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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Jul 03. 2024

탐험가 샹플랭의 발자취를 따라

몽생미셸 가는 길 170화

[대문 사진] 캐나다 퀘벡 시에 세워진 건각자 샹플랭 동상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사무엘이란 이름을 지닌 샹플랭은 1574년 염전 마을인 생통쥬의 브루아쥬(Brouage)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마을에는 지금도 그를 기리는 기념비와 성당 스테인드글라스가 남아있다.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이 어촌 마을은 신교도들이 모여 살던 분쟁 지역이기도 했다.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긴 했으나 진취적이고도 실천적인 삶을 산 샹플랭의 내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린 시절부터 삼촌 덕에 여러 차례 신세계를 여행했던 샹플랭은 저 멀리 남아메리카까지 여행하면서 프랑스인으로서는 최초로 파나마 운하의 필요성을 깨달은 인물이기도 하다. 나폴레옹 3세 시절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프랑스는 토목공학자인 귀스타프 에펠의 재능에 힘입어 파나마 운하 공사까지 진두지휘할 정도로 하나로 된 아메리카 대륙을 두 개의 섬으로 만드는데 천부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 귀재와도 같은 유일무이한 국가였다.


샹플랭은 그러나 ‘인문학’을 공부한 귀재는 아니었고 문학적 상상력에 도취한 ‘작가’도 아니었다. 그는 철저히 지리학자였으며, 군인이었고, 탐험가였다. 하지만 모든 영웅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신만의 신화를 쫓는 중세의 영웅이었다.


“인류의 모든 문명은 현실 못지않게 전설에서 유래하는 여행과 발견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간직하고 있다. 위대한 영웅들은 모두 위대한 여행가였다. 그들이 여행한 세계는 대개 보통 사람들은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여행은 긴 신비한 탐험으로 이루어지고, 여정은 상징적인 의미를 띠며, 영웅의 위업 하나하나는 신화를 만들어 냈다.”[1]


장-노엘 로베르는 같은 책에서 다음과 같은 재밌는 예까지 열거한다.


“지혜를 찾기 위해 사막을 지나고 바다를 건너는 바빌로니아인의 서사시 『길가메시』의 주인공, 이란을 지나 이집트에서 박트리아까지 아시아 전체를 정복하는 바빌로니아 전설의 아름다운 여왕 세미라미스, 먼 옛날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사는 사람들의 삶을 연상시키는 여행을 한 너무도 유명한 율리시스, 황금 양털을 찾으러 코카서스 산맥에 도착해서 북해를 항해한 대담무쌍한 이아손, 율리우스와 거의 같은 여정을 밟았고, 그와 마찬가지로 저 세상까지 내려가는 특권을 얻었던 용감한 아이네이아스,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에 있는 황금 사과를 구하러 오늘날의 지브롤터 해협에 있는 헤스페리데스라는 이름이 붙은 암초 부근까지 감히 찾아 나섰던 건장한 헤라클레스, 오리엔트를 정복하여 인도 경계까지 도달했던 쾌활한 디오니소스……그 밖에도 얼마나 많은 영웅들의 모험담이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가.”[2]


고대 신화 속 등장인물들과는 다르게 사무엘 드 샹플랭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꿈꿨다. 막연한 신화적 모델만이 아닌 실천적 모델이 그에게 주어진 셈이다. 프랑스는 이 실천적 모험가로 말미암아 인류 역사상 새로운 신화를 이룩하게 되었다.


향신료, 유황, 금, 은 보석이 아닌 말린 대구와 모피, 구리로 그 탐사의 대상이 달라졌을 뿐이다. 이름하여 대항해 시대가 프랑스에서도 활짝 열린 셈이다. 일찍이 도불하여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연구원에서 수학한 주경철이 그토록 예리하게 파헤친 대항해 시대의 주역들은 모두 프랑스를 비껴가고 있다. 그러나 그 대항해 시대 또는 발견의 시대의 맨 끝자락에 사무엘 드 샹플랭이 자리하고 있다.



