길을 찾아 이곳 꺄부르까지 다시 오게 만들었지만, 이곳에서 맛본 마들렌 과자 맛은 그저 달콤하고 부드러울 뿐 아무 뜻 없는 맛이었다. 그건 마치 부드러운 해안에 밀려드는 포말, 파도가 일으키는 흰 거품과도 같은 언젠가부터 미감을 잃어버린 혀가 잠시 풀렸을 때의 느낌이었다.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저 장대한 바닷길에서 벌어졌던 두 왕국의 천 년 전의 아비규환, 그 뜻 모를 처절함의 속뜻을 간취하기에는 꺄부르는 너무 맹랑하고 실체마저 불분명하다. 회의뿐인 도시는 그러나 하룻밤의 달콤하고도 짧은 잠을 원하는 이들의 휴양지로서는 부족함이 없다. 그랜드 호텔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텅 빈 바다는 적어도 그렇다.
호텔을 나와 여행사무소 근처의 노상카페에서 낡은 커피 머신이 쏟아놓은 뒷맛이 결코 달콤하지 않은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머금어 봐도 내가 여기까지 흘러든 궁금증은 풀리지 않는다. 나는 그걸 단지 문학에 있어서 서사의 부재쯤으로 여기고자 에둘러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백 년 전 한 소설가의 초상에 매달릴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방점을 찍는다. 가던 길을 멈춰서는 안 되고 더군다나 가던 길의 방향을 틀어 엉뚱한 곳으로 향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지금 내가 향하고 있는 궁극의 목적지는 몽생미셸이어야만 하고 그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아직 거쳐야 할 도시들과 마을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끊임없이 환기해야만 한다.
아침이 다하고 오후가 되자 목표는 명확해졌다. 아내 역시 말없이 동의를 해준다. 이 힘들고 쉽게 지쳐버리고 마는 긴 여정 내내 함께 해준 유일한 동반자에게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동의를 구한 것이지만, 아내는 늘 그랬듯이 순순한, 말없는 동행의 의지를 표명해 주었다.
아내의 그 묵시적인 동의는 때론 안타깝게 흔들리기도 하였지만, 철저한 반려자로서의 믿음이라기보다는 시인이자 역사학자로서의 흔들림 없는 신념 때문이었음을 나는 잘 안다. 아내가 향하고 있는 길이나 내가 향하고 있는 길이나 모두 한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되새겨보자면 더욱 그렇다. 때로는 정처 없는 흔들림이 우리 두 사람을 곤혹스레 만들지라도 우리가 함께 가야 할 길임은 분명하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자동차의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는 것은 오늘 중에 천 년 전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길을 가는 동안 대체 무엇 때문에 천 년 전에 이 땅을 지배하던 바이킹의 후손들은 수도를 옮겨야만 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더군다나 내륙의 풍요로운 땅인 루앙(Rouen)을 버리고 바닷가 캉(Caen)으로 수도를 이전해야만 했던 온전한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야 이곳으로 온 이유도 선명해질 것이다.
달리는 차 안에서 유일한 동반자인 아내는 콧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곧 노래를 부를 참인가 보다. 자동차 여행 중에 자동차 시디(CD) 박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대신 그녀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노래를 부르곤 했다. 30여 년의 여행 중에 가끔씩 그녀는 차 안에서 메들리를 이어갔다. 그녀의 메들리를 다 기억하기조차 쉽지 않으리만큼 장시간 운전의 지루함과 피곤함을 그녀의 노래는 대신해 주었다. 그녀가 노래를 시작한다면 우리는 분명 천 년 전의 낯선 땅으로,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땅은, 그 세계는 이제까지 한 번도 짐작하지 못한 세상임에 틀림없다.
기대 반 믿음 반 어둡기 전 떠나야 할 도시를 흘긋거리며 도로로 나선다. 유월의 햇살은 눈 시리게 여름 휴양지에 쏟아진다. 우리 두 사람은 이 계절에 왜 아직 바캉스가 시작하기도 전에 꺄부르를 찾은 걸까? 이쯤에서 여행은 다시 한번 답사가 된다.
천 년 전의 세상을 탐험하는 것이 21세기에도 되풀이되는 것은 역사는 이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념을 넘어선 역사적 사건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 그 시대를 관통한 이들의 처절한 생존에 눌린 미래에 대한 염원 그 믿음은 과연 무엇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을까를 되짚어보자는 속셈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