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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Jul 02. 2024

새로운 프랑스의 건설

몽생미셸 가는 길 169화

[대문 사진] 피에르 데셀리에가 묘사한 1550년대의 캐나다


프랑스 마지막 왕조인 부르봉 왕조를 활짝 열어젖힌 인물은 앙리 4세였다. 이로써 프랑스 왕국은 발루아 왕조와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왕조에 의해 완벽하게 재창조되었다.


발루아 왕조가 붕괴된 근본 원인은 신구교도들 간의 지칠 줄 모르는 전쟁이 때문이었다. 이 서로 죽이고 죽이는 내전은 30년간 이어지면서 프랑스인들 간에 서로 증오하고 반목하는 결정적 원인을 배태했다.


1572년 8월 24일 바르톨로메오 성인을 기리기 위한 축일에 수도 파리에서 발생한 구교도인 가톨릭 신자들과 신교도인 프로테스탄트 간에 서로 죽이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학살은 프랑스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다.


프랑수아 뒤부아가 묘사한 바로톨레미오 성인 축일에 벌어진 구교도들에 의한 신교도들의 살육 현장의 모습. 로잔 주립 현대미술관.


사건의 배후에는 앙리 4세의 왕비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가 있었다.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몰락한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손녀딸이었다.


그녀가 어린 나이에 수도원에 버려지듯 키워질 때, 이탈리아를 정복한 프랑수아 1세의 눈에 띄어 르네상스의 천재 예술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프랑스로 건너온다. 프랑수아 1세는 그녀를 자신의 후계자였던 왕자(훗날 앙리 2세가 되는 인물)의 배필로 삼고자 함이었다.


작고 못생기고 뚱뚱했던 그녀를 멋쟁이 국왕의 피를 타고난 어린 왕세자가 좋아할 리 만무했다. 더군다나 왕세자에게는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 자신을 품에 안아준 16살 연상의 여인 부왕의 애첩 디안느 드 푸아티에가 있었다.


카트린느 드 메디치가 앙리 2세의 왕비로 공식적으로 등극했을 때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그녀이긴 했지만 남편의 정부를 가리켜 ‘모든 여성의 귀감’이라고 디안느 드 푸아티에를 지목하여 귀족부인들에게 말해야 했을 때의 왕비의 심경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살이 백옥같이 희고 목과 팔다리가 갸름했던 디안느 드 푸아티에는 당대 프랑스 여성들 모두에게 선망과 질투의 대상이었다.


문제는 앙리 2세를 치마폭에서 놓아주지 않았던 디안느의 ‘권력에 대한 집착’이었다. 마상시합이 있기 전날 밤 노스트라다무스가 앙리 2세의 죽음을 예언했건만 보쥬 광장에서 마상시합은 예정대로 개최되고 영국군의 수장 몽고메리가 치켜든 창이 앙리 2세의 오른쪽 눈을 관통하는 바람에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의 품 안에서 밤새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던 앙리 2세는 결국 세상을 뜨고 만다.


평생 검은 옷만을 걸쳤던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는 슈농소 성으로 도망친 디안느를 쫓아간다. 국왕 앙리 2세가 마련해 준 호화로운 성으로 도망친 디안느였지만 그녀를 추격한 기마병들에 잡혀 그녀의 남편이 살고 있는 시골로 보내져 남편의 감시하에 남은 평생 다락방에서 굶주리다 그녀 역시 생을 마감한다.


국왕 앙리 2세의 애첩이었던 디안느 드 푸아티에(Diane de Poitiers)와 국왕이 그녀에게 하사한 슈농소(Cheneaunceau) 성.


앙리 2세도 죽고 국왕의 애첩 디안느 드 푸아티에도 죽고 드디어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녀가 벌인 일은 남편의 애첩을 죽이는 일만이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모든 신교도들을 학살하는 일이 아직 남아있었던 것이다.


춥디 추운 수녀원에 버려지듯 지내는 자신을 건사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비에 오르게 해 준 시아버지 프랑수아 1세의 뜻에 따라 철저히 프랑스 여인이 되고자 다짐했던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 남편 앙리 2세의 뒤를 이어 자신이 낳은 아들들을 프랑스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 딸 마르그리뜨마저 ‘여왕 마고’라 불릴 만큼 훌륭하게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신교도들에 대한 대학살을 진두지휘했던 ‘마귀’란 별명은 끝내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프랑 푸흐뷔스 르 죈느(Frans Pourbus le Jeune)가 묘사한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


프랑스인들 간에 서로 죽이고 죽인 이 내전을 이름하여 종교전쟁이라 하고 이를 종식시킨 인물이 바로 부르봉 왕조의 시조인 앙리 4세다. 스스로 신교도였던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통하여 종교의 자유를 선포함으로써 일단 내분이 가라앉는 양상을 보인다. 이 내분을 완전히 종식시킨 인물이 앞으로 베르사유 궁전을 통해 절대군주제를 확립하는 태양왕 루이 14세다.


파리 퐁 네프(Pont Neuf)에 세워진 앙리 4세 기마상


앙리 4세가 물려받은 프랑스는 허울 좋은 영토를 자랑할 뿐 30년 간의 내전으로 말미암아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국가의 수입은 밑바닥을 돌고 구교도들에게 쫓겨 재능 많던 신교도들마저 다 외국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프랑스에는 뭐 하나 제대로 제능을 발휘할 만한 기술자들이 턱없이 부족했다.


농업 생산량의 감소와 인구의 부족은 당시 프랑스가 직면했던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교육과 재능에 탁월했던 신교도들의 이탈은 프랑스 사회에 심각한 재정적 위기를 초래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를 만회하고자 한 일환이 이름하여 ‘새로운 프랑스’를 찾아 나선 것이었고 그에 부합하는 인물이 사무엘 드 샹플랭이었다.


창문을 통해 새로히 발견한 신대륙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탐험가 사무엘 드 샹플랭


최근에 간행된 이에 관한 괄목할만한 저서가 예증해 주듯, 이 시기에 가톨릭교도였던 프랑스인들이 섭취하던 육고기는 일 년에 150일도 못되었다.[1] 따라서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또 하나의 식량은 생선이었다.


성 금요일에만 먹던 귀한 생선이 마구 쏟아지는 바람에 육고기를 대용할 주식으로 자리 잡은 계기가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북대서양 북아메리카 연안으로 대구 잡이를 나선 프랑스 어선들이 개척한 해로는 앞으로 샹플랭이 찾아 나설 길이 되고 그가 개척한 미지의 땅이 바로 새로운 프랑스가 될 운명에 놓이게 된 셈이다.


이와 함께 북아메리카에서 수집한 모피들이 중개상을 거쳐 프랑스에 반입되어 엄청난 이윤을 남겼다. 이 이윤은 고스란히 앙리 4세의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 따라서 앙리 4세로서는 프랑스를 재건할 정치자금과 프랑스인들을 굶주리지 않게 할 대책이 필요했고 그런 이유로 자신 앞에서 당당하게 신대륙에 대한 탐사의 필요성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왕실 지리학자인 샹플랭이 미더웠던 것이다.






[1] 『프랑스, 새로운 프랑스 – 북아메리카에서의 프랑스인의 출현(France, Nouvelle France - Naissance d'un peuple français en Amérique)』, Somogy Editions d'Art, Pari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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