샹플랭이 걸어간 길



1602년경, 앙리 4세는 사무엘 드 샹플랭에게 왕실 지리학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모피 무역을 독점한 애마르 드 샤스트(Aymar de Chaste)는 타두싹(Tadoussac)에 교역소를 설립했다. 그는 샹플랭을 자신의 원정대에 초대했고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명확했다. 뉴 프랑스를 탐험하고, 수로를 연구하고, 주요 교역소가 건설될 장소를 지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603년 3월 15일 옹플뢰르를 떠난 후 샹플랭은 1535년 자크 까르띠에(Jacques Cartier)의 여정을 되짚을 준비를 했다. 그는 사귀네(Saguenay)의 일부를 탐험하고 허드슨 만의 실재를 감지했다. 그런 다음 그는 세인트 로렌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 Hochelaga(몬트리올)에 이르렀다.


까르띠에가 이미 방문한 북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 마을의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었으며 생 루이(Saint-Louis) 섬까지 진입하는 일조차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길 안내를 맡은 원주민으로부터 샹플랭은 급류 너머에 세 개의 큰 호수(Erie, Huron 및 Ontario)를 탐험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애마르 드 샤스트(Aymar de Chaste)는 1603년 프랑스에서 사망한 피에르 뒤 구아드몽(Pierre Du Gua de Monts)이 아카디아(Acadia)의 사령관이 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10년 동안 무역을 독점하는 대가로 그는 뉴 프랑스의 이 지역에 매년 60명의 정착민을 세우는 데 동의한 바 있었다.


1604년부터 1607년까지, 사람들을 정착시킬 영구적인 장소를 찾는 것이 여전히 의제에 올랐다. 일시적인 포흐 르와얄(Port-Royal)은 이러한 우려에서 탄생했다.


정착민들이 쟁기질하고, 건물을 짓고, 사냥하고, 낚시를 하는 동안 샹플랭은 해안을 관찰하고 안전한 항구를 찾는 임무를 수행했다.


아카디아에서의 3년 체류 기간 동안 샹플랭은 탐험, 관찰 및 지도 제작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대서양 연안을 따라 메인주에서 케이프 코드 남부까지 거의 1,500킬로미터를 이동했다.


1608년 사무엘 드 샹플랭은 세인트 로렌스(Saint Lawrence) 계곡, 특히 퀘벡이라고 불리던 스타다코나(Stadacona)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의 판단으로는 모피 무역과 중국으로 가는 유명한 항로를 찾는 데 이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세 번째 항해에서 생 장(Saint-Jean) 호수의 존재가 밝혀졌고 샹플랭은 1608년 7월 3일 퀘벡 시티를 설립했다. 그는 지체 없이 그곳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고 눌러앉았다.


샹플랭은 또한 리비에르 데 이로쿼이(리슐리외)를 탐험하여 1609년 7월 14일 자신의 이름을 딴 호수로 난 길을 개척했다. 그 이전의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휴런족, 알곤퀸족, 몬타그네족의 편에 서서 잔인하기로 유명한 이로쿼이족에 대항했다. 그리하여 신대륙 자체 문제에 직면하면서, 오랫동안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이로쿼이족과 프랑스인 간에 형성된 호전적인 관계의 전환을 시도했다.


1611년 샹플랭은 호첼라가 군도로 돌아왔다. 그는 이상적인 안식처를 발견하고 그 앞에 1642년 이후에 도시가 만들어질 르와얄 광장(Place Royale)을 조성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라신 급류를 통과하는 데 성공하여 에티엔 브륄레(Étienne Brûlé)의 공헌을 제외하고는 강과 그 지류를 대륙 내륙으로 탐험한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샹플랭은 이 길이 자신을 동방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1612년에 “중국으로 가는 쉬운 길을 찾으라”는 임무를 받기까지 했다. 그의 뒤를 이은 대부분의 탐험가들처럼, 그도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이듬해 샹플랭은 오타와 강을 따라 알루멧 섬으로 향했다. 그리하여 그는 현재의 온타리오의 심장부로 인도한 후 마침내 1615년 8월 1일에 휴런 호수에 도착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었다.


이 탐험은 사무엘 드 샹플랭이 참여한 마지막 탐험이었다. 다음 몇 년 동안 그는 세인트 로렌스 계곡에 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 전념했으며, 퀘벡 정착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지원하기도 했다.


1629년, 키르케 형제에 의해 퀘벡이 함락된 후, 샹플랭은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지칠 줄 모르고 뉴 프랑스를 지지해 달라고 간청했을 뿐만 아니라, 1633년 5월 22일 ‘새로운 프랑스(Nouvelle France)’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던 샹플랭은 1635년 12월 25일 퀘벡에서 사망했다. 당시 식민지에는 150명의 프랑스인이 살고 있었다.


21세기인 지금 북아메리카에 새로운 프랑스를 건설한 사무엘 드 샹플랭에 대한 캐나다인의 평가는 어떠할까? 과연 그를 당대의 북아메리카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그들과의 우호를 실천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할까? 아니면 황무지나 다를 바 없던 북아메리카의 삼림에 이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낙원을 건설한 영웅으로 칭송하는 것일까?


인디언 아이들에게 프랑스어와 문화를 들려주었던 샹플랭의 아내는 어떤 평가를 받아야 마땅할까? 이 모든 의문에 명확한 답을 주지는 않지만 캐나다 총독의 취임사는 샹플랭의 모험적 정신에 찬사를 보내는 걸로 귀결하고 있다.


“제가 취임 선서를 했을 때, 저는 사무엘 드 샹플랭에 관한 책을 들고 있었습니다. 저는 늘 샹플랭이 프랑스 국기를 꽂고 가톨릭 신앙을 강요하기 위해 병사들과 선원들을 이끌고 상륙하는 정복자라고만 상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책 덕분에, 저는 여러 원주민 언어를 배우고 거의 모든 부족과 친구가 된 이 중요한 역사적 인물에 대해 제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샹플랭은 법의 지배를 강요하고 다양성과 포용성을 포용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요컨대 21세기의 가치를 믿었던 인물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3]


시대마다 영웅은 탄생한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한 사람이며, 국가적 영웅주의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천한 사람이다. 사무엘 드 샹플랭이 중세 프랑스 봉건사회에 기여한 역사적 인물로만 평가되어 선 안 된다는 점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말린 대구와 모피만이 아니라, 구리 광산의 탐사와 개발만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 평등 박애에 입각한 프랑스의 정신을 신대륙인 북아메리카에 전파하고 호시탐탐 식민지를 노리던 영국으로부터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그 기초를 마련한 신자유주의 사상을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샹플랭은 다른 영웅과는 다른 평가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가 인디언적 사고를 지녔다는 점은 그가 남긴 『야만에 대하여』라는 저술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들의 편에서 생명과 자유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절감했던 역사적 인물로서의 재평가는 그래서 프랑스와 캐나다의 우호를 더욱 증진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 이유로 제2차 세계대전 시 제일 먼저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에 뛰어든 젊은이들이 캐나다 병사였다는 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선조의 조국이 독일군에 짓밟히는 걸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조부모들은 선조들의 조국이 신음하고 있는 걸 참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뛰어든 프랑스가 마침내 해방되고 두 나라는 더욱 우호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노르망디의 한 작은 마을에서 두 나라의 미더운 관계까지도 떠올리는 건 바로 한 역사적 인물이자 영웅이었던 탐험가로 말미암아서다. 나는 그의 조각상을 한참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이제야 청동 조각상이 비로소 내게 미소 짓는 듯하다.






[1] 장-노엘 로베르(Jean-Noël Robert), 『로마에서 중국까지(De Rome à la Chine)』, 조성애 옮김, 이산, 1998년, 66쪽.


[2] 같은 책, 66쪽에서 67쪽.


[3] 데이비드 존스턴, 캐나다 총독의 연설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